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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어다 (레 22: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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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어다(레 22:26-33)

예수님께서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들려주신 하늘나라 비유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성한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려므나' 하자 큰아들은 '예, 아버님... 가겠습니다'하고 아주 정중하고 속시원히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가질 않습니다. 둘째아들에게도 똑같이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려므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아주 확실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에 자기 행동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합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습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가 큰아들입니까 작은 아들입니까? 누굽니까?...' '둘째 아들'이라는 저들의 내키지 않는 굼뜬 대답을 듣고나서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비유를 주님은 저들에게 들려주신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왜 '예'라고 대답한 큰아들은 가질 않았고 '아니오'라고 대답한 작은 아들은 간 것일까? 그건 바로 저들 속마음의 차이였습니다. 큰아들은 겉으로는 '예' 했지만 마음으로는 '아니오'했고, 작은 아들은 겉으로는 '아니오' 했지만 곧 뉘우치고 속으로 '예' 한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게 효자는 작은 아들이지 큰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자 그럼 이 비유 속에 우리 자신을 한번 투영시켜 보십시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이 두 아들 중 어떤 아들이라고 생각되십니까? 큰아들 같습니까 작은 아들 같습니까? 어느 집사님이 이 말씀으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농담반진담반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식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네...' 그분에게도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녀석들로 인해 마음 고생이 무척 심합니다. 이 두 아들이 꼭 자기 자식들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첫째도 아니고 둘째도 아닌 '예, 어머님, 제가 가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하고 그대로 순종해 가서 일하는 그런 셋째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다른 집사님이 한번 쿡 찔릅니다. '집사님은 그런 자식이었수?...' 과연 그런 자식이 있을까요? 그나마 뉘우치고 간 자식, 그런 자식이라면 훌륭한 자식이지요.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큰아들은 다분히 처세적이고 체면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그는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지 아니하려고 '네, 아버님'하고 아주 공손히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 같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듬직한 맏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버지 말씀을 따를 마음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식으로 순종하고, 말로 순종하고, 형식과 예절로는 순종했지만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누가 그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애초부터 하기 싫었고 가기 싫었지만 노인네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릴 수 있나요? 그러니 그 앞에선 간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기만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고 사는 인생'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노라 하지만 거룩함도 없고, 사랑도 없고, 섬김도 없고, 희생도 없습니다. 한다고 하나 말뿐입니다. 자기를 내어준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허세와 위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고, 감사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감사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법에 대한 지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제사를 통해 예배의 원리와 실제를 가르치는 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늘 백성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성경입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 가장 안읽혀지는 성경이 또한 이 레위기이기도 합니다. 레위기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경이라고 불리워지는 다섯 책 중에 한 가운데에 자리하는 오경의 중심입니다. 즉 예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거룩을 주제 삼고 성화를 통한 온전성을 추구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무엇보다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제사장 나라로서 이 세상을 향해 서야 하기에 1-17장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을, 18-27장까지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윤리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결 법전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이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가공할 세속화 신앙에 물들어 가고 생활의 이율배반적인 괴리 현상으로 병들어간다는 지적이 높습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만 간다는 겁니다. 세상의 편리주의에 물들어가면서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 원인이 바로 예배의 부재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는 모이기에 힘쓰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을 성전 밖에서, 말씀 밖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정신과 영혼이 세속화되어가고 거기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자연히 예배의 감격도 없고, 감사도 없고, 충격도 없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그런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하고,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지만 중심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불태우는 그런 제사, 그런 예배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를 제물삼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멀찌기 앉아서 예배를 '보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 좋은 앞자리는 텅 비어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도 그렇게 떨어져 앉습니까? 사랑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들리는데도 자꾸 더 가까이 다가가고 몸을 쏠려 기울여 듣습니다.

