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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함 (민 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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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뭔가 큰 기쁨이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작은 일에는 너그러워지고 양보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양보할 수 없고 분명히 짜증내고 다투었어야할 일도 다른 큰 기쁨을 가져다 준 일이 있을 때 그 기쁨 때문에 짜증내고 다툴 일도 양보해 버리는 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잠시후면 그 큰 기쁨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짜증내고 양보하지 못하는 삶으로 되돌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살자는 강조를 많이 합니다. 의학자들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들 합니다. 사회가 바빠지고 항상 뭔가에 쫓기는 듯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에 힘쓰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여유가 사람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를 원하면서 삽니다. 지금처럼 쫓기는 듯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등산도 가고, 여행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느긋하게 마음 편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방 뒤쳐지게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자신은 쉬고 싶고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내 옆사람이 쉬지 않고 있고 여유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 또한 쉴 수 없고 여유를 부리지 못합니다.

요즘 고액과외가 사회문제로 등장해 있습니다. 그런데 한달에 몇백만원하는 도저히 믿지 못할 과외를 자식에게 시키기 위해서 어머니가 부업까지 해야 하는 그런 지경에서 항상 어머니들의 말은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것이 아니다. 남들은 다 시키는데 나혼자 안시키면 그만큼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식만 뒤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고액과외를 몰고 온 것입니다. 이런 사회 현상 때문에 몇백만원짜리 과외를 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액과외를 비판하면서도 나도 뒤쳐질 수 없다는 생각에 몇십만원 이라도 들여서 과외를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영어회화다 컴퓨터다 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모르면 뒤떨어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고 있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나보다 앞서 있는 누군가 때문에 편치 못하고 괴롭고 부담으로 남아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결국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아니 더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더욱 더 조급하고 성급하게 됩니다. 일을 시작하면 금방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애를 쓰고 그러다 보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지고 결국 스트레스만 쌓여갈 뿐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한낱 바램으로 그쳐버린채 오늘도 내일도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양보보다는 조그만 일에도 짜증내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매스컴에서 양보하며 살자고 캠페인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 이상 되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있으려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큰 기쁜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쁜 일이 있다고 해도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큰 기쁨을 줄만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도 기대하기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람은 항상 여유없이 평안없이 자기의 목표와 유익을 위해서 양보도 없고 너그러움도 없이 짜증과 다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유를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유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돈에 불편이 없고, 자식들이 문제없는 환경 속에서 누리는 여유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진 자의 여유, 가진 자의 너그러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여유가 아닙니다. 가진자에게서 나타나는 느긋함일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만약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면 바로 가진자로서의 느긋함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환경으로 인한 느긋함에서 온 여유는 환경이 바뀌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마음의 여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여유로운 삶은 모두가 환경이 충족되어짐으로 주어지는 여유입니다. 가진자로서의 여유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유로운 삶을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고 조급하게 살아가고 쫓기듯 살아가다 보니까 여유를 얻기 위해서 여유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과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계시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마음의 여유란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서 누리는 여유나, 세상의 큰 기쁨이 주어짐으로서 누리는 여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여유는 진정한 여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 누리는 여유라는 점에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소유냐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유가 있습니까?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양보하고, 세상을 너그럽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뭔가에 쫓기듯 여유를 잃어버리고 양보하지 못하고 항상 염려하고 근심하며 조그만 일에도 짜증을 내고 불화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분명 신자로서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하고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여유는 세상의 것을 포기함으로서 주어집니다. 세상의 것 때문에 여유를 잃고 산다면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여유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같이 땅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평생 여유를 모른 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유란 세상을 중심으로 사는 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유는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카타콤의 순교자'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로마가 기독교인을 탄압하면서 기독교인을 불에 태워죽이고, 맹수에게 먹히게 하는 탄압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지하묘소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암흑으로 가득찬 동굴 속에서 그들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지하묘소에 있는 무덤의 묘비에는 한결같이 '평화 속에 잠자다'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이 박해 속의 초대교인들의 마음의 여유였습니다. 언제 붙들려서 불에 태워죽고 맹수에 먹혀 죽을지 모르는 형편 속에서 동굴에 몰래 모여서 기뻐하며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죽으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던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는 여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앙이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교회를 탄압하는 세력도 없고, 좋은 예배당에서 편안하게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예배의 소중함도 잃어버리고, 온통 마음이 세상에 쏠려있다 보니까 말씀을 들으면서도 생각은 다른데 가있고, 결국 세상사람과 차이가 없는 별볼일 없는 신자로 전락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뭔가 특이함이 없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는 너무 가난한 상태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믿음은 이런 것이라고, 신앙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똑같이 마음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면서 똑같은 일로 화내고, 똑같은 일로 짜증내고, 똑같은 일로 양보 못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특별한 좋은 것이 우리들 마음에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박해자들의 죽음도 두렵지 않은 뜨거운 소망, 세상이 알지 못한 비밀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삶의 비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에 대해서 비방하는 내용입니다. 비방의 원인으로 드러난 것은 모세의 결혼입니다. 아마도 모세의 아내였던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가 죽어서 재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혼의 상대가 구스 여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스 여인이란 구스 지방의 여자라는 뜻인데 왜 구스 여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구스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말합니다. 결국 구스 여인은 흑인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애굽에 노예로 끌려온 여자로 추정됩니다. 