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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적 신앙 (신 0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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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신앙(신 6:10-19)

에덴동산은 좋고 나쁜 것의 구분이 없는 절대적인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좋았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적인 세계를 상대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좋고 나쁜 것의 구분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세계에서 인간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상대적인 시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인간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다가도 더 좋은 것이 보여지면 좋던 것도 금방 싫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인간 모습이고,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이지만 이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좋고 나쁨이란 구분이 없이 오직 좋다는 개념만 존재하는 절대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각기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을 하는 상대적인 나라인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가지게 된 것은 선악개념입니다. 즉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좋다 나쁘다는 구분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욕망에 근거를 둔 자기 중심적인 판단입니다. 흔히 사람을 보고 '간사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선악개념 때문입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어떤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마치 바다 위에 떠밀려 돌아다니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인생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주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 어느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환경입니다. 인간을 울게 하고 웃게 하고, 화나게 하고, 슬퍼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는 것 모두가 환경입니다. 다만 자신도 깨닫지 못한 가운데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좋다, 나쁘다, 불행하다, 행복하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는 상대적 시각 때문입니다. 가령 시골에서는 행복하고 단란하게 잘 살던 사람이 도시로 이사가서는 쉽게 행복이 사라져 버립니다. 시골 학교에서 1등하던 아이가 서울로 가니까 하위를 맴돕니다. 결국 시골에서 1등 하던 것 때문에 기뻐하던 기쁨은 사라지고 맙니다. 아이의 실력은 그대로이고 단지 서울엔 공부를 더 잘한 아이가 많아서 등수가 뒤로 밀린 것뿐인데도 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시골에서는 착하고 알뜰한 자기 아내가 최고인줄 알고 살았는데 서울서 살다보니까 더 멋있고 예쁜 여자들이 많이 보여지고 결국 자기 아내는 세련되지 못하고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아내의 모습은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변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더 예쁘고 더 멋있는 여자를 보게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또 하나의 기준으로 형성되어서 기존에 자기 아내를 바라보던 좋다는 기준을 무너뜨려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시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제 좋던 것도 더 좋은 것이 발견되어지면 한순간 좋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상대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결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행복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다른 더 좋은 것에 대한 기준이 형성되면 지금의 행복은 더 이상 행복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상대적인 시각이 아니라 절대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도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면 그것으로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을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또 다시 좋다 나쁘다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이 나쁘다고 하신 것을 우리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적 시각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시각에서만 은혜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시각에서는 은혜될만한 것만 골라서 은혜라고 합니다. 즉 은혜될만한 것이 있고 은혜 되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기준이 되어서 은혜와 은혜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으로 은혜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감사를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업 잘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취직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집을 사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감사합니다' '생일을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감사의 대부분이 다 이런 종류의 것들입니다. 그라나 받아서 기쁘고 감사하는 것,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신앙인이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사입니다. 받은 것이 있고, 감사할 만해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몰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업잘 되는 은혜라면 사업 안될 때는 은혜가 없는 것입니까? 건강한 것이 은혜라면 병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받은 것이 은혜라면 받은 것이 없고 오히려 잃은 것만 있을 때는 은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은혜가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는 만큼 신앙 역시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이란 환경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나쁘게 여겨지는 것이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절대적 신앙입니다. 이렇게 자기 기준으로 세워진 좋다 나쁘다를 뛰어 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만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렇게 해줄테니까 나만 섬길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돈이 없고 힘들어서인데, 돈만 많이 주고 어려움만 없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 인간이 풍족한 것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신앙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아마 굳이 본문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고 말씀하는 이유도 인간은 풍족하고 넉넉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생활이 힘들기 때문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며 자식이 말썽만 부리기 때문도 아니라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 생활을 잘못하는 이유가 모두 환경에 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환경만 좋으면 신앙생활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내가 평안하고 넉넉한 가운데서 나오는 여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금방 낙심하게 되고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 신앙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이것만으로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근거가 마련된 셈입니다. 상황과 여건을 봐가면서 복종할만하면 복종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없을 것 같으면 복종하는 것은 복종하는체 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복종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상황과 여건이 자기에게 불리해지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멀리할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신자가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겨야 할 근거는 또 하나 있습니다. 12절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배부를 때 여호와를 잊지 말아라고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이라는 설명을 붙이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을 빠져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냐 아니면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해야합니다.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버립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됩니다.

