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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실인 (민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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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과 같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된 것은 받아들이고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습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습성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고 나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은 영혼이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육신에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항상 육의 문제는 영혼이 잘되는데 걸림돌로 등장하기 때문에, 육이 곧 장애물이요 걸림돌인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육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과 육이 동시에 다같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영과 육을 동시에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육이 잘된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못박아 두고 계십니다.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님께 나와서 복을 요구하고 성공을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까 말겠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을 해서 재물을 섬기는 것을 교회에 바치지 않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왜 헌금을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돈을 아끼는 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재물을 아끼지 않고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축복하셔서 만 배나 갚아주신다'고 말합니다. 재물에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해놓고 헌금하면 만 배나 갚아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까 욕심을 가져라는 것입니까?

전혀 앞뒤가 맞지 않고 모순되는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외쳐지고 있는데 한심스럽고 답답한 것은 그 말을 듣는 성도라는 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인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전혀 아닌 것이 말씀으로 위장되어 전파되고 있는데도 그 말에 속고 있습니다. 속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목적부터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말씀을 듣는 목적이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배우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복과 세상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는 소위 축복 받는 비결, 기도응답 받는 비결, 성령 충만의 비결, 이런 사이비와 다를 바 없는 엉터리 말에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참된 것을 거짓이라고 몰아붙이고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환영하는 것이 지금 이세대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목회자는 또 어떻습니까? 교회성장에 미쳐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이 일생 일대의 꿈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올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주님께 관심을 두고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이 아니라, 자기의 꿈과 욕심에 관심을 둔 자기의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세미나도 개척교회 1년만에 몇백명 모았다는 목사가 강연하는 '교회 성장 세미나', 또는 교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세미나 등입니다.

도대체 교회를 인간의 재능과 기술로 키워보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불신앙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불신앙을 넘어서 하나님을 팔아먹고 있는 사이비와 같은 작태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가 개척한지 2-3년 안에 100명을 넘지 못하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신학교에는 '교회성장학'이라는 신학도 아닌 괴상한 학문이 가르쳐지고 있고, 몇 년 전부터는 '다락방 전도학교'라는 단체까지 생겨서 교회 성장을 열망하고 있는 목사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교회 성장에 관심을 두고 계셨다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새벽예배의 본문이었던 요17장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 기도에 과연 교회의 부흥이나 신자된 자들의 세상적인 축복이 언급되고 있습니까? 주님의 기도는 곧 주님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는 것도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 성장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건축에 관심이 있으면 건축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편히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세상의 복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주님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이 아니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상관도 없고,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단지 종교 단체에 불과하면서 '나는 괜찮은 신자'다 '우리교단은 괜찮은 교단이다'고 착각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주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만을 높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은석교회라는 조직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교회가 주님이 함께 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찾고, 교회라는 단체를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서 주님이 계시지는 않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자로 세움 받았지 신자된 자를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우리의 운명이 뒤바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세상이 전부인줄로 알고 오직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진에 포함된 사람으로 부름 받은 뒤에는 나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운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사람이 새사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옛사람으로 살던 때와 같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새사람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으로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인가는 여호와의 진이 가져야 할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린 지금까지 거룩한 진은 더러운 것을 쫓아내야 하고, 하나님은 모든 자의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의 세상 죄, 즉 옛사람의 모습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나실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교회와 신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했지만, 사실 본문의 나실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또 하나님은 우리가 나실인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껍데기만 있는 허울좋은 신앙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실인은 히브리어로 '구별된 자'란 의미의 말입니다. 6장에서도 '자기 몸을 구별하여'라는 말이 12번이나 강조되어 나오는 것을 볼 때 나실인은 구별된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나실인의 삶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나실인은 하나님이 정해서 뽑아 세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면 나실인으로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지만 나실인으로서 사는 삶이 결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거나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실인은 자신이 기간을 정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뭔가 큰 축복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약속도 없습니다. 나실인으로 살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다른 혜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실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닙니다.

나실인은 금지 사항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해야 합니다. 심지어 포도즙, 건포도, 생포도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됩니다. 즉 머리를 깍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결코 쉬운 규례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서원한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자기의 이익과 탐욕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강조하는 것들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대가를 바라고 자기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어려운 나실인의 삶을 살겠다고 자청하여 나서겠습니까? 대가도 바라지 않고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나선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외에는 없으리라 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나실인으로 자원하여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나를 여호와께 바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로 신학교에서 많이 쓰여집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자신을 여호와께 바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여호와께 바친다'는 말도 자식을 신학교 보내서 목사로 만들겠다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도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살지 않는 것, 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내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롬 12장에 나오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의 의미도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몸을 내 몸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여기고 사는 것, 이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고 여호와께 내 몸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실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앞서 말한대로 구별이었습니다. 포도와 관계된 것은 모두 끊어야 합니다. 포도는 이스라엘의 주식입니다. 가장 좋은 음식입니다. 가장 좋은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세상의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머리를 깍지 않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생명과 연관이 없는 것은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나실인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모 형제로부터 까지 멀어져야 하는 고통과 어려움의 삶입니다. 이렇게 삶으로서 나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나실인을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이 드려진 삶, 하나님께 헌신된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단이 설치고, 사이비가 설치고, 교회 아닌 교회가 설치는 이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나실인에게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삶을 외면하고서는 신자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구별이 없이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헌신이란 돈 바치고, 내 노력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이란 구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안산다. 내 하고 싶은 대로 안한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런 헌신이 없이 우리는 신자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나실인의 구별을 단순히 세상적인 것을 안한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서 노래방을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노래방에 가지 않고, 유행가 부르지 않고, 영화관에 가지 않고, 술 담배 안하는 것들을 구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래방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것을 통해서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유행가를 부르지 않아도 복음성가의 자극적인 음률을 통해서 유행가의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노래방가고, 유행가 부르고, 술. 담배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것쯤은 이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실인의 구별은 세상을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자원한 사람은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쁨과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다 하는 것 못해봤다고 해서 억울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로 살지 못한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고, 내 교회 부흥 안됐다고 애가 탈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 대신이 이미 하나님의 기쁨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탄해야 하는 것은 세상 것을 누리지 못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해야 하고, 형제끼리 좀 더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애가 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은 세상과 구별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자임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13절부터 보면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을 무사히 마쳤을 때 행할 규례가 나옵니다. 나실인이 서원한 기간을 마치게 되면 예물과 함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자기의 머리털을 잘라서 제물로 드리는 것이 나옵니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합니다. 머리털은 나실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 머리털을 잘라서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의 일부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이 나실인의 제도뿐입니다. 즉 자기의 헌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나실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실인 되시는 분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완벽한 나실인입니다. 세상에서 온전히 구별된 삶을 보이시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나실인 되라는 말을 감히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실인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드릴 말씀은 나실인의 삶을 통해서 뭔가를 배우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보여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관심두고, 자신에게 관심 두고 살기보다는 주님께 관심 두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헌신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실인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는 삶입니다.

결국 오늘날 나실인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시키는 모습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찾기 위해서 나오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는 나실인이 되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재미가 없어도 이미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 자들입니다. 세상 것이 없다고 억울해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나실인의 모습을 지닌 헌신된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가'를 끊임없이 살피십시오. 이것이 나실인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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