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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을 제하라 (신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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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될 수 있으면 깨끗한 상태로 나오려고 노력합니다. 좀 더 깨끗하고 멋있는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느껴지면 속히 그것을 보충해서 마음의 거리낌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아무 거리낌이 없는 마음으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으로, 악함과 추함이 없는 깨끗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인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위선과 거짓과 억지를 가져오게 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본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는 뭔가 위장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나오세요'라고 말할 때 '담배라도 끊고, 술이라도 끊고'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것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 앞에 죄없는 모습으로, 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버린 채 떳떳하게 나서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에 나오기 전의 이야기이고 일단 교회에 나왔으면 교회 나오기 전과 달라져야 하고 변화된 모습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배워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고 항상 동일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변화되고 싶어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변화되고 싶어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고 싶어할까요?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판단할 때 신앙인들이 변화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자기 확인이고, 자기 만족이며, 신앙적 자존심이라고 봅니다. 내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변화되고 달라진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에게서 극히 인격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변화라는 것은 모두가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참된 변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모습이란 훈련받고 교육받아서 습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습성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습성들이 주어지는 상황과 여건에 의해서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이라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자신의 약점과 흠되는 것은 감추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드러나서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요소들은 감추고 위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훈련받고 가르침 받아서 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되어서 참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담배끊고 술 끊고 화를 안내고 게을리 하던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변화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변화를 기뻐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변화할 수 없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죄인이 의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속에서 아무리 변화하면 뭐합니까? 결국 죄인 그대로가 아니겠습니까? 술 끊고 담배끊는다고 해도 죄인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무엇을 해도 죄인인 우리들이 과연 뭘 해서 의인되겠다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스스로 의인 되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진 인간의 모습은 흠없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흠없는 모습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만나실 수 없고 받으실 수 없는 흠있는 존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변화는 무엇이겠습니까? 흠있는 존재가 흠없는 존재로 다시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과연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착한 일을 함으로서, 그리고 종교적인 일을 통해서 인간의 흠집이 메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흠집을 메우기에 급급합니다. 착한 행동을 통해서 다른 나쁜 행동을 보상하고 메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모습만이 아니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자신의 약점으로 남을 수 있고, 타인에게 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좀 더 멋있고 근사한 자신을 보여주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 그대로를 보여주지 못하게 하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참된 변화를 흠집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가리고 위장하는 것입니다. 흠이 되고 흉이 될만한 것은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변화라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서 좀 더 고차원적이고 수준 높은 모습으로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무 흠이 없고 병들지 않은 깨끗한 제물입니다. 흠있는 것, 병든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흠없는 것, 병들지 않은 건강한 것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피조물은 힘없고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피조물에 죽음이 찾아들고 질병이 찾아든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질병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힘없고 깨끗한 제물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고치고 변화한다고 애써봐도 질병에서 해방될 수 없고 죽음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피조물의 모습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 자신의 흠있는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다만 착한 일하고 예배드리는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에 열심이지만, 그렇다면 기독교인보다 더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는 것이지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결국 믿음이 기준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자의 변화란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해야지 결코 행동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흠있고 없고의 문제도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흠있다는 것은 십일조 하지 않고 예배 빠지고 기도하지 않는 등의 행위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며 흠없는 피조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원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들은 다같이 죄를 안고 있는 흠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고 하나님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흠있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흠있는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네게 가르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중에서 송사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판결하기가 어렵거든 제사장과 재판장에게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재판장이 판결한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12절)고 합니다. 즉 제사장과 재판장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악이고 악을 용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재판장은 성중에서 해결 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즉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위해서 제사장이 있고 재판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죄는 제사장과 재판장이 시키는대로 행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흠있는 인간은 죄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누군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12절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본문에서는 도적질 강도 이런 것들을 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재판장을 통해서 죄를 해결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을 우리 가운데 보내셨는데 그분의 말을 천자히 하고, 즉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듣지 않고 제멋대로 죄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니까 그 악을 제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죄있는 모습을 그대로 들고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감추고 꾸미면서 죄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갑니까? 죄있으면서 죄없는 척 하는 것은, 세상의 인간 모두를 죄인이고 흠있는 썩어질 피조물로 규정하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서 제하여질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자기 죄를 모르고 죄를 들고 예수님께 나오지 않으면 천국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의 냄새가 안난다고 교인들을 야단을 치기 일쑤입니다.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신자의 냄새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훌륭한 인격과 인품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자의 냄새가 아니라 종교인의 냄새입니다. 자신을 수양한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냄새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냄새란 자신의 죄를 그대로 드러낸 가운데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총회 목사 계속교육'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개회예배 때 설교하시는 목사님께서 '어느 장로가 말하기를 목사 냄새가 나는 목사가 없어서 신학교를 위해서 돈을 내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면서 목사 냄새 나는 목사가 되자고 설교한 것입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 냄새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나도 목사 냄새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인지도 모르는 목사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듣고 '목사가 생각하는 목사 냄새가 뭘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결론은 훌륭한 인품이라는 것으로 내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감동하고 존경하는 목사의 모습은 모두 인품입니다. 잘 훈련되어지고 수양이 되어진 인품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사 냄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 냄새를 풍겨야겠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훌륭한 인품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보이기 위해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위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목사는 드러난 자기의 인품을 무기 삼아서 교인들에게도 인품을 소유한 신자가 될 것을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당당한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목사에게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이미 위장되어진 인품이 모든 흠집과 죄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상태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목사 냄새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든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표는 자기를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신자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냄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인 지체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은 진짜 신자의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다운 행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목사다운 행동, 또는 목사 냄새라고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목사인 자신을 바라보고 목사에게 접근하는 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밀어붙여주는 목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자기의 수족으로 삼으려고 하는 종교 세계에서 과연 신자들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밀어붙이기 위해서 자신까지 포기하는 목사가 얼마나 될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까지 포함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나는 목사가 아닙니다'를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목사에게 전혀 기대 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도 목사는 우리보다 더 나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목사라는 인간도 별 수 없구나'라는 실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교인들이 실망할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하지 않아도 평소에 하는 대로만 살아가면 교인들은 얼마든지 목사에 대해서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답게 보이려고 하고, 장로가 장로답게 보이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사단의 미혹에 빠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자답게 보이라거나, 목사답게 보이라거나, 장로답게 보이라는 명령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신자는 흠있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고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를 남다른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들면 교인들은 목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나가려는 의도를 가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목사가 우상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하는 것을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역시 이런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떤 인간도 인간으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악이 될 뿐입니다. 신자가 날마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얻어지는 유익은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가운데 날마다 그리스도가 오심을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참된 감사는 자신의 죄가 발견되어진 현장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 십자가의 감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자기의 유익을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이 옳다한 것을 사람들 앞에서 옳다고 시인하지 못하고 말씀이 그르다고 한 것을 사람들이 옳다고 하기 때문에 같이 옳다고 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더러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제사장 되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감추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려고 하십시오. 죄를 발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감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흠없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더러움과 죄를 감추고 위장하려는 악에 빠지지 말고 죄를 발견하고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감사하면서 살아있는 신자로서 한평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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