애굽에서의 마지막 재앙은 '장자 죽음'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애굽의 구분이 없습니다. 애굽의 장자만 죽이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와 문지방에 묻어 있지 않으면 다 죽였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애굽의 구분이 없습니다. 즉 모두가 죽어야 했는데, 유독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른 사람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생명의 근거는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애굽의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애굽의 것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은 애굽의 것이 아닌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지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사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에 빠져 살아가면서도 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십니다. 그냥 인도하여 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희생시켜서 피를 흘리게 해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잊지 않은 신자는 예배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리고 있음을 알기에 세상 것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상대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이 넉넉하면 입이 벌어지면서 '하나님 하나님'하다가 뭔가 힘들다 싶으면 금방 표정이 변하면서 원망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은 단지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을 고생시키고 억누르는 바로의 손에서 벗어난 것을 출애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고생이 끝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서 살아도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고통과 고생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애굽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살든 상관없이 애굽의 삶을 산다면 그곳이 곧 애굽입니다.

애굽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먹고살아야 하고, 자식들 공부 시켜야 하고, 학원도 보내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었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상관이 없는 삶으로 집어넣었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신경 안써도 될 풍족한 곳으로 집어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즉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 절대적 기준이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경과 나 자신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어려운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 생명 외에는 어느 것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자꾸 다른 것도 인정을 해 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어려운 것도 인정을 해주고, 사업이 잘되야 하는 것도 인정을 해주고, 자식이 성공해야 하는 것도 인정을 해주고, 교회가 부흥해야 하는 것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요구를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피흘리신 몸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주님 피는 보지 않고 나 배부른 소리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피흘리시고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내가 돈 번 것이 무슨 자랑거리이고, 교회 부흥된 것이 그토록 좋아할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죽으신 세상에서 너무 나만 바라보고 안일하게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 피흘리신 것은 생각지도 않고 우선 나 고생하고 힘든 것만 앞세우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나는 불행하다'라고 생각되거나, 세상을 산다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다고 느껴지거든 지금 내 자신이 상대적 기준에 매여서 경쟁과 비교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주위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분의 죄 때문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그분 앞에서 자신의 고민과 한탄을 털어놔 보십시오. 그래도 예수님 앞에서 할말이 있거든 하십시오. 그래도 원망이 나오거든 원망하십시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에 절대적인 기준을 두지 못하는 자신만큼은 미워하십시오. 그럴 때 회개하게 되고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적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체계인 좋고 나쁨을 뛰어 넘은 믿음입니다. 좋은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있다 해도 '여호와는 변함없이 여호와이시다'는 믿음이 곧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을 행복 되게 할 것입니다. 나쁜 것 속에도 인간의 얕은 생각으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생각하는 좋고 나쁘다는 기준으로 알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 속에도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상대적 기준, 즉 내 욕망에 의해서 구분되는 좋고 나쁨을 뛰어 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절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믿음은 이러한 절대적인 사랑 속에서만 탄생되어지는 것입니다.

16절부터 보면 맛사에서의 시험이 나옵니다.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어지기 이전에 맛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출 17장에 보면 맛사에서의 사건이 나옵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앞에 물이 없는 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 이름을 맛사라고 한 것입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무척 난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지 않을 상황에서 원망한 것을 책망한다면 이해하겠는데,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원망이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대적 기준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은 결코 원망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 굳게 세워지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에도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양육하십시오. 세상과 똑같이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한다면 결국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제일인줄 아는 또 하나의 마귀자식을 키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부 드릴 것은 여러분의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를 구분하지 말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가 선한 일이지 나쁜 일은 없습니다. 다만 내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나에게 이익이 안되고 손해가 된다고 해서 악하다고 판단할 뿐입니다. 맛사는 주님만 바라보는 절대적 신앙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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