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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원에 대한 규례 (레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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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7장이다. 먼저 본문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그 다음에 해석하는 순서로 하겠다. 2절부터 8절까지는 서원하여 드리는 사람의 값에 대한 문제다.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 하였으면 성소의 세겔대로 정가 해야 한다. 이 일을 제사장이 한다. 은 세겔로 한다. 20세부터 60세 까지는 얼마 이렇게 쭉 값이 있다. 그래서 60세 이상 남녀의 값을 각각 정해라. 값이 전부 다르다. 제일 비싼 사람이 20세부터 60세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그의 형세대로 제사장이 값을 정하면 된다. 그 다음 9-14절에는 생축으로 드리는 서원물에 대한 규례다. 서원물로 드리는 생축은 거룩하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고 바꾸면 둘다 거룩하다. 부정한 생축을 드릴려면 정가를 하고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한다. 부정한 생축은 나귀 같은 것은 부정한 것이다. 14-15절은 집을 서원물로 드리는 경우다. 집을 드리려면 제사장은 정가하고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무른다. 16-25절은 밭을 서원물로 드리는 경우다. 자기 기업의 밭을 드리면 제사장은 정가하고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한다. 만일에 무르지 않고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희년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서 제사장의 기업이 된다. 자기 기업의 밭이 아니라 사서 드린 밭은 희년에 본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26-27절은 생축의 첫 새끼와 부정한 짐승을 드리는 경우다.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서원물로 구별하여 드리지 못한다. 본래 여호와의 몫이다. 그리고 부정한 짐승이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속량하고 속량하지 않으려면 정가 해서 팔아야 되고 판 값을 드리면 된다.

28-29절에는 아주 바친 물건에 대한 규례다. 여호와께 아주 바친 것은 팔지도 속하지도 못한다. 바친 것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아주 바친 사람은 속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야 된다. 죽이기 전에는 속량하는 방법이 없다 그 말이다.

30-33절은 산물의 십분의 일 (그러니까 곡식이나 과일)과 우양의 십분의 일에 대한 규례다. 땅의 산물의 십분의 일은 본래 여호와의 것이다. 그래서 십분의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면 된다. 그리고 우양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고 바꾸면 둘다 거룩하고 속하지 못한다. 결론적인 언어가 34절에 있다. 34절은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그 말로 끝맺고 있다.

해석이다. 그런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요약한 글은 성경 본문의 맛이 없다. 알기 쉽게 내용만 요약해 버린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내용을 이해하고 다시 본문을 읽어야 좋을 것이다.
해석이다. 언약의 대한 복과 심판에 말씀 후에 이르신 서원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헌신케 하시는 언약을 확정하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26장과 같이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이르신 계명이다 하는 말로 끝난다.

자 일반적으로 언약 체결의 방식은 나는 여호와다 이런 말씀을 쭉하고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렇게 살아라 언약의 내용들을 말씀하고 제일 끝에 잘 들으면 복주고 안 들으면 벌준다. 그렇게 하면 끝난다. 그렇게 하고 끝난다고 하면 26장이 끝이다. 26장에 언약에 대한 복과 저주가 쭉 나와 있다. 만일 안 들으면 칠배 그래도 안 들으면 칠배 그 말이 나왔거든요? 그리고 잘 들으면 내 언약을 항상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성소 삼으셔서 함께 하시겠다.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 26장이 끝나는 말이다. 그래서 26장 제일 끝에 이상은 시내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와 세우신 규례와 율법이니라. 그런 말로 끝나고 있다. 그런데 27장에 덧붙여 놨다. 덧붙여 놓고 제일 끝에는 이상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다. 이 말이 똑 같이 붙어 있다. 그리고 왜 이것이 언약 체결의 복과 저주가 나오면 끝인데 뒤에 더 덧붙여 있는가? 본래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교제의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레위기다. 하나님이 성소에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너희들이 나에게 예물을 드릴려면 이렇게 드려라. 너희가 부정을 입었으면 이렇게 하고 들어와라. 이런 여러 교제의 법칙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제일 끝에다가 헌신에 대한 규례를 덧붙여 놨다.

