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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총회 (신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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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총회(신 23:1-8)

교회란 사단의 권세를 이겨야 할 단체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권세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사단의 권세를 이겨야 할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권세는 예수님이 이기십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만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진실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교회, 즉 예수님 안에서 모이지 못하는 교회,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분명히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는 분명히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안에서 모인다면 분명 그 능력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사단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필경 그리스도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형식적인 제도를 갖추고 조직력을 확장하고 굳게 세우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체계적인 제도와 강한 조직력이 있는 교회가 힘있는 교회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마치 큰 교회는 예수님이 관심을 더 가져주고 시골구석에 노인분들만 몇 있는 그런 교회는 예수님도 아예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체계적인 제도, 강한 조직력, 경제력, 교인수, 큰 건물, 이런 것들이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권세는 죽음입니다. 이 권세를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자기를 추종하는 무리를 모아 들여서 단체를 결성하고 체계적인 조직과 의식을 만들고 경제력을 모아 들여서 사탄의 권세와 싸우셨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없는 자였습니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는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능력이 있으면 자기를 구원해 봐라'는 조롱을 들으면서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늘의 천사를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 성취를 위해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는 힘이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제공했던 것은 모두가 세상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죽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은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능력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필연코 보여질 수밖에 없는 능력, 사탄도 두려워하는 권세, 그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과 똑같이 살고자 아니하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다가온 사탄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탐욕 속에서 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올해 100명이면 내년에는 200명을 목표로 합니다. 200명이 달성되면 또 다시 500명을 목표로 하고 교인들을 다그칩니다.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능력을 상실한 채 껍데기만 교회인척하고 있는 인간 종교 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위해 사셨던 모습을 통해서 사탄을 이기는 능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요 12:25절에 보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죽기 위해 사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런 땅에 죽기 위해 살아가는 단체가 발생하는데, 그것이 곧 교회이고 그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만들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서 해체되는 단체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만들어진 교회는 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조직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유지하고 지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법으로서 교인들을 붙들어 두려고 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합니다. 이 정신이 없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는 교회로 존재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인간의 열심과 노력을 총동원해서 날이면 날마다 교인수가 불어나고 그럴듯한 교회 건물도 소유하고 교육관에 주차장 시설까지 번듯하게 갖추어 놓고 이런 저런 행사 속에서 개인적인 보람도 느끼며 지루하지 않게 교회생활을 할 수 있는 멋들어진(?)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정신으로 모여지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사탄의 권세에 무릎을 꿇은 사단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2절, 3절, 8절을 보면 '여호와의 총회'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 모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총회란 오늘날 교단의 총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의 총회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 조직이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총회란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단체를 의미합니다. 총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은 자기들 스스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탄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총회만이 마지막 때 남는 유일한 단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총회는 지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단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창조되어서 지상에 내려온 여호와의 총회와, 지상에서 인간들이 모여서 자기들 멋대로 교회라고 이름 붙여서 만들어낸 단체와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 구별은 생각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사고방식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고방식과 일치하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일치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바로 여호와의 총회에 소속된 교회이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교회라는 껍데기만 둘러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하나님의 창조작업에 의해서 발생한다면, 교회 역시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세상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는 것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고, 죽은 것 가운데서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지상에서 인간들이 내세우는 것은 모두 부인해 버립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창조작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작업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입니다. 죽은 자였던 우리가 산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신자답게 되고 싶어서,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애썼기 때문에 믿음 있는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창조 작업을 부인하고 스스로 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하신 창조작업을 알고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교회가 크다 작다'를 이미 초월한 교회입니다. '재정이 많다 적다'를 벗어버린 교회입니다. '내 취향에 맞는 교회여서 재미있다'는 자기 생각에서 떠난 자입니다.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으로 든든하게 서가는 교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교회는 인간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작업, 즉 하늘로부터 난 교회인 것입니다. 이 교회만이 마지막때 심판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모인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 많이 하는 교회, 성경 많이 보는 교회, 선교 열심히 하는 교회, 이런 것에 관심을 두고 모이는 것이 과연 교회다운 모습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최종적인 이유는 마지막때 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내가 남고 싶다고 해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긴 자의 반열에 속해있어야 남은 자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이 좋으면 남은 자가 될 것이니까 그냥 운명에 맡기고 되는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남은 자가 될 수는 없지만, 과연 내가 남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가를 점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살아남기 위해서 내 모습을 점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사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만 사랑하는 자의 무리입니다. 그리스도인해서 탄생되어진 교회 역시 여호와만 사랑하고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무리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사랑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어야 합니다. 