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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로 보고 바로 택합시다 (창 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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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비가 적게 오는 곳이므로 물이 적고 따라서 풀이 적기 때문에 가축을 키우는데 풀밭과 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 때문에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고 이로 인해서 주인 아브라함과 롯의 마음이 서로 상했습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마음이 쓰여졌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꼴이 되었으니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도 했을 뿐더러 그들이 비웃을 생각을 하니 망신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와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서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런데 10절 이하를 보세요.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 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했습니다.
롯이 그 삼촌 아브라함를 떠날 때 그가 무엇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롯의 경우를 보세요. 사실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요, 그런 마음의 표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경우가 아닙니까? 또 경우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선택을 하라고 말했지만 그 선택권을 다시 아브라함에게 양보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서 어디서도 롯이 그의 삼촌인 아브라함에게 복종하거나 존경하거나 양보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제안했을 때 롯은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없이 그대로 했습니다. 정욕과 이기심이 앞서게 되면 사람을 이렇게 경우도 없게 하고 버릇도 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롯은 소돔 땅의 비옥함을 유의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보았다.”고 했는데 그곳은 소돔 평야였습니다. 그 땅은 롯이 감복할 만큼 “온 땅에 물이 넉넉해서 롯이 그 모든 들을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그 계곡은 이제 그에게 지극히 즐거운 전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가 보는 대로 그곳의 조건이 매우 좋았습니다. 거기서는 행복하게 만족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처럼 비옥한 땅에 살면 분명히 번창하여 매우 부유하게 될 것이며 안락하게 정착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롯이 본 전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옷을 입을까? 생각하고 옷을 선택해서 입습니다. 주부가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을 할까? 무엇부터 할까? 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오늘 누구를 만날까? 무엇부터 할까? 어디를 먼저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매일매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를 혹은 셋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학생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느 학교에 갈까? 대학 같으면 어느 과에서 공부할까? 어떤 분야를 특별히 배울까? 어떤 취미를 가지고 살아갈까? 이런 모든 것도 선택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청년시대에 있어서는 더 중대한 선택을 할 일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생 동안 어떤 방면에 헌신할까? 사업을 하면 무슨 사업을 할까? 직장 생활을 하면 어떤 직장에서 일할까? 혹은 결혼기가 되면 내가 어떤 배우자와 결혼을 할까? 이런 모든 것은 일생에 크게 관계되는 중대한 선택들입니다.

가령, 배우자를 택하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그저 부모님들이 알아서 배우자를 택해 주면서 같이 살라고 했습니다. 본인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일도 많이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들의 마음에 선택의 자유가 있고 부모의 동의하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이 가운데도 장래를 생각하고 이성 교제를 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통으로 배우자를 택하는데 조건이 남자 편에서는 여성의 미모, 여자 편에서는 남자의 경제력을 본다고 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것이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겉모양만 보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됨을 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얼마 지내다 보면 겉모양은 다 낡아집니다.
남자의 경제력이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보통으로 고생하기 싫어하니까요. 돈이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보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돈보고 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제가 잘 아는 한 분이 제약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재력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삽니다. 한번은 같은 제약업계에서 일하시는 다른 제약회사의 회장이 찾아와서 이런 말 저런 말하다가 서로 가까운 사이니까 다른 사람을 내세우지 않고 직접 청혼을 했습니다. “회장님과 저와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고 가정적으로도 서로 잘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그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회장님 댁에 서울공대를 졸업한 아드님이 있지 않습니까?”
“예, 있습니다.”
“제 집 딸애가 금년 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 집에서 여러 가지로 의논하다가 회장님 댁에서만 좋게 생각하시면 제 딸애를 회장님댁 자부로 보냈으면 하는 합의를 저희끼리 보았습니다. 이거 어떻게 보면 결례가 되고 염치없는 일인 줄 알면서 우리 두 사람 사이야 무슨 격이 있습니까? 그 아드님 아직 미혼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요.”
“예, 그렇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습니까? 회장님만 좋게 생각하시면 두 사람 서로 좀 교제해 보도록 기회를 주면 좋겠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회장님댁에서 제 자식놈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니 저로서는 고마운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가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자기의 생각이 있어서 공부를 더 하고 있습니다.”
“아무렴이요. 공부를 더해야지요. 그래야 큰 일꾼이 될 것 아닙니까? 결혼을 하고도 공부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애놈이 무슨 생각인지 신학을 공부합니다.”
“신학이라니요? 그것이 무슨 공부인데요?”
“쉽게 말해서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 애는 돈버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 나름대로 보람되게 살아 보겠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말려도 보았지만 자기의 생각일 분명하다니 어떻게 합니까? 제가 양보했습니다.”
청혼을 했던 회장님이 그 대답을 들으시더니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아,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더니 그저 물러가고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부모도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돈 많은 집, 돈 잘 버는 사람에게 자식을 보내려고 합니다.