그러니까 언약 체결을 마무리 짓고 나서 다시 한 번 언약의 헌신 문제를 확증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자식에게 여러말 쭉 하고 나서 자식이 일어나서 갈려고 하는데 다시 불러서 알았냐? 그것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미 끝난 말인데 다시 한 번 더한 식이다. 그것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보자. 제사장이 값을 정하는 이유는 백성이 여호와께 드린 것은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것을 제사장의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그 중에 제일 특산물을 하나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오도록 했다. 그것도 그냥은 가지고 나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 피흘려서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자기 백성의 삶은 아직도 저주 가운데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 상에 바치려면 반드시 죽여서 드려야 되고 기름을 쳐서 드려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향기를 맡으시고 자기 제사장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그래서 값을 정한 것이다.

무를 때 오분의 일을 더하는 이유는 서원물은 온전히 드려진 것이어서 무를 때는 손해를 배상하라는 의미이다. 이전에 속건 제물을 보면 오분의 일을 더하라고 그랬다. 속건제물을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나 피해를 보상하는 규례인데 반드시 정가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하고 그리고 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것은 손해를 배상하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가지고 싶으면 제사장이 값을 정한다. 제사장의 것이니까 그래서 오분의 일을 더하면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제일 처음에 2-8절에 사람에 대한 서원을 보면 가난해서 서원 못할 사람이 없다. 하여튼 일 개월부터 60세 이상 조그만 갓난애부터 60살까지 또 그것을 정가를 제사장이 정한 값을 감당 못할 가난한 사람까지 모두가 헌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남녀 노소 누구나 여호와께 서원하여 자신을 여호와께 드리며 드릴 때는 노동력을 따라 정가하고 가난한 자라도 형편대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다. 여기서 노동력을 따라 정가 한다는 말은 읽어보니까 20세부터 60세 까지는 힘이 제일 쌔고 그냥 단순히 해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령 밭을 무를 때는 희년까지 몇 년남았는가? 그 때까지 얼마나 수확이 나겠는가? 그것을 계산해서 그에 맞춰서 값을 정한다. 그렇게 봤을 때 여기서 사람의 대한 값을 정할 때는 노동력을 따라 값을 정한다. 생산력을 따른 값이다. 그리고 생축의 서원물은 여호와의 것으로 거룩하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며 바꾸면 둘다 거룩하다. 그런데 못 바꿀 것이 있다. 초태생은 바꾸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소나 양 그런 것을 드리면 그것은 못 바꾼다. 만일에 바꾸면 바꾼 것까지 거룩하기 때문에 둘다 그래야 된다. 그리고 아주 바친 것은 무르지 못한다. 아주 바친 사람은 속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인다. 그는 죽도록 봉사하며 죽음을 통해서 온전히 드린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 그러니까 느닷없이 가서 죽여 버리는가? 살인하라 그런 말이 아니라 무르지 못한다. 죽기 전에는 못 무른다.

그 다음에 정가하고 무를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냐면 사람도 드렸다가 무르고 어느 일정 기간 드리면 무르고 또 부정한 생축도 오분의 일을 더하면 무른다. 집 자기 기업의 밭 사서 드린 밭 부정한 짐승의 첫 새끼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 이것은 드리고 오분의 일만 더 보태면 자기 것으로 다시 삼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바꾸거나 무르지 못할 것은 생축 우양의 십분의 일 무르지 않는 기업의 밭과 드린 밭을 다른 사람에게 판 경우 그리고 아주 바친 물건과 사람은 무르지 못한다. 그 의미들을 설명하겠다.