교회까지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라는 반문을 합니다. 예, 교회를 위해서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이고 마지막때 남는 자입니다. 이 단체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흔들지 못하고 허물지를 못하고 저주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호와의 총회, 즉 교회를 저주한 자를 저주해 버리고 축복한 자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지상에 세워진 건물과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마음에 담고 모이는 성도의 무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총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총회에 합당치 못한 자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자를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부를 하는 것입니까? 1절에 보면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신낭이 상했다는 것이나 신이 베였다는 것은 남자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자를 의미합니다. 즉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자를 여호와의 총회가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민족으로서 대대로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어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마음은 전달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맙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대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모여서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달되고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끊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나 교회에 들어오면 좋아합니다. 숫자가 늘고 교회가 부흥된다는 것 때문에 누구라도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대환영합니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말씀을 배우고 신자로 자라갈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무슨 진리된 말씀을 들을 수가 있고 그리스도를 배울 수가 있습니까? 교회란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모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나가달라고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말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가 개입된다면 몸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생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호세아서 5:7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는 말씀을 보면 사생자란 곧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나은 자식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한 것은 여호와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것, 그것이 곧 사생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총회는 이러한 사생자는 십대까지라도 거부해 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것이 아니라면 거부하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총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생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것만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가지고 모여드는 것이 총회의 순수한 모습인데 인간의 것을 가지고 모여들 때 총회의 순수성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생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가지고 모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생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것을 내어놓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자기 공로를 내세웁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이러한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내가 헌금한 것을 자랑하고 기도한 것을 내세우고 자기 신앙이 좋다는 것을 떠들어대는 것들은 그 속에 하나님의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것을 발산하는 사생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생자만 잔뜩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것을 내어놓지를 못하고 인간의 것만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랑하지 못하고 인간의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된 줄로 착각을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생자는 철저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떡과 물로 영접하지 않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축복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나라는 그 누가 저주한다고 해도 저주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을 보지 못하고, 단지 인간이 저주하면 저주가 되고 축복하면 축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고 있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결코 누가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신자는 그 누가 저주한다고 해도 축복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고, 목사에게 잘못하면 화가 오고, 교회에 봉사 안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모압, 암몬의 모습과 같은 것이고 이것은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6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두고 살지 못한 자는 평생에 평안과 형통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을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네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원한 복을 믿고 사느냐'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라고 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일이 잘 될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총회에 세상 것으로 시험하는 무리가 들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신자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진정한 복을 마음에 두고 있는 지를 확인하라고 세상 것으로 시험하는 자가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리라'고 합니다.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이들을 감정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얼마든지 반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애굽 또한 이스라엘이 종으로 있을 때 고생을 시킨 나라이기 때문에 감정이 좋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총회에 인간의 감정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유지되어야 할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낭이 상하고 신이 베이고 사생자요 모압 암몬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생명으로만 이어져야 할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는 나로 인해서 단절되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하는 사생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복을 마음에 두고 살지 못하고 복과 저주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모습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세상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미미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유일하게 남는 것이 여호와의 총회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총회에는 희생제물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총회는 그 제물이 흘린 피를 중심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영원한 복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볼 때는 미미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는 희생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피를 중심으로 모여든 여러분들이야말로 영원한 복을 미리 받은 자들이고, 따라서 교회는 복의 단체인 것입니다. 이 교회를 저주한 자를 하나님이 저주해 버리실 만큼 교회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을 모른 채 교회로 모인다면 그는 분명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정으로 영원한 복을 마음에 두고 이 자리에 모인 백성이라면 여러분을 통해서 복이 확산되어야 합니다. 복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가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만으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할 때 여러분을 통해서 약속이 이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혹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자신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도 못할 정도로 가치 없는 존재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서 피흘리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마지막때 남을 여호와의 총회,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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