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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할례 (신 1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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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신 10:12-22)

12절 말씀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묵중한 중압감과 부담입니다. 그냥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를 모두 하나님께 두고 있으며, 직장을 다녀도 자식을 키워도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내 인생에서 얼마를 떼어서 여호와께 바치라면 그것은 억지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예 내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의미하는 길로 순순히 들어갈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다. 때문에 믿음이란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무한한 포부와 가능성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성취의 도구로 이용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단 내 인생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12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말씀을 볼 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하나님이 뭔가 대가를 주시겠지'라는 얄팍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목사가 여호와를 섬기는 법으로서 몇가지 규칙을 정해주면 그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면서 '나는 여호와를 잘 섬긴다'는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처음 돌판과 두 번째의 돌판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말씀을 책임질 수 없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처음 돌판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은 땅에서 누군가가 죄를 책임지고 해결함으로 말씀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시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 두 번째 돌판을 언약궤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오직 말씀을 깨뜨리는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째 돌판이 언약궤 안에 들어가는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악한 자들이다'는 인식을 항상 가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이스라엘이라면 12절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린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자들이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한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고라는 말씀 앞에서 '잘 알겠습니다. 이젠 여호와만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말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다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 '우린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함을 모르고 그 악함 때문에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말씀을 순종해 보겠다고 설치게 됩니다. '하나님 무엇을 바칠까요?' ' 하나님, 뭘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건강과 소유물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만족 시켜보고자 힘쓰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기쁨은 오직 완벽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완벽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면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아니냐? 안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완벽히 못한다고 해서 아예 안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라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잘못이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완벽히 못하니까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행위에 있어서는 완벽이 아니면 기뻐하지 않으심을 알고 무엇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12절을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습니까? '그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만 섬겨야지'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가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는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분은 인간의 인간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섬겨보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저들이 섬기기 위해서 행동하면 나는 아무 행동도 안함으로서 싸우라는 것이 아니고, 저들이 섬김의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의로 내세울 때 신자는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 있다고 해도 '이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서 저들의 잘못을 고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종교적 행동을 보게 되면 그래도 자신이 뭔가 믿음이 있어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순간이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보고 자기 행동을 바라보십시오. 그순간 우리는 오직 죄속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순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자들은 별 생각 없이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동안 부지런히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왔고, 봉사도 많이 했고, 헌금도 부지런히 하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사실상 믿음이 없었음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고 봉사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 요구 앞에서 우린 그동안 나의 인생을 위해 살았고 하나님을 이용했을 뿐이지 내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만 섬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요구하심을 16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목이 곧지 않은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목이 곧다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행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태였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4,15절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하늘 아래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 결코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세상, 즉 자신들의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도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을 위해서, 세상에서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신처럼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을 통해서는 도저히 영광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음과 그 성품도 역시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여호와께 속한 세상을 살면서도 내것이라는 소유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 마음에는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란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고 고개를 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 자체가 변하고 달라지고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뭔가 달라지고 변화된 모습을 느낄수록 더 목이 곧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목이 곧지 않은 신자, 즉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자는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을 믿을 수 없는 목이 곧은 백성이 바로 나 자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오늘도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지켜주실 것을 요청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름으로서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세상에 존재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핏줄이 아닌 전혀 다른 핏줄로서 발생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가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발생한 민족임을 보여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할례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의 정신, 약속민으로서의 정신이 삭제되어 버리면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방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즉 이방인과 함께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는 몸에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6절의 말씀과 같이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하나님께 철저하게 예속된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이듯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의 모든 삶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 인생을 위해서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땀흘리고 노동해서 얻은 대가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쓰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아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마음의 할례란 세상 만물이 여호와의 것이며 나 자신까지도 여호와께 속한 자임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여호와의 거룩을 나타내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제공되어진 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습성만 드러냅니다. 그 습성 속에서 나타난 병폐가 무엇인가 하면 믿음, 성령, 은혜 모든 것은 자기 소유화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해서 천당 가려고 하고, 성령을 소유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종교적 능력자가 되고 싶어하고, 은혜를 소유해서 행복한 삶을 꿈꾸는 모든 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소유개념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키라 섬기라고 하니까 인간됨의 실체도 모르고 지키고 섬겨보겠노라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모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다면 왜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시고 세상을 버리지 못합니까? 왜 능력을 행하지 못합니까? 믿음을 내가 소유하고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께 소유된 자로서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인정하느냐는 관계개념이 믿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소유가 있으면 소유된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어떤 이익을 얻어내려고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자기 소유로 여긴 자들이 믿음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얻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한 것은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에 믿음을 경쟁하고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 앞에서 인간 됨을 알지 못하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생은 내 힘이 아니고 내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죄만 짓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로 감싸고 계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왔다. 나는 세상 사람처럼 내 소유를 주장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의미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약자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서는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서 뭔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에게서 뭔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때 그것을 내 힘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안될 때 스스로 낙심하게 됩니다. 뭔가 보여지면 그것을 자기 자랑거리로 삼아버립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은 선한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더러운 자임을 알 때 설사 선한 것이 보여진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기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 모습을 보여주던 사람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18절에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 편에 서서 일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소유도 없고 권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들 편에 서 계시는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나그네를 사랑해야할 이유는 그들도 예전에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서 눌림 받고 멸시받고 천대받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 받았습니다. 이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 증거는 나그네를 사랑함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즉 약자를 무시하고 누르는 것은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자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면 고아 과부 나그네는 이스라엘 속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현재의 은혜를 자기 소유로 삼아버린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약자 편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약자의 하나님이란 다만 약자를 도와주라는 개념이 아니라 너희가 바로 약자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약자를 통해서 자신이 약자임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만약 외모를 보신다면 우린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하고 믿음의 표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종교적 행위에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행위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를 보낸다고 야단이고, 북한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한다 하고, 한끼를 금식해서 모은 돈으로 외국에 굶는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해도 하나님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행위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그런 종교적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를 기뻐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멸망하십니까? 세상이 아무리 죄악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 곳곳에서는 윤리적 선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을 봐서라도 멸망은 삼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신다고 할 때 가정하고 따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라는 말 한마디로 종교적, 윤리적 선한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심도 되지 못하고 기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의 할례, 즉 우리들의 마음에 거룩의 씨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비거룩의 구별은 마음의 할례입니다. 겉모습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의 외모를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런 인생을 살아갈 것을 충분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보지 않겠다고 하시고 관심 두지 않겠다고 하신 외모에 신경을 쓰십니까? 믿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고, 존경받을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외모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무시당하고 멸시 당하는 약자들이 발생하는 데 그들은 드러낼 외모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윤리적 마음씨가 아니라 내가 약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세례를 뜻합니다. 세례란 '죽은 나를 그리스도의 은혜가 살렸읍니다'는 고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나를 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안에 내가 사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믿음으로 사는 신자라면 자신이 주님의 피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잘압니다. 여러분에게 이 마음이 있다면 주님만 높이십시오. 21절에 그는 네 찬송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찬송이 되도록 하십시오. 자기를 찬송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린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부르시고 성령이 이끌어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이 고개를 일으킬 때 날마다 그 마음을 자르시고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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