생축의 첫 새끼는 이미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서원물로 드리지 못한다. 아주 바친 사람은 속하지 못하며 반드시 죽인다. 이중에서 무르지 못한 것이 특징인데 첫째는 생축의 첫 새끼 그것은 본래 여호와의 것이니까 서원물로 드리지 못한다. 왜 본래 여호와의 것이다. 서원물로 드리지 못하고 그리고 아주 바친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 서원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온전한 헌신을 말한다. 다른 것도 드리는 것이지만 서원 해서 드리는 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서원하여 바친 것도 오분의 일을 배상하면 무를 수 있고 무르면 다시 자기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초생물과 아주 바친 것은 온전히 여호와의 것이며 무를 수 없다.

이러한 헌신의 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온전케 하셨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헌신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몸으로 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교회는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 몸의 지체로 살며 온전히 헌신되지 아니한 그런 영역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규례는 하나님이 너희들 내 말을 잘 들으면 복주고 안 들으면 벌을 칠 배를 더할란다. 이 말로만 끝나서는 좀 불안하다. 그 뒤에다가 헌신에 규례를 붙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헌신을 받으신다는 확증을 붙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도 드린 것도 드린 것이지만 서원물은 서원을 갚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그것이 성취되면 드리고 하기 때문에 여기서 온전한 헌신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헌신의 규례를 마지막에 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자기를 서원케 하시는 보장이다.

그러면 구약 때는 서원해서 드리고도 만일에 그것이 욕심이 나던지 만일에 오분의 일만 배상하면 자기 것으로 다시 삼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초생물이나 아주 바친 것이나 우양의 십분의 일 생축의 거룩한 것 그런 것은 바꾸지 못한다. 바꾸지 못할 것이 몇 가지 잇고 거의다 오분이 일만 더하면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완전히 드린 것인가 드리지 못한 것인가? 완전히 드린 것은 무르지 못할 것에서 나타나 있다. 초생물 우양의 거룩한 것 아주 바친 것은 절대로 무르지 못한다. 거기서 온전한 헌신은 나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분의 일만 더하면 무를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자기의 것이 된다. 그것이 구약에서 헌신하는 한계점이다. 심지어 나실인 서원도 일정 기간이 끝나면 자유하다. 제사장은 자유할 수 없다. 왜 평생 나실인이기 때문이다. 대 제사장 같으면 더구나 그렇다. 그는 일반 평민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그러나 백성이 나실인 서원을 하면 그 서원 기간이 끝나면 자유다. 그러니까 아직은 온전한 헌신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온전한 헌신은 초생물 첫 것은 항상 여호와의 것이다.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것으로 서원물을 삼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주 바친 것 그것도 하나님의 것이니까 다시 물러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느 일정 기간 바치면 제사장이 값을 정해서 무를 수가 잇고 또 오분의 일을 더하면 바꿀 수가 있다. 이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헌신하는 규례다. 그런데 신약 때는 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초태생이요 모든 제물의 완성이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서원물로 드리셨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자기 몸을 드리셨고 예수님의 드리심 안에서 구약의 드림은 끝난 것이다. 예수님의 드리심에서 새로운 헌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구약 때는 제사장을 헌신함으로 백성들을 헌신하고 장자를 헌신함으로 남은 자를 헌신하고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것으로 삼음으로 나머지 십분의 구를 하나님께 드릴 때를 소망했다. 만일에 차자가 하나님 섬기겠다고 성전에 들어가면 죽는다. 장자만 들어가고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그러면 차자는 절대 아닌가? 차자도 서원 예물을 드릴 수가 있다. 아주 드릴 수도 있다. 그러면 평생 무르지 못하고 거기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일정 기간 드리면 돈으로 계산하면 되고 오분의 일을 더하면 무를 수 잇고 그런다. 사람 대신에 돈을 드린 것이다.

