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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맏물 (신 2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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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신 26:1-11)

사람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세상 살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투덜대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투덜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언젠가 여러분이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했던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제는 만족과 감사와 기쁨이었던 것이 오늘에는 불평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이제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마음을 순간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인 이상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좋은 것이 자신의 눈에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힌 이상 또 다시 불만족과 불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날 때부터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구조로 태어난 것입니다.

현실이 풍족하다고 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빈곤하다고 고생이 된다고 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평안하면 평안한대로 빈곤하면 빈곤한대로 불만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을 때 그 선물에도 불만을 내뱉습니다. 선물이란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없었는데 공짜로 주어져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있으면 있는 것만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없었던 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물에도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왕이면'하면서 더 큰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현재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이 없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없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큼 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정신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맏물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맏물이란 처음 맺은 열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 그 토지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냥 수확물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서 바치면 될 것인데 유독 맏물을 바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왜 굳이 그 이름을 두시라고 택하신 곳으로 맏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 앞에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은 단순히 바친다는 것에 중요성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맏물을 바친다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서는 직장에 취직을 하고 맨처음 받은 월급을 통째로 교회에 바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맨 처음 거둔 수확물을 목사에게 갖다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맏물이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맏물을 바쳐야 할 곳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는 땅, 즉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셔서 얻게 한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이스라엘은 구경도 못하고 들어가 보지도 못할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얻게 되어지는 모든 곡식고 소산물은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치고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분명 모든 소산물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큰 소리쳐도 하나님은 할말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것인데, 그것으로 큰소리치고 자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냥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한 땅이라고 구제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면 약속의 땅에서 주어지는 것, 누리는 것, 그 모두는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들어오지 못했다면 약속의 땅에서 얻은 모든 소산물들은 자기들의 것이 될 수 없었음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손수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면서 농사를 지어서 소득을 거둬들였다고 할지라고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은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이 땅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애굽의 종으로 고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팔자였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맏물을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애굽의 종으로 살던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약속의 땅에서 농사 짓고 살아가면서 이런 풍성한 소득을 거둬들인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결코 가나안에서 거둬들인 소산물의 처음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곡식으로서의 맏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곡식을 갖다 바친들 하나님이 그것으로 밥을 해 드십니까 아니면 떡을 해 드십니까? 곡식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신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고, 몸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러한 거짓말은 결국 저주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원하신 것은, 곡식으로서의 맏물이 아니라 맏물을 들고 오는 그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미리 만들어 놓으신 환경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개척을 하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들어가서 누리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약속의 땅의 모든 것을 누리는 대가는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기 전에 미리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것과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창조는 하나님 홀로 말씀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인간은 맨 나중에 창조되어서 있는 것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증거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은혜가 아닌 자기 소유욕에서 바라보았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은혜를 벗어난 증거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12-15절에 나오는 십일조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부분은 맏물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맏물을 들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갑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제사가 드려지는 곳을 말합니다. 즉 피가 흘려지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는 곳으로 맏물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소산물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주어진 은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맏물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맏물을 들고 왔을 때 제사장은 그것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의 옛날 처지와 현재의 은혜에 대해서 되새겨 볼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5-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5-11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내 조상은 유리 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말합니다. 유리 하는 아람사람이라는 것은, 한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유랑민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그네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유리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후선 역시 유리 하는 인생을 물려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리 하는 자를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정착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크고 강대한 하나의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애굽 사람에게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고통과 산고와 압제에서 놓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되새기라고 합니다. 결국 이 맏물은 우리의 손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맏물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맏물을 바친다는 것은, 맏물만 바치면 나머지는 너희 것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나머지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위해서 맏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맏물, 처음 것이란 처음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생산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맏물을 바친다는 것은, 맏물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고 여호와의 은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맏물에는 이스라엘의 존재성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존립 자체가 하나님이 있게 하셔서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맏물은 단순히 '소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맏물을 가지고 자기 혼자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 객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객은 똑같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상 것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자기들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생이며 고통일 것입니다. 오늘날도 소유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레위인과 객이 어떻게 복을 인식하며 다른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객을 자기들의 즐거움에 참여시켰을 때 가능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객과 함께 나누었을 때 소유 없는 그들이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객은 이스라엘의 옛날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유가 없고 유리하던 모습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존재하고 있고, 이 소산물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레위인과 객을 귀찮아하지 않고 자기들의 은혜의 즐거움에 참여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스라엘은 맏물을 바치면서 은혜를 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레위인과 객이 주리고 고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말하는 은혜는 모두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12절).

말 3:8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을 가지고 도적질을 했다고 하면서 책망을 하십니다. 도적질이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십일조와 헌물이 도적질이라면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아버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거의 모든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세상에 기업이 없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한 대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것도 됩니다. 즉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너희만 배부르지 말고 세상에 기업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소산물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복에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도록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은 십일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고아 과부 나그네 레위인같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고 꾸려갈 수 없는 자들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배려가 점점 소멸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기의 힘으로 거둔 자기 소유로 인정을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적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본질을 알고, 본문에서처럼 우리 조상이 유리하던 아람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임을 잊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면, 현재의 환경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자기들의 노력과 힘으로 이룬 결과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내 소유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고, 내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연히 레위인 객 고아 과부를 위해서 십일조를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것이나 소득의 10%를 내면 그것이 십일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득 중에서 처음 난 것, 맏물이 십일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맏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맏물 때문에 삽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온 이스라엘에 퍼질 때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은혜로 산다는 정신이 이스라엘의 정신이 되면, 이스라엘은 자연히 레위인과 고아 과부 객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며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 성취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풍요로움에 빠지게 되자 풍요를 누리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고 은혜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누구 덕분에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웃 사랑의 모습인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란 맏물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소득의 10%를 교회에 낸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는 맏물의 은혜를 아는 것이지 소득의 10%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소득의 10%만 내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할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가르쳐버리는 것은 성경을 이용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교인들을 멸망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인이나 객이나 고아 과부는 소득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맏물의 은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맏물의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맏물의 은혜를 아는 이스라엘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나누어 줄 때 레위인과 객과 고아 과부들도 전혀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맏물의 은혜에 함께 참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맏물의 은혜를 나누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애당초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고 객과 고아와 과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참된 이스라엘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맏물의 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우리가 복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배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맏물의 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예수님의 즐거움과 복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이웃 사랑이 우리들을 복으로 인도하시고 즐거움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잘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객과 고아 과부 같은 처지이고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웃 사랑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그 은혜만이 귀하게 느껴질 것이고, 은혜만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크나큰 위로를 얻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은혜를 팽개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 때문에 내가 나될 수 있었다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삽니다. 그저 내가 잘나서 예수 믿고, 내가 잘나서 성경을 알게 되고, 내가 잘나서 교회 다니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고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항상 사랑과 은혜를 나눌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내세우고 자기 것으로 이웃을 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비판이 나오고 구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내가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가를 봐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면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에게서는 은혜와 사랑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의만 하고 믿는다는 말로만 그쳐버린다면,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과 은혜를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맏물이 되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하늘의 복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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