물론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청년시대는 우리 일생의 분수령과 같습니다. 분기점입니다.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때입니다. 청년시대에 방향을 옳게 잡으면 일생을 옳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시대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일생을 그르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시절은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장성한 후에 남다른 고민이 그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바로 왕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호화롭게 자라며 공부하며 모든 애굽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차차 알고 보니 자기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그때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냥 애굽 사람들과 이 궁전에서 남아 있을 것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핍박을 받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졌으니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며 살 것이냐?” 이 두 가지 갈림길 가운데서 모세는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자기가 애굽의 궁전에 그냥 남아 있으면 물론 호화로운 생활과 평안하게 살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을 내던지고 자기의 민족과 같이 고생과 희생을 택하기로 각오하고 그 형극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 이 중대한 선택이 모세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은 그와 반대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에게 선택을 먼저 하라고 했는데 롯이 눈을 들어보니 저 동남편으로 소돔과 고모라 뜰에 푸른 풀이 우거졌는데 가축을 먹이기에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푸른 풀과 넉넉한 물만 보고 얼른 대답하는 말이 “예, 저는 저 소돔 들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전히 풀만 보고, 물만 보고,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갔더니 오래되지 않아서 큰 전쟁이 일어나 여러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습격해서 많은 재산과 왕들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롯과 그 가족도 전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군대가 가서 겨우 빼앗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뿐입니까? 나중에 좀 자세히 생각하겠습니다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악했는데 전혀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 악의 양이 차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망시킬 때 간신히 자기 생명을 구하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의 아내는 그만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푸른 풀만 보고 선택한 결과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롯이 소돔 사람과 함께 사는 동안 그들과의 교제로 자기 의로운 영혼은 번민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불을 그 도성에 불사르고 부귀와 쾌락을 멸했습니다. 롯을 산으로 도망하게 하기까지 그는 단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육욕적인 선택은 죄의 선택입니다. 이해 관계나 직업 안정을 택하는 일에 있어서 육신이나 눈의 욕망, 또는 이생의 교만에 따라 이끌리면서 영혼과 신앙의 유익을 고려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고 목적하던 것은 실망으로 끝나며 자신의 마음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롯의 선택의 기준이 어디 있었습니까?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인간 생활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면 바로 볼 줄을 알아야 합니다. 롯이 눈을 들어 동편에 있는 요단 들을 바라보매 물이 많고 푸른 풀이 무성하니 그곳을 택하겠다 했습니다. 푸른 풀과 물이 많은 것만 보고 거기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고 거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바로 보고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 일생의 흥망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무엇을 바로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된 말 같지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는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물 한 컵을 떠 왔다고 하면 얼른 보기는 아주 맑고 정결한 물같이 보이지만 그 물 한방울을 떠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물 가운데 여러 가지 미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을 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위생을 지킬줄 몰랐습니다. 물질 가운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균을 볼 줄 알면서부터 차츰 의학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통 물질은 다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자와 양자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기 전에는 이 물질 속에서 내재한 힘을 사람들이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 때부터 원자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이지만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 데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발 뿌리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먼 장래에 있는 것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만 보면 안되고, 아시아도 보고, 유럽도 보고, 공산권도 보고, 전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구 위에 산다고 땅 위만 보면 안됩니다. 눈을 들어 요단 들만 볼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만 보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국내만 보면 안됩니다. 외국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겉은 잘 보이지만 그 속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겉만 보지 말고 그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지요. 밖의 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또 현재는 보이지만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까지도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만 보면 안됩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장래가 어떻게 될 줄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일제 말기에 일본 사람들이 홍콩, 싱가폴, 말레이지아와 필리핀을 점령하게 되니까 이제는 온 세계가 일본의 천지가 되나 보다 하고 크게 감동을 받은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고, 심지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방 요배도 하고&8231;&8231;&8231;&8231;&8231;&8231;현재만 보았습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3&8231;15 선거가 있은 다음 그때 승리한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현재만 보았습니다. 장차 올 4&8231;19는 보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유신헌법을 만들어 놓고 영구적인 집권을 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10&8231;26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전두환 정권의 소위 5공 비리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이렇게까지 뒤집힐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승리했다고 즐거워할 것만이 아니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정치하시는 분들은 장래의 역사를 미리 보고 자신의 행동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물질적 세계는 육안으로 보이지만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도 겉사람은 육안으로 보이지만 속사람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속 사람, 그 영혼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천지의 대주재 하나님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나라를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전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 아람군대가 포위를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두려워서 어쩔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있는 군대가 아람군대보다 많다.” 하면서 “하나님, 이 사람의 눈을 밝혀 주옵소서.”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의 불말과 불수가 아람군대에 맞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 나라 권세, 하늘의 신비를 우리가 볼 줄 알아야 이 세상 나라 일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현세는 보이지만 내세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내세를 미리 보고 살아야 바로 살 수가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우리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대심판의 자리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보이는 보디발의 아내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것을 내다보면서 깨끗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끝으로, 어떻게 하면 바로 볼 수가 있습니까?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까? 마음이 깨끗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거듭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올라야’ 바르게 봅니다. 고상한 영적 수준에 올라야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육체의 모든 것이 굉장히 커 보였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의 지파인데 내가 누구만 못한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난 후에는 전에 높고 크고 굉장하게 보이던 모든 것이 분토같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얼마나 높습니까? 우리 하나하나가 이처럼 높은 수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증거처럼 아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육신의 명령을 거절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보고 바로 택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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