이런 것이 잘못하면 중세 때 면죄부로 올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은 감옥에 가는 대신에 돈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식으로 돈 내서 풀면 난처하다. 그러니까 일반 법개념이 교회에 들어오면 난처한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 때는 장자는 드려져도 차자는 아직 아니다.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어서 완전히 드려져도 나머지를 드리면 무를 수가 있다. 그러니까 구약 때는 아직 온전한 헌신을 주어져 있지 않고 제사장의 헌신에서 장자의 헌신에서 초태생의 헌신에서 그리고 아주 바친 것에서 하나님 앞에 드림이 약속되어 잇고 다른 것은 무를 수 있고 서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에 대한 복과 저주를 말씀하고 나서 서원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에 백성으로 헌신케 하시는 보장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아직 온전한 헌신은 아니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 십분의 구는 내것 그런 계산이 아니라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아직 그렇게 못 드린다. 장자만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지 차자는 아직 아니다. 제사장만 성소에서 봉사하지 일반 백성은 아직은 아니다. 그렇게 처음 것을 드림으로 나머지 것을 드리는 소망 중에서 진행된 것이 구약의 헌신의 규례다. 그런데도 아직 제사장도 휘장밖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지성소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이 죄의 질서 가운데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은혜의 제도였다. 그들은 이런 헌신의 규례를 통해서 꾸준히 하나님 앞에 서원 예물로 자기를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무를 수가 있다. 오분의 일만 배상하면 자기 것으로 가져갈 수가 있다.

그런데 신약 때는 그런 법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초태생으로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고 그분의 헌신에서 새로운 헌신의 시대가 열렸다. 구약이 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대 제사장안에서 새로운 헌신의 시대가 열렸고 새로운 교제의 시대가 열렸다. 구약 때는 대표 것으로 헌신했고 모세의 제도를 따라 헌신했지만 이제는 그런 규례가 없고 대표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전체로 다 드려져 있다.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거룩하지 않는 영역이 없고 어느 때는 하나님 앞에 드렸다가 어느 때는 내 자유로 살았다가 그런 모세 규례적인 그런 방법이 없다. 먹든지 마시든지 앉든지 서든지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서원의 규례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는 여러분이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체로 봉사해야 된다. 여러분 삶의 영역에서 거룩치 않는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성찬식 예물은 떡과 포도주를 우리의 일상의 양식으로 주셨을 때 그것은 우리의 일상 양식을 축복하신 것이다. 구약 때는 성소에서 먹는 것과 성소밖에서 먹는 것이 다르다. 제사장이 먹는 것과 백성이 먹는 것이 다르다. 왜 아직 죄 때문에 거룩의 여러 간격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좌에 오르심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제사장이 먹는 것과 백성이 먹는 간격이 없고 제사장이 백성이든 그런 간격도 없고 거룩하고 그렇지 않는 간격이 없다. 이제는 무를 수 없는 완전한 헌신이 주어졌다. 다 바친 것을 죽여라 한 것처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다. 무를 방법이 없다. 완전한 헌신으로 우리를 복주셨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식사할 때도 주의 몸에 피에 참여하는 의미로 감사 기도를 드려야 여러분이 신약 백성으로 먹는 것이지 교회에서 먹는 것은 거룩하고 집에서 먹는 것은 별것 없고 이런 식으로 기도해서는 그것은 구약보다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에 낸 것은 거룩하고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은 거룩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주님을 떠나서 해석될 수 있는 영역이 하나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 예수안에서 완전한 헌신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완전한 헌신의 복을 주셨다.

