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속고 속이는 라반과 야곱 (창 31:22-42)

첨부 1


사람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라반의 탐욕은 야곱을 사위로 보지않고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야곱도 장인을 장인으로 보지 않고 자기의 인생을 착취한 이기주의자로 봤습니다. 야곱과 라반 사이에 누가 더 이익을 얻느냐의 문제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의 원인이었고 이야기의 내용이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품삯을 10번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을 속였던 것입니다. 속았던 야곱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채 자기는 착취를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자식과 재산을 이끌고 몰래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20년이나 같이 살았던 장인에게 인사도 없이 몰래 도망갑니다. 이것이 야곱과 라반의 관계였습니다.

라반의 맹추격

라반도 할 말이 많고 야곱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속고 속이는 관계에서는 서로 할 말이 많습니다. 자기의 실수는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피해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피해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미워하고 비판하기 마련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삼 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모르게 야곱은 그 집을 떠나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야곱의 도피 소식은 3일이나 지나서 라반에게 알려집니다. 창세기 30장 36절을 보면 라반은 야곱을 신뢰하지 않고 착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야곱의 거처를 3일간 가야할 거리만큼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야곱이 도망한 소식을 듣는데도 3일이나 걸리게 됩니다. 자기가 친 덫에 자기가 걸린 것입니다.

3일이나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라반은 자신이 야곱에게 잘못했던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야곱을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야곱이 자기를 속였다는 생각에 분노로 가득차서 일꾼들과 자기 친척들을 데리고 야곱을 잡으러 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야곱은 정상적인 속도로 길을 갔을 것입니다. 라반이 그 소식을 듣는데 3일이 걸렸고 야곱이 떠난 지점에 이르는데 3일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야곱이 3일 길을 더 간 후였습니다. 따라서 라반은 야곱과 같은 속도로 가서는 야곱일행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7일만에 야곱 일행을 따라 잡았다는 이야기는 라반이 분노로 가득 차서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쫓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인생의 단면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삶의 대부분을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아우성을 치면서 죽을둥 살둥 애를 쓰고 노력하며 삽니다. 마치 이 라반처럼 말입니다.
결국 라반은 야곱을 따라 잡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라반은 야곱을 바로 덮치지 않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진을 친 바로 근처에서 다음날 아침에 야곱을 공격하려고 준비합니다. 우리는 당시의 라반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라반은 분노로 가득차서 노기를 띄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던 중 라반은 잠시 눈을 붙였는데 하나님은 그 틈을 이용하셔서 꿈에 라반에게 나타나십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라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라반아 너는 야곱을 만날 때 삼가 선악간에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실수를 많이 했고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상황가운데 개입하셨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못했든 잘했든 상관없이 위기에 부딪히면 자녀의 일에 개입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 우리들이 훌륭하고, 믿음이 있고, 매사에 무엇인가를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장애물을 제거해주시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기를 막아주십니다. 야곱도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것 만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해도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말을 하셨는데 이 말은 야곱이 잘못했든 잘했든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중 한가지는 잘못한 것을 꼭 밝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잘했든지 잘못했든지 덮어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너무 심하게 야단치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잘했든지 못했든지에 상관없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잘했을 때는 부모로부터 칭찬을 듣고 잘못하면 야단을 맞는다는 권선징악의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보여줄 것은 자녀가 잘못한 상황이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잘못했을 지라도 사랑해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주변에 선악간에 잘못한 일이 있거든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잘못한 것이 부추겨져서 더 많은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하나님은 라반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라반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왜 몰래 도망갔느냐? 왜 알리지 않고 떠났느냐? 너하고 나하고 20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너는 왜 내 딸들을 강도같이 끌고 갔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편애

