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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기에 좋았더라 (창 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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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천지창조로부터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실 때까지의 진리의 계시, 율법의 제정, 봉헌의 생활, 예언의 선포가 있으며 성별된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구약&8231;신약으로 구분해 말하는데 성약(testament)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종합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확고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구약을 폐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약 속에 나타내 보이고 있는 예언보다 나은 소망을 가져다주므로 구약을 영광스럽게 하고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더 영광에 넘치기는 하지만 구약 역시 여전히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처음 나오는 다섯 가지의 책을 모세 오경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종이며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 그리고 성문서로 구분하셨는데 창세기는 율법에 속하는 책입니다.

모든 종교의 기초는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욥 35:10)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계는 영원한 것이고, 스스로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계란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모든 철학자나 과학자들의 말보다 성경의 맨 첫 말씀이 더 확실하고, 더 훌륭하고 보다 만족스러움을 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보다 더 분명한 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이론이나 누가 옳으냐 하는 것으로 변론하려 하지 아니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도 이 시간 우주 생성에 대해서 무슨 변론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믿습니다. 사도 신경의 첫 구절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짐승과 달리 특별히 소유한 세 가지 보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이성이며, 둘째는 양심이며, 셋째는 우리 안에 있는 불멸의 영혼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인간만이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주 창조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은 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의 할 일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생각한 바 있는 고린도 후서 4장 6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옛 창조는 새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적인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옛 창조를 하시던 그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빛을 볼 수 있도록 비춰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은 신비롭게도 사람의 영에 들어오셔서 그 위에 머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성령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축복은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에 빛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가지고 인간의 이해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야말로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복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러면 빛이 어떻게 우리 인간의 마음에 비추게 되었습니까? 말씀으로 호칭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된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요한복음 1장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참 빛입니다. 세상에 임하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던 빛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령님은 새 창조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는 사람 위에 머물고 계십니다. 예수님 또한 창조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는 말씀이십니다. 그가 없으셨다면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 1-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빛이 왔습니다. 아버지 역시 동일한 거룩한 사역에 연합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성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의 어두움 위에 내렸던 그 빛은 매우 신비로운 빛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궁창에 빛을 내는 태양이나 달이 없었던 만큼 이 빛은 자연 법칙을 따라 내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빛이 사람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빛에 대하여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그 빛이 왔든지 그것이 참빛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빛이며, 위대한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가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지구를 만드는 데는 엿새가 걸렸지만 지구를 비치는 데는 순간으로 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역사는 점진적이지만 은혜의 투입은 순간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박하거나 단명한 것은 아닙니다. 빛이 빨리 왔다고 해서 빨리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빛은 계속 머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깊음 위를 비쳐 주신 그날 이래로 지금까지 축복의 그 빛이 지구를 결단코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도 순간적으로 주시지만, 결코 떠나는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첫날은 우리들의 영적 생명과 회개, 그리고 주님을 처음으로 믿던 신앙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믿게 되신 분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한지 오래 된 분이 최근에 빛의 비침을 받아 믿게 된 분에 대한 의무가 무엇임을 생각해야겠습니다.



