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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부모 (신 2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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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부모(신 21:18-23)

신앙인이란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말씀에 의해 인격이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으로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언제나 자기의 것을 내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내어놓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의해서 인격이 다스림을 받는다면 결국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진 새로운 인격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인격이란 거듭난 인격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 받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인격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인격이라고 하니까 예전보다 더 승화되어진 인격으로 상상하면 안됩니다. 예전, 즉 말씀을 중심으로 살기 전의 인격과는 전혀 다른 인격입니다. 인격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것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것을 내세우는 인격입니다.

성령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해 갑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피로 얼룩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 '나는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 딴에는 이정도면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고 양심대로 살았다고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행위들, 그 모든 것들이 다 쓰레기요 헛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남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요 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것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삶이며 신앙인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인격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것을 보면,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사형을 당한 예수라고 하는 한 인물에 대한 연민이요 동정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일을 나 때문에 당했다고 하니까 겉으로나마 미안한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십자가'를 외치면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신앙이 많은 사람으로서의 한 의식의 과정일 뿐, 자신이 파괴되어지는 참된 회개의 열매는 전혀 기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뭔가 버려지는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이란 말씀에 의해서 그 인격이 다스림을 받으면서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가정이란 어떤 가정이겠습니까? 신앙의 가정이란 교회 다니는 가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가정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인이 모인 자그마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가정에서 보여지는 것은 역시 하나님만 중심으로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각자가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으며 사는 모습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신앙의 가정입니다. 그러나 역시 순수한 신앙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옛 본성도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때로는 성령과 상관이 없는 모습을 자주 내 비취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와 결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혼은 곧 가정과 연결되기 때문에 '십자가와 결혼'을 '십자가와 가정'으로도 얼마든지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결혼이란 오직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는 신앙인의 결혼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결혼은 자기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의 결혼은 '내가 과연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는 최초의 삶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가정에서부터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은 사람이 가정 밖, 즉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십자가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역시 교회에서도 십자가의 정신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구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회'입니다. 내가 과연 어느 편에 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이러한 결혼의 의미를 무시한 채 오직 자기 인생과 자기 행복만을 주장해 버린다면 결국 그 가정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들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것을 고집하고 자기 것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나'라고 하는 틀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또 다른 '나'로 존재하고 있는 실체와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섭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틀을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면서 자기 틀에 맞추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이 상대방에게는 간섭과 잔소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모두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성격과 취향이 다릅니다. 서로 다른 '나'가 모여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에서 '나'를 주장하게 되면 분명히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어른과 아이의 문제라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잠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부모의 틀에 맞추게 하려다 보면 그것이 자식에게 잔소리와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에게 가정의 유익을 위해서 취할 행동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강제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의 유익, 즉 가정이나 학교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행동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을 배워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기 자기 생각이나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맞으니까 내 방식을 따라라'고 서로가 고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틀과 사고방식으로 모인 가정의 경우이고, 신앙인의 가정은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인의 가정은 말씀에 다스림 받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가정에서는 '나'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기준으로 내세워져야 합니다. 너도나도 다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살아서 그 가정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누구의 틀도 아닌 하나님의 틀에 우리 각자를 맞춰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정의 행복과 평안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이 바로 이런 가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있을 뿐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틀에만 맞추어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가정에 아들이 있습니다. 이 아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면 별 문제가 없겠는데,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말썽 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모에게 행패를 부리는 아들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아들이 있을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간혹 신문에 보면 부모에게 폭행을 하는 아들을 벌해 달라고 경찰에 아들을 고소하는 부모가 나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은 아주 잘한 것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다스리지 못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고 있다면 그 아들을 공권력에 맡겨서라도 바르게 만들어 보겠다는 그 마음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은 아들이 경찰에 붙들려 가는 것이 더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 몰아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보무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아들을 잡아서 성읍 장로들에게 데려 갑니다(19절). 그리고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20절)고 고발을 합니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식을 돌로 쳐죽이게 되는 것입니다(21절).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내에서의 악을 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가정이요 부모였습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한 아들을 죽이는 이유는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역할자입니다. 즉 자식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식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을 드렸지만 십계명에서 중요한 것은 전문입니다. '나는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는 이 말씀이 십계명을 해석하는 중심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악이란 약속의 땅에서 애굽적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완악과 패역은 애굽적이 사고방식입니다. 