얼핏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말은 틀립니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자기 딸들을 야곱이 칼로 위협해서 강도처럼 잡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해석은 자유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해석을 잘못해서 진실을 왜곡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섭섭하고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진실과는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야곱이 칼로 위협해서 강제로 끌고간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야곱에게 동의해서 기쁨으로 동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 라반의 감정은 사실을 왜곡합니다.
27,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야곱이 떠나겠다는 사실을 알렸다면 라반이 정말 그렇게 기쁘게 보냈을까요? 야곱이 알리지도 않고 떠난 것에 대한 그가 분노하여 힐문하는 말은 진실이지만 축복하며 보냈으리라는 말은 거짓입니다.
라반은 자기를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행위를 미화시킵니다. 이런 면에서 글 쓰는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시를 쓴다든지 소설을 쓴다든지 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 속에서 가상의 인물을 통해서 자기를 미화시키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다 멋있어 보이고 훌륭해 보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라만 장군은 문둥병이 걸려서 항상 제복을 입고 살았습니다. 옷을 벗으면 자신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옷을 통해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감추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옷을 멋있게 차려 입고는 자기가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회장, 위원장 등과 같은 직위의 옷을 입고 살지만 사실 옷을 벗겨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라반은 자기 행위를 미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나로 내 손자와 내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사위는 밉더라도 자기 딸과 손자와는 헤어질 때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라반이 지금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했거나 거짓말만 말했다면 차라리 괜찮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편리에 따라 진실을 말했다가 거짓을 말했다가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에게 ‘네 행위가 실로 어리석구나’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라반에게는 옳게 생각되는 말이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합니다. 나의 해석이 옳으니 따르라고합니다.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야곱이 괘씸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라반이 괘씸합니다. 피장파장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이지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관계가 아닙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내가 너 정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라고 라반은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이것을 보면 라반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은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을 편애하실까? 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실까?’

라헬의 거짓말

참 사랑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편애입니다. 일방적으로 편을 들어주고 그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공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곳에는 일방적으로 조건없이 하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정히 사랑했다면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불순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 따진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속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편애하시고 일방적으로 봐주시고 실수를 했어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봐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30∼32절을 보십시오.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라반이 야곱에 대하여 분노한 이유는 자기가 그렇게 아끼고 있는 가호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렇게 도망한 것은 내가 당신에게 정직하게 알렸으면 당신은 내 아내를 다 빼앗아 갔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당신의 가호신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약 가호신 드라빔을 훔친 일이 발견되면 어떤 대가를 치루게 한다 해도 달게 받겠다고 합니다. 그는 아내 라헬이 그 드라빔을 훔쳤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일을 겪습니다. 나는 잘못을 안 했는데 집안 식구 중 누군가 그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 치다가 뚜껑을 열어보면 사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라반은 의기양양하게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가서 드라빔을 찾아보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라헬의 장막에 들어갑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얼른 안장안에 숨기고 그 위에 앉습니다. 경수가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딸이 경수가 나온다는데 잔인하게 사실을 조사해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의 거짓말에 이런 식으로 넘어갔습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의 아내이고, 믿음의 사람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도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라헬에게서 보게되는 또 다른 모습은 라헬은 단연코 남편의 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라헬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합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는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해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거짓되고 의롭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야곱은 훌륭한 남자가 아닙니다. 라헬도 그렇게 멋있는 여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를 사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흠이 없고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다 쓰레기 같고 걸레 같습니다. 스스로 보기에 자기가 괜찮고 훌륭하고 의인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은 그렇게 훌륭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라헬과 야곱을 들어쓰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셨다는 데 우리의 감동이 있습니다.
36∼4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쌔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이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번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했을 때 야곱은 일대 대반격을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말이 다 맞습니까? 야곱의 입장에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드라빔을 훔쳐간 것은 사실입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것을 훔치고 경수가 나왔다고 거짓말 합니다. 그러나 라헬은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내 남편을 20년간 고생시키며 다 착취해 갔으니까 이정도의 것을 훔친것은 별 것 아니다’라고 떳떳해 했을 것입니다. 라헬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의 모습입니다.

부부싸움도 이런 것입니다. 의로운 남편이 어디있고, 의로운 아내가 어디 있습니까? 다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나중에 사실이 드러나면 남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모르는 부모의 잘못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사이의 잘못을 서로 모를 뿐이지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고 따지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라반과 야곱의 관계에서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정의감이 있고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불안한 까닭은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할수 있는 분이 한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영원히 의롭고 옳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거짓말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대해주셔서 우리들을 보석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허물과 실수와 거짓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감추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총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