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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자와 여자 (신 2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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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혼란과 무질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서 야기된 것입니다. 창조 질서는 인간 개개인의 계획과 목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제공해준 완벽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고 노래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순수성이며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창조세계에서 말씀을 기초로 한 완벽한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깨어지는 원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자기에게 눈을 돌릴 때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둔 그 순간이 바로 질서가 깨어지고 혼란과 무질서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의 어지러움은 인간 개개인이 자기의 계획과 목표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어지러움을 '법'이라고 하는 강제규약과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간 상호간의 규칙을 통해서 해소하고 질서를 유지해 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무질서와 혼란의 세상을 질서로 회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 계획과 목표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계획과 목표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계획과 목표에 순종하는 것이 무질서와 혼란을 벗어나서 질서의 세계로 회복하는 길임을 의미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계획과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에만 철저하게 순종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종속 관계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말씀을 기초로 한 관계였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피조물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창조주와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말씀의 자리에서 벗어남으로서 창조 질서가 무너졌다면 그 질서의 회복은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엇이 질서의 회복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고 있고 피조물된 인간의 본질을 아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겠습니까? 과연 어떤 모습이 순수한 신자의 모습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고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는 인간, 이보다 더 순수한 인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구약의 이스라엘 모습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교회를 고집하고 교단이 교단을 고집한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사는 모습이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나'와 '너'의 관계를 남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간 관계를 경쟁관계로 뒤바꿔 버렸습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나 너'가 존재함으로서 경쟁하게 되고, 같은 교단 안에서도 교회와 교회가 경쟁하고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교단과 교단이 경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를 고집하고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에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느 한구석에도 신자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기독교의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혼합된 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란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신자의 독특성이란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피조물의 위치와 자리를 굳게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인간의 순수함이 완전히 사라진 채 자기에만 집착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도 멀리하고 말씀도 팽개쳐 버린 육체요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고 감정이 있고 언어가 있다는 등의 여러 가지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금껏 인간의 생각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타인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고, 감정은 미움과 시기로 돌진했고, 언어는 타인을 욕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쪽으로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순수함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두가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예로 들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이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럴 경우에는 이렇게 해라'는 하나님의 법을 법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키기 위한 법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성경을 오해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헌법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존재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의 순수한 모습, 무엇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정신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바로 법입니다. 따라서 법의 외형적 요구에 순종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속에 자기를 내 던지는 것이 복종입니다. 단지 법을 지킨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설사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법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미워해서 그에게 누명을 씌운 자에게는 이렇게 해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국가라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법을 정해서 지키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복종하는 단체이지 외형적인 법에 복종하는 단체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법은 단지 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담고 있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 법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질 안하고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켰다고 큰소리 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본문은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처리문제입니다. 먼저 13-21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동침한 후에 그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쫓아내기 위해서 비방거리를 만들어 누명을 씌우는데, 그 누명은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부정한 여인으로서 나와 결혼했다는 누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것이 누명으로 밝혀진다면 남편에게 일백 세겔의 은을 벌금으로 받아서 여자의 아비에게 주고 그 여자는 남자의 평생토록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녀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면 그 여자를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22절에서는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했을 때 둘 다 죽이라고 합니다. 22-24절 역시 약혼한 처녀가 성에서 만난 남자와 통간을 하면 둘 다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약혼까지도 결혼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즉 결혼을 약속한 그 자체를 비록 동침은 안했다고 해도 이미 결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25-27절에는 남자가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강간하였을 때 남자만 죽이고 처녀에게는 아무 일도 행치 말라고 합니다. 28-29절에는 남자가 처녀와 통간하였다면 처녀의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평생에 버리지 못할 아내로 삼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아비의 후실을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규례가 어떻게 보면 단순한 도덕법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이 규례 안에는 이스라엘의 순수성은 무엇을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가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남녀 관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 2:20-25절을 보면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여자란 남자인 아담이 도와주기 위한 상대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하면서 남자의 존속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자의 갈빗대로 돕는 배필을 만드셨다는 것은 '나는 나' '너는 너'의 관계로서 돕는 상대가 아니라 '네가 곧 나'라는 관계에서 도와줘야 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자를 보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네가 곧 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질서이며 남자와 여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배필로 만드신 것은, 창조시부터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할 것을 의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의 결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창조 질서 안에서의 결혼은 세상적인 결혼과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결혼을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얻어내기 위한 통로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적인 심성, 즉 자기를 고집하는 무질서 속에서의 결혼은 결국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질서에서의 결혼, 즉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셔서 남자와 함께 하게 하신 것은 남자로 하여금 돕는 상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돕는 자이고 여자는 도움을 받는 자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순수성이며 창조 질서 안에서의 결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함으로서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창조 질서 안에서 복을 누리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남자는 돕는 자의 위치와 자리에서, 여자는 도움을 받는 자의 위치와 자리에서 서로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은 돕는 자이시고 인간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신랑을 사랑을 베푸는 예수님의 역할로, 신부를 신랑에게 순종하는 교회의 역할로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순종하는 그 관계가 창조 질서가 회복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결혼입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결혼을 통해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만 살아가야 할 약한 자임을 알라고 돕는 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고집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을 보면 결혼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행복을 고집하면서 만나고 합쳐지는 것이 결혼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이용하고 남자는 여자를 이용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해놓고서는 결혼하고 나면 나하고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혼을 합니다.