애굽적 사고방식은 부모를 단지 자신을 낳아준 자로만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의 이스라엘에게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받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거역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은 그러한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이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약속의 땅은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가 해결되어야 희망이 있는 땅이고 미래가 약속되는 땅입니다. 그래서 22,23절을 보면 사람이 죽을 죄를 범해서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았을 때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해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복종하는 이스라엘이 말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만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결혼을 할 때도 보여져야 하고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도 보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즉 모든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인 가정, 그 가정만이 참된 이스라엘의 가정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도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가 패역하고 완악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때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자식이 있을 때 그 자식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부모에게서 짤라내겠다는 심정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할 필요성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입니다. 먼저 부모가 확고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서있을 때 비로소 자녀에 대한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신앙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소관이지 부모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한 것 같이 자식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할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잘못된 상고방식을 가지고 자식을 대할 수가 있습니다. 즉 자식에게서 세상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식보다는 성공해서 부모의 위신과 체면을 높여주는 자식을 더욱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에게서 바른 가르침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식에게서 죄가 보여지면 아예 이스라엘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물론 부모로서 안타까운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자식을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인인 부모로서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식에게서 보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는 결코 용납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차단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자식을 책망하며 대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식이 부모를 생각할 때 '우리 부모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한 부분만큼은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보면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는 거의가 공부를 못했을 때입니다. '너 이래가지고 나중에 뭐가 될래?'하면서 공부에 대한 매는 부지런히 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매는 전혀 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으로서는 '우리 부모는 신자이면서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공부 잘하는 것이 중심인 분이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멸망으로 밀어 넣고 있는 부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아예 부모부터 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를 멸망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는 이때에 제가 신앙인의 부모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자식들에게 돈에 의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게 되면 자식들은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부터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돈 때문에 흔들리는데, 그것을 보는 자녀가 하나님 중심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으로서 자식의 머리에 남아야 할 바른 부모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부모이지 '돈 잘 버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많은 돈을 벌어서 자식 호강시키고 좋은 대학 보내서 공부시키는 것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최고의 일로 여길지 모르지만, 마지막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죽듯이 자식도 역시 죽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가 무엇을 호소했습니까? 지옥의 고통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고통을 알려서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로서는 이 부자의 호소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호소가 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얼마 전에 고액과외로 나라가 시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백만 원은 보통이고 수백이 넘는 과외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보면서 그들을 욕했을지 모르지만 혹 여러분에게 그들과 같은 돈이 수중에 쥐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은 고액을 들여서라도 자식을 유명한 사람에게 과외를 시켜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자식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자란 자식이 사회에 나갔을 때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돈이면 다된다'는 사고방식에 빠진 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한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린 것이지만 지금 우리들이 바로 그런 식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식에게 안정감을 주는 가정은 돈에 흔들리지 않고 돈에 매이지 않고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굳건히 서 있는 부모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럴 때 자식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식들이 말씀에 어긋나게 살면서 전혀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단지 공부를 못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마음이 흔들린다면 결국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보여준 것입니까? 우리 모두 부모로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부모는 늘 평소에 자식들에게 신앙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서 자식들이 천국에 도착할 수 있을 때까지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설령 지금 자식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숨 쉬면서 자식만 나무라지 말고, 우선 내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했는가를 돌아보면서 자신부터 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성령께 맡기고 이제부터라도 신앙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오직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중심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일에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있는 모습은 자식에게 평안을 주고 안정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그만 세상일에도 근심하고 염려하는 모습은 자식에게 불안감만 남겨 줄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특히 부부 싸움하는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금물입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싸우고, 일이 잘 안된다고 짜증만 내는 그런 모습을 자식들이 목격할 때마다 가정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가출하는 것은 재미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안정을 찾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위해서 가장 중심점이 되어야 할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신앙의 중심으로서 하나님만 중심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상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아버지는 가정에서 대우받고, 돈을 벌지 못하면 대우받지 못하는 그런 세상 풍조 때문에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치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아버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확고한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 때는 돈을 번다는 것이 진리이고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점이 사라져 버리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아버지라면 비록 돈 한푼 벌지 못한다고 해도 진리 때문에 아버지로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아버지가 요구되고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머니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가정에서 구원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하나님만 의지해라'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 '주님의 희생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라' 이런 말을 자식에게 할 수 없다면 참으로 불쌍한 부모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부모 자격이 없는 부모입니다. 그저 육신으로 부모이고 자식을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돈 버는 기계일 뿐, 진정한 부모는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부모가 자식을 멸망으로 밀어붙이겠습니까? 자식에게 하나님만 중심으로 살아가는 부모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돈이 아니라 진리를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부모이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가정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중심으로 하고 말씀에만 복종하는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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