구약 때는 모세라도 이런 복이 없었다. 처녀가 형제를 사랑하면 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다. 그냥 만나고 헤어진 시간도 아쉽고 그런다. 그리고 꽉 매이고 싶고 그런데 처음에 시집가서는 그것이 자유다. 아무 염려가 없고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감독관이 집안에 하나 있다. 그래 가지고 왜 나는 자유가 없냐? 처음에 시집와서는 완전히 매인 것이 자유였다. 그리고 약혼 했을 때는 빨리 시집가서 매이고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무슨 철이 잘못 들었는지 왜 나는 자유가 없냐? 사랑의 능력이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서원의 예물로 맹세의 예물로 우리의 모든 것으로 봉사하게 한 것이 복이지 그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떠나 있으면 그것은 온전한 복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몸으로 봉사하도록 그렇게 복을 받았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부부 싸움을 할 때도 내 개인적으로는 할말이 많소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런 개인적인 영역이 없어서 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 주님과의 관계에서 봉사해 줘야 한다. 그것만 성도의 거룩이고 자유다.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고. 개인적인 영역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다. 왜 성질 나는데 참고 있거든. 그런데 그리스도안에서는 그런 영역이 없으니까 자유롭다.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알겠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서원 예물은 헌금 작정한 것만 서원 예물이다. 그것만 안내면 벌받을 것이다. 새벽 기도하고 일어나면 다 잊어버린다. 새벽 기도도 헌신이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겠나이다. 해 놓고 일어나서는 다 잊어버린다. 지금은 서원하고 않는 영역이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 전체가 서원적인 삶이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답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와 레위기기다.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 언약을 맺는 그런 내용이고 그 언약의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기 때문에 성소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성소안에서 교제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 레위기다. 그 교통의 삶 그래서 시내산 말씀은 일단은 레위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십분의 일을 내야만 하나님 앞에 맞고 하는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십분의 일도 못 내니까 목사들이 갑갑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고 우리는 감독관이 아니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전혀 안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구제하든지 심지어 이방인에게 주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가 쓸 것이다. 우리는 감독자기 아니다.

그러나 구약 때는 모세 제도를 따라 헌신하고 더 이상은 못한다. 지금은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 일을 해내야 한다.
만일에 아내에게 당신 알아서 하소 이것이 쉽고도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친한 사람끼리는 계산이 제일 정확한 말이다. 알아서 하라는 말이 제일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가족 공동체가 아니면 알아서 하라는 말이 제일 갑갑한 계산법이다.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는 말은 믿는 신자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고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을 것인지 계산하고 있는 사람은 모를 이야기다. 여러분은 전체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움직여 줘야 한다. 더구나 교회가 함께 모이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 하니까 교회 봉사는 더 많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교회 낸 것만 거룩하고 나머지는 급이 떨어지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약 시대의 삶이 아니다.

마누라에게 당신 일 한데로 월급을 주겠다 하면 그 때부터 마누라는 식모가 된 것이고 남편은 주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교회를 가르쳐서는 안되고 복음을 가르쳐서 복음적인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되지 감독관이 되어서 종교의식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만일에 누가 온다고 해서 자식을 훈련시키면 그것은 군대지 가족은 아니다. 만일에 자식이 인사를 잘 못하면 부모가 창피를 당할 것이다. 그래도 감사를 받듯이 그렇게 훈련해서는 못한다. 그러니까 교회를 어떤 목표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 낼려고 해서는 안되고 자신들이 생을 헌신하도록 가르쳐 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안해도 자기는 해야 한다. 아들 열 명이 있는데 아홉 명은 아무것도 안 가져다 주면 막내가 아버지 생활을 책임져야 해야 되는 것이다. 나는 십분의 일 냈으니까 나는 괜찮고 아홉이 나쁘지요 그것은 못된 자식이다. 세금을 내면 그렇게 내면 된다. 자기 것만 내면 되니까 그러나 아들은 그렇게 내면 안된다. 왜 자기가 전부 책임을 져야 하니까. 누구하고 비교한 것이 아니니까.

이제 우리는 구약의 그런 어린아이의 멍에 모세 제도의 감독관을 따라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자유 자로 온전히 헌신하는 완전한 자유 완전한 서원의 삶 맹세적인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예수님의 헌신 때문에 이 복을 주셨다. 새로운 헌신의 시대를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장자와 차자가 없다. 십분의 일과 십분의 구가 없고 전체다. /김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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