며칠전 결혼한지 1년된 연예인 부부의 이혼 얘기가 TV에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혼 사유는 여자는 남자가 자기 친정 식구에게 잘해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남자는 여자가 자기 식구들에게 잘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너'로 생각하는 것이고 자기 혈육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의 식구와 나의 식구로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고, 여자는 결혼하면 남자인 나의 식구에게만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를 '너'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나의 식구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부부는 무촌이라고 합니다. 무촌이기 때문에 함께 할 때는 한몸이지만 등돌리면 가장 먼 남남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촌수가 있다는 것은 나와 너의 관계이지만 무촌의 관계는 '네가 곧 나'라는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창 2:24절에서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는 것도 결혼하면 부모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몸이라는 관계는 혈족의 관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 즉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임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 자기 혈족을 주장하면서 자기 혈족에게 잘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만을 내뱉고 이혼한다는 것은 결국 처음부터 '너와 나'라는 각각의 관계로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며느리를 데리고 있는 남자의 가족들은 뭔가 서운하게 들릴 것이고 불만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런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며느리를 맞이할 때 단지 부려먹기 위한 수단으로 맞이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자의 부모가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내 자식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내 집에 들어온 여자로 대한다면 아마 부려먹겠다는 의식은 사라질 줄로 압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 질서 안에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입니다.

남자는 돕는 자이고 여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은, 남자는 강자이고 여자는 약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여자의 신체구조를 남자보다 약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강한 자인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창조의 세계는 강자와 약자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였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며 약자는 강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강자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창조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무너짐으로서 강자는 약자에게 힘으로 군림하게 되고, 약자는 강자에 의해서 억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들은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소위 '여권신장운동'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약자로 살기가 싫어서 강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자에게 눌리고 억압받는 것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눌리기 싫어서 강자가 되겠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강자가 되어서 그동안 받은 설움을 갚아주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내가 강자가 되어서 너를 누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질서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부부가 결혼해서 서로 초반부터 누르겠다고 마음먹는 것, 이것이 바로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가 무너진 무질서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억압하고 큰소리치는데서 남자다움이 과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인 여자를 도와주는데서 남자의 남자다움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결혼을 마련하신 것은 단지 부부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부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잊지 말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동침을 한 후에 아내가 미워집니다. 이것은 남자의 본성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남자는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고 여자는 남자는 독점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하는 자기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다가 결혼하고 동침한 후에는 점차 자기 아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소유한 것에 대한 것보다 소유하지 않은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미워진 아내를 쫓아내기 위해서 처녀가 아니라는 누명을 씌웁니다. 이것이 곧 자기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죄의 모습입니다. 강자로서 약자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처지와 행복과 고통과 상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강자에 의해서 약자가 이용당하고 이용가치가 없을 때에는 쫓김 받는 이 세상에서 신자가 보여야 할 순수성은 강자로서 약자를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부 관계를 통해서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처녀가 아닌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 밝혀진다면 그 여자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한 남자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여자의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의지할 힘을 마음에 가진 채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고 찾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하는 것도 역시 여자를 보호해야 할 남자로서 여자의 일생을 망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강자의 횡포이며, 또 남편만 의지해야 할 아내로서 다른 남자와 통간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주려고 하기보다는 해를 입히는 존재로 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인간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관계인데 오히려 해를 입히는 가해자의 관계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너라는 인간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본문에서 '죽여라'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죄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창조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세상이 심판 받아야 하는가를 선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약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천대하고 죽여버린 그 모습이 바로 심판 받아야 할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23절부터 보면 약혼한 여자가 성에서 남자를 만나 통간하면 둘 죽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이고, 여자는 성읍에 있으면서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들에서 남자를 만나 강간을 당한 여자라면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이유는 들에서는 소리를 질러도 구원해줄 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약자의 모습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약자가 할 일은 힘을 길러서 강자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약자의 모습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는 것, 이것이 약자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를 지르지 아니한 여자는 죽이라는 것은, 성이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 얼마든지 도와줄 자가 달려올 수 있는데도 소리를 지르지 아니한 것은 이미 약자의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죽이라고 합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 죽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즉 하나님이 도움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려고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구원자가 다가와도 밀쳐내 버릴 자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로서 강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돕고 도움 받는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필요로 하는 가정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자가 군림합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과연 약자로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강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십니까? 약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봤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고 해도 혹시 강자가 되기 위한 구함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서 우리를 돕는 자이시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부로서 할 일은 약자로서 강자이시고 신랑이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도움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죽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살아갑시다.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합시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신부된 신자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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