예배의 정신은 '신령과 진정'입니다. '참마음'으로 드리는 겁니다. 큰아들처럼 건성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겁니다. 이 예배가 잘 되어야 합니다. 이게 잘되면 한 주간이 잘됩니다. 하나님과의 첫 번째 만나는 이 만남에 우리의 한 주간이 달려있고 우리의 평생이 달려있는 겁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제사의 목적은 열납에 있습니다. '열납'이란 acceptance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여야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제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 예물을 드리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29절에 보면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이 감사절에 주시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리라...' 제사는 제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제물 없는 제사는 성립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리고 아주 가난한 경우에는 비둘기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가축들이 열납되도록 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리는 제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그 예배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그 사람'을 받으신다는 겁니다. 제물은 그 사람의 중심을 표현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불공평하신 게 아닐까요? 그런데 창4:4-5절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보십시오. '아벨의' 제물, '가인의' 제물이 아닙니다.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 드리는 자와 드리는 예물이 한데 얽혀있습니다. 그건 동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건 고깃덩어리와 기름이 아니라 아벨 자신이었고 하나님이 안받으신 것은 곡식이 아니라 가인 자신이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 우리는 예물드리는 나 자신이 드려지는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열납되지 않는 예물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배요 예배의 핵심에는 봉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인간의 삶의 최고의 표현이 예배이요 그 중심에 자기를 드리는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봉헌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이것을 드리듯이 이 몸도 드립니다...' 그 자기 드림의 표가 바로 예물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무질서하고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워가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 속에 정말 예배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오늘도 진정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미리 이전에 나와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를 준비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담아 드릴 중심담긴 예물을 준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그 예배는 다름 아닌 자기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가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은 우리가 건네는 돈 몇 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새사람으로 예배를 통해 말씀으로, 성령으로 자기를 개조해야 하는 겁니다. 내 뜻에 하나님을 가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에 나를 가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되는 게 예배지 하나님을 우리의 종 삼는 게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한 시간 드리고 나면 우리 속에 채워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가 새로워지고 변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에게 일어나는 기적이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려고 찾으시는 겁니다.

둘째아들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둘째아들은 첫째아들과 다르게 아주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갈 마음이 없어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갑니다. 여기 뉘우친다는 말은 메타노이아, 곧 회개를 말합니다. 생각의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는 처음엔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아버지가 할 일은 아버지가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뒤집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옳고 정당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내 입장에서의 생각이었고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는 여기서 중요한 자기발견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너무 에고 센트릭,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고 그랬더니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포도원에 가서 땀흘려 일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러면 내가 열납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전쟁의 위협과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저희의 보호자가 되사 지난 반년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자가 되도록 저를 받으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31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로 너희 중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고 너희는 나로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맥추감사주일엔 우리 자신이 열납되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리십시다. 그게 이 감사주일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더 큰 감사의 제목으로, 더 많은 감사의 제목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았던 샤를르 푸꼬의 고백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진실한 감사가 솟구치기를 바랍니다.

“한결같은 아버지 하나님, 저희 숨소리로 감사를 드립니다. 들이쉬며 또한 내쉬며, 살아온 시간만큼 앞으로도 한결같이 주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게 하시니 저희 숨소리로 감사를 드립니다/따뜻하신 사랑의 하나님, 저희 가슴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살았음의 기쁨을 느끼는 만큼, 살아가는 용기를 가슴에 담아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가슴깊이 이렇듯 살가운 기쁨을 주시니 저희 가슴으로 감사를 드립니다/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의 손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손으로 만지며 만들어 가는 세상, 손으로 잡아 일으키며 서로 섬기는 삶, 손길이 머무는 곳에서 저희는 주님을 만납니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만남을 주시니 저희의 손으로 감사를 드립니다/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발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걷습니다. 두발로 서서 이 척박한 땅을 걷습니다. 걸음걸음 발 닿는 곳에 함께 하시어 언제나 두려움 없이 걸음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발 닿는 곳곳에서 저희의 발로 감사를 드립니다/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의 노래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에게 노래가 있습니다. 아픔의 순간 저희는 노래합니다. 기쁨의 자리에, 만남의 자리에서 저희는 노래를 찾습니다. 저희에게 노래가 있어, 노래하는 가슴이 있어, 노래하는 삶을 주신 하나님께 저희는 노래로 감사를 드립니다/저희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저희의 삶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한 순간에 머물지 않는 저희의 삶,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한결같은 주님을 만납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지만 바로 평범한 그 일상 속에 가장 소중한 저희의 삶이 있고, 만남이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저희의 삶 전부로 감사를 드립니다.”
 (2005-06-2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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