1.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빛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 동안은 죄악 가운데서, 어두움 가운데서 두려워하며 절망적인 생활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빛이 내게 임해서 밝은 생활을 하며 누구도 알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셨습니까? 이 회개와 믿음을 생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모도 이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친구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할 때도 누가 좀 보았으면, 목사님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에 섭섭함이 생겨서 낙심하고 물러서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여러분, 교인들이 몰라주고, 목사가 보지 못하여도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8231;&8231;&8231;&8231;&8231;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15장 마지막 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이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도 보십니다. 이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우리가 어릴 때 밖에서 놀다가 다른 애한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매를 맞으면 그 자리에서는 울지 못하다가 집에 와서 엄마를 보게 되면 서럽게 목을 놓아 웁니다. 우리를 보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 빛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세상에 들어왔지만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빛은 소리가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아침마다 동편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무슨 소리를 굉장히 냅니까? 아무런 소리없이 가만히 떠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을 보고 계십니다. 빛은 그 자체가 광고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가 아무리 조용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져 있고, 또 아무리 미미하고 평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빛을 선포하는 나팔은 없으나 하나님은 그 빛을 보셨으며, 빛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으나 하나님은 묵묵히 그 빛을 보셨습니다. 우리의 은혜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없을 때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빛이 없다면 볼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었어도 빛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임할 때 아름다운 세계에서 기뻐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을 인정하십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즐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믿기 시작한 사람들의 심령을 보시기에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처음 받은 것이라도 선한 것입니다. 창조의 첫날 그 빛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빛은 어두움과 싸웁니다. 요한 번연은 “빛은 어두움과 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두움에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 나게 되어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한 때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3장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투쟁의 과정에 있습니다. 아직도 은혜와 죄가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움과 싸우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빛을 인정해 주시고, 그 빛을 선하다고 부르시는 사실을 기억하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회개라도 회개는 선한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은 선한 것입니다. 젖은 나무가 타는 것처럼 활활 타지 못하고 시름시름 타고 있는 생명이라도 그 생명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빛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사랑하십니다. 빛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빛은 진리를 드러냅니다. 빛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빛을 만드시고 정리하시는데 하루를 바치셨습니다. 창조에 소요된 엿새 중에 빛을 창조하는데 하루를 쓰셨습니다. 이것은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맨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빛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빛은 곧 생명입니다.



3.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을 식별하십니다.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 좋았다”고 했습니다. 빛은 그 자체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역시 그렇습니다. 빛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빛처럼 간단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빛처럼 복잡한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빛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빛에 대해서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도 간단하면서 또한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생명을 깨우치는 은혜,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 위로하는 은혜, 가르치는 은혜, 지켜 주시는 은혜, 거룩하게 하는 은혜, 완전하게 하는 은혜 등 다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은혜는 간단하나 그 역사가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선택해 주셨고,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속해 주셨고, 성령님의 은혜는 우리를 중생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빛은 또한 얼마나 평범합니까? 우리는 어디를 가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년 내내 빛을 봅니다. 이 빛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비춰 줍니다. 빛은 어느 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값없이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은 빛을 비추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암실에 들어앉아 있으면 빛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시지만 그 은혜를 받을 눈이 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은 나약하면서도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지만 그 안에 위대한 잠재력이 들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이 빛은 우리로 하여금 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놀라움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구조와 성질이 모두가 다른 많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봄은 봄대로 새싹이 돋아나며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고, 여름은 만물이 무성한 것으로 아름답고,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아름답게 무르익고 나무가 단풍으로 물드는데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겨울에는 흰 눈이 세계를 은색으로 덮어 버리는데 그 장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얼마나 정밀하게 만드셨습니까? 현미경의 힘을 빌어 자연계의 활동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떤 인간의 예술작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정밀한 것에 대해 감동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곤충의 다리 하나라도 만들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그 질서를 보십시오. 모든 존재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운행에 있어서 정확한 조화, 그리고 모든 원인들 사이의 놀랄 만한 연관성에 감격할 뿐입니다. 우리가 셀 수 없는 수를 천문학적 숫자라고 하는데, 그 천문학적 숫자를 가진 우주 만물이 운영되어 가는데 충돌사고 하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울시내에 자동차가 많다고 해서 하루에도 수많은 차들이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이 우주는 그런 사고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신비하고, 경이롭고, 감격적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시고 지금도 운영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지구 위에 만물을 만드시는데 만드신 후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말씀이 거듭 나옵니다.
우리도 무엇을 보나 하나님의 눈을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만 보는데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태양을 쳐다보고도 “태양에 흠이 있다”고 말합니다. 달을 쳐다보면서도 달빛이 창백하다고 말합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불행한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을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시고, 만물을 만드실 때마다 좋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빛을 바라보고, 빛을 즐기고, 만물을 바라보며 좋게 볼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좋게 볼 수가 있습니까? 내 마음 속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는 데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으로 보세요. 기쁨으로 보세요. 평안한 중에 보세요. 모두가 좋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미움과 시기, 슬픔과 불평함이 가득 차 있는 가운데 보면 모두가 좋지 않아 보일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좋게 보는 사람을 내가 나쁘게 보지 맙시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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