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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판과 언약궤 (신 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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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판과 언약궤(신 10:1-11)

사람은 항상 자기 입장이 먼저입니다. 내 입장이 곤란해지고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 나 때문에 누군가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 때 자기에게 문제가 없다는 여유 속에서 비로소 상대방을 생각해 줄 수 있는 것이지 자기 입장보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혜갚음을 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살기 때문에 은혜갚음도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피해가 주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또 그 은혜를 안다고 해서 과연 은혜를 갚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착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잘못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고 설치는데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신자가 되라고 강조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죽일 수 있습니까? 자기를 죽일 수 있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행동들은 모두가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것들입니다. 이정도의 것은 자신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입장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신자로서의 도리를 지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니까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먼저 '내가 과연 하나님 때문에 내 입장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가족도, 내 소유도, 내 지위도 모두다 포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은혜 갚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도 알고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사랑도 알고 있지만 나는 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감히 은혜 갚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나서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한 것만큼 은혜에 대한 부담감을 덜게 됩니다. 가령 A란 사람이 B란 사람에게 10,000원짜리 점심을 대접받았습니다. 그럴 때 A란 사람은 '내가 점심을 대접받았으니까 나도 대접을 한번 해야지'라는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부담을 덜기 위해서 B란 사람에게 5,000원짜리 점심을 한번 대접했다고 할 때 5,000원만큼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봉사하고 헌금했다고 할 때 필경 그 사람은 자신이 한 것만큼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다만 옛날에 잠깐 도움을 받은 정도로 생각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옛날에 받은 것에 대해서 조금씩 갚아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옛날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한꺼번에는 못 갚고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조금씩 갚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할수록 은혜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부담이 줄어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행함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말하지만 은혜를 전혀 모른 사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옛날에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옛날에 있었던 은혜의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우린 단지 그 혜택을 받아서 산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지 나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장본인이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감히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오늘 은혜를 얼마간 갚았다고 합시다. 내일은 예수님을 죽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날마다 죄를 짓고 산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죄속에 삽니다. 주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중보 덕분에 망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은혜 갚는다고 해도 죄 때문에 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린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갚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은혜를 갚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에서만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원망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진멸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도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 주신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 해결사 덕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해결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떠받드는 것이지 진노가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해결사의 역할을 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 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중보 기도'라고 합니다. 중보 기도란 단지 남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 기도란 말씀을 무너뜨린 쪽의 그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보 기도란 말씀을 멸시하고 무너뜨린 사람들의 책임을 대신 짐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지 절대로 내가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 덕분이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살아있는 것은 너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때문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는 오직 은혜를 아는 자만 살 수 있는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제발 너희들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고 은혜에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백성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1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고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불러서 계명을 새긴 돌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돌판을 받아서 내려올 때 산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립니다. 출애굽기 24: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의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계명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돌판을 모세가 준비해서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두 번째 돌판을 만들 때는 모세더러 친히 돌판을 만들어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처음의 돌판이 깨어진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죄가 깨뜨린 돌판이 산밑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돌판을 깨뜨린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긴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책임지시고 해결하심으로서 은혜가 우리에게 지속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지금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행위 속에서 장차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담당하시고 죄문제를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서 산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돌판만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궤도 하나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나무궤의 용도는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또 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나무궤는 모세가 다시 받은 돌판을 넣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의 돌판은 모세가 직접 들고 내려 왔습니다. 그 결과는 돌판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받은 돌판은 미리 준비한 나무궤에 넣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돌판을 그대로 들고 내려오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즉 여전히 죄인이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판을 그대로 들고 오면 또 다시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돌판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판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계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김으로 이미 계명을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 계명이 존재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는 말씀을 지킴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인으로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돌판을 나무궤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돌판을 집어넣은 나무궤는 언약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약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 하기도 하고 시은좌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죄를 씻어주는 장소이고 은혜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에 피를 들고 들어가서 언약궤의 뚜껑에 뿌립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 언약궤에 넣은 것은 '이제부터 너희는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죄를 책임지고 흘려진 피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를 믿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과연 피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완전히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의 본성을 모릅니다. 사람은 실천하면 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또한 야고보서에서 2:10절에서 율법을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냐 죄인이냐는 것은 피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피를 믿는 자는 자기의 부족과 악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에 실천하지 못해도 피의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신자가 육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지 말고,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설치지 말고 다만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피를 믿는 신자는 결코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피를 앞세우고 피를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은 인간의 희생이 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삐쳐 나오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너는 네 입장에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은 말씀을 지킴으로서 신자로서 성공하고자 합니다. 왜 피가 흘려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피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피의 의미도 모른 채 믿는다는 말만 남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 피를 흘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자 할 때 모든 행동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하게 되고, 기도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하게 되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나오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도록 하셨는지 그 이유를 마음에 새기고 돌아가십시오. 돌판을 궤 넣어서 인간이 전혀 손대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인간은 말씀을 지킴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가 뿌려짐으로서 그 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을 믿고 주님의 피만 높이고 피만 증거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높이고 피만 증거하면서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8,9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들은 땅에 기업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가 기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식이 기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은혜로 사는 것뿐입니다. 피만 높이고 피만 증거하면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알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야 할 태도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잊지 말고 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나를 살렸음을 잊지 말고 하찮은 우리 행위를 내세우지도 자랑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와 사랑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지금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알고 주님만 높이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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