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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계명 (신 0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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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자신을 '소멸하는 불'로서 소개하고 계심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소멸해 버리십니다. 그것을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는 규례로서 당부하셨습니다.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기 힘으로 발판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눈에 보이는 형상을 힘으로 삼으면 안됩니까?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오직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말씀으로 유지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말씀을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심으로 세상이 다시금 말씀으로 유지되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순히 하나님의 의도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자기를 재어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의 의만 더욱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십자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법을 적당히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발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옛날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것으로 이미 할 일이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이 잘하고 있는지 지켜보고만 계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믿음에 대한 문제는 다 해결됐고, 이제 남은 것은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복을 받아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라든지 믿음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천국에 대한 얘기를 하면 손을 내저어버립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니까 그런 고리타분한 얘기는 들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것이고 다 뗀 과목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축복'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만 가르쳐달라고 할뿐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는 것이 되는가?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더욱 거룩하고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는가? 다리를 꼬고 예배드리는 것은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 라는 문제들을 가르쳐주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복을 받는데 도움이 될 행동과 걸림돌이 될 행동을 구분하면서 복이 되는 행동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요구하는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할 존재인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목사들은 예배당의 평수, 재정의 정도, 교인 숫자 등에 자신의 가치를 두면서 다른 목사들과 차별시하고, 신자들도 재산과 교회에 헌금하는 액수, 세상에서의 지위, 직분 등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차이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사단의 집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이왕 주셨으니까 지켜주겠습니다. 대신 지킨 만큼 하나님도 보답을 해주세요'라는 발상을 가지고 십계명을 대할 뿐입니다. 십자가란 곧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선포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나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 앞에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미스코리아도 의미 없습니다. 단지 흙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와 가장 추한 여자가 함께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둘을 동일하게 흙으로 볼뿐입니다. 단지 가죽이 덮여 있고 숨을 쉬고 있는 잠시동안만 세상으로부터 예쁘다는 부러움을 살뿐이고, 못생겼다고 무시를 받을 뿐이지 잠시가 끝나면 똑같은 흙입니다. 죽음 앞에서 목사와 평신도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것이 의미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흔적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엉뚱한 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직 십자가에 관심을 두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도 십계명도 모두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해 버린다면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계명은 계속 살아있는 율법이므로 지켜야 한다느니, 지금은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느니 하면서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십계명에 대한 오해와 혼란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시고 나머지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십계명을 통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 잣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자기 잣대로 하고 있습니다. 쌀을 팔거나 고기를 파는 정육점에 가보면 저울이 있습니다. 저울이 있는 상점마다 '우리 가게 저울은 정확합니다'라고 하지만 저울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확인하고 기관은 따로 존재합니다. 그 기관의 판단에 따라서 저울의 정확성이 결정되는 것이지 자기 가게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확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한 판단이 정확하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면 안됩니다. 어떤 한가지 일을 가지고도 사람들의 의견이 저마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지식이 다른데 어떻게 잣대가 같을 수가 있고 판단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럴 때 다툼이 등장합니다. 저마다 내 판단이 옳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한번쯤은 내 잣대가 틀린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해볼만한데도 쉽사리 자기 잣대에 대한 의심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게 저울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기관이 따로 존재하듯이 우리의 잣대가 바른지 틀린지를 판단하는 진짜 정확한 잣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무조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장 정확한 잣대에 자기를 재어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잣대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생각이 나를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잣대에 나를 맞추면서 하나님보시기에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항상 살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잣대에 맞추어 들어가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 잣대 역할을 십계명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잣대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된 잣대에다가 하나님을 맞추어 버리면서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확신'이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립니다. 확신이란 자기 생각을 자기가 믿는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확신은 말씀이 아닌 것도 말씀이라고 고집 부리게 하고,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우기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의 잣대는 하나님께 있으며 의의 판단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의 잣대에 나 자신을 비추면서 잘못됨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자기를 맞추어 가고자 힘쓸 뿐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십계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어떤 혜택을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은 지키면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신자로 하여금 주어진 복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지의 여부가 십계명을 주심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십계명은 출애굽기에서 이미 모세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미 세워진 언약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조들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백성들과 세워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약은 죽은 자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와 세워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아있는 사람과 세워진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옛날 이스라엘과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살아있는 저와 여러분의 문제로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6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표가 바로 십계명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이 나의 왕입니다. 나를 다스리시옵소서'라고 하면 진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지의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지 십계명을 통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란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아는 신자만이 1계명의 말씀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2계명은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는 죽고 다시 살아난 존재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새로운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분을 위해서 사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어떤 형상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느냐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3계명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하게 불러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할 때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은혜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4계명은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노동이 없는 날입니다. 천국은 노동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노동을 쉼으로서 맛보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쉰다는 것은 그만큼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돈을 의지하고 돈이 최고인 사람은 노동을 쉴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은 돈으로 사는 날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날입니다. 6일은 돈을 최고로 알고 살아가다가 하루 쉬었다고 해서 안식일이 아닙니다. 돈이 있든 없든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고 돈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부모는 하나님의 계명을 책임지고 가르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은 부모의 명령이 싫기 때문입니다. 간섭을 받기 싫어하고 자기 자유로 살고 싶어하는 습성 때문에 부모를 거역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역시 간섭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공경치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에 순종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경을 보는 것입니다.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이웃의 생명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살인은 미움과 시기를 그 동기로 하여 출발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웃이 나보다 성공했을 때 시기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이 잘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웃의 잘됨을 시기한다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됩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관계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이 나눠준 환경과 운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나눠진 환경이 있고 운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나눠진 삶에 감사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는 것은 이웃을 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해를 입혀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함께 구속함을 받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 몸된 관계가 서로 해친다면 은혜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됩니다.

10계명은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낸다는 것은 반대로 내것을 나눠줄 마음이 없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자기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눠야 할 사람들이지 이웃의 것을 탐내어야 할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십계명을 보면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는 1-4계명까지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도 5-10계명까지의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잣대로서 우리에게 등장하며 십계명이 우리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를 판단하는 하나님의 잣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이웃을 위해서 몸을 버리시고 피흘리신 주님이 지금 우리의 잣대가 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기의 잣대로 자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의롭게 살았다고 까불고 양심대로 살았다고 큰소리치고 나는 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고 괜찮은 인간이라고 소리치는 모든 사람들을 할말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롬 3:24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신자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의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공로로 되어진 것이기에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의 자리로 들어왔으면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나를 위해서 피흘리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나도 이제부터 주님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올 때 그것이 곧 거룩이며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우리의 잣대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됨을 낱낱이 드러내고 옳은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장 옳은 인간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앞에 설 때마다 모든 교만이 사라질 수밖에 없고 내 모습 그대로는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것을 약자라고 합니다. 약자란 강자에게 굴복해야 합니다. 참된 강자는 하나님입니다. 그 강자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그대로 하나님께 들고 나와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아는 자는 오직 긍휼과 자비만 의지할 것이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사랑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자신의 악함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나야말로 가장 믿음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나는 사랑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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