노예란 천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그런 여자가 이스라엘이 해방되어서 애굽에서 나올 때 같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집안의 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이웃에 아들이 흑인 여자와 사랑해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한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들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한다면 할 수 있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는데 결혼시켜야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아들이 그렇다고 합시다. 어떤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따라서 미리암과 아론의 모세를 비방하는 태도는 그렇게 무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적 입장에서 볼때입니다. 우린 항상 시각이 달라야 합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해도 세상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결혼은 단순한 한 개인의 결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서 보여주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천한 구스여인과 결혼하게 함으로서 우리에게 뭔가를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는 아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보여지는 것이 계시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아니고 성령의 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계시를 깨닫는 것은, 즉 말씀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말씀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것이 참아지고, 말씀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양보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말씀에 다스림 받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것을 가지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데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세상 것보다는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이고 비밀을 간직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삶에도 계시를 담아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흔히 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주님을 찾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잘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왔다갔다 한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로 한 개인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가장 천한 여자인 구스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삶을 가져오는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미리암과 아론은 오히려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의 자리에 있습니까? 모세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미리암과 아론의 자리입니까?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합니다. '승하더라'는 것은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즉 모세의 온유함이 지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의 증거로서 구스여인을 취한 것을 보여줍니다. 온유함을 성격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온유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남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에도 얼마든지 자기를 양보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때문에 온유란 곧 마음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마음의 여유없이 산다면 그 이유는 온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으로, 온유함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문제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다. 보통 세상 기준은 사위를 구하든 며느리를 구하든 자기 체면과 가문을 생각하고 구합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흠이 없고 번듯한 집안과 사돈을 맺기를 원하고 자랑할만한 사위 며느리를 원합니다. 제아무리 서로가 사랑한다고 해도 부모의 기준에 어긋나면 반대합니다. 이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드라마에 보면 이런 경우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럴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자신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마음의 여유가 없이 세상 기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반대하고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양보하는 것이 곧 온유인데 과연 이런 온유함이 쉽게 보여지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다스려지는 자라면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2절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고 합니다. 아마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모세의 결혼문제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이 말씀을 내리시는 선지자인데 왜 자기들과 의논하지 않고 모세 혼자 일을 처리하는데 대한 불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위치가 낮아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결혼 문제도 미리암이나 아론과 의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논을 미리 했다면 새삼스레 결혼 문제를 이유 삼아 비방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문제에서도 모세 혼자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비방에 대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세사람을 회막으로 불러 모아서 말씀을 하십니다.

6-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한마디로 모세는 너희와 다르다고 하십니다. 다른 선지자는 꿈으로 이상으로 알리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했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아주 특별하게 대우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뭔가 특별해서 특별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통사람과 똑같은 모세라는 한 인간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으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모세라는 인간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담겨 있는 계시가 특별한 것입니다. 즉 모세를 통해서 드러난 계시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모세라는 개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데도 미리암과 아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가 자기들과 의논하지 않고 혼자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온유란 하나님을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 자체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천한 구스여인과 결혼함으로 보여주고 자신에 대한 비방에도 그냥 넘어가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러한 온유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본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기는 힘듭니다. 어쨌든 모세를 온유함으로 이끌 수 있을 정도의 놀랍고 귀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여호와의 형상이란 신약에서 예수님을 말합니다(고후 4:4, 골 1:15). 그렇다고 모세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구속자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그 광채를 본 자라고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의 귀하고 찬란하고 영광된 것을 보고 아는 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얼마든지 양보하고 용납하고 넘어갑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구약에서 온유한 자는 모세입니다. 신약에서 온유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위치에서 구속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천한 자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천하다고 무시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자기와 똑같은 자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도 가장 천한 우리들을 용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천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신부라고 하십니다. 또 장차 우리와 혼인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온유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비방합니다. 하나님은 미리암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문둥병에 걸리게 합니다. 문둥병은 저주받은 자의 표시입니다. 결국 미리암 너도 구스 여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리암의 비방은 '나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생각이 모세의 온유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유함으로 사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늘의 귀하고 영광된 것을 아는 자로서 세상을 초월하고 살아가는 믿음, 그 온유로 사는지를 묻습니다. 여러분 온유로 사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은 너무나 마음의 여유가 없이 온유함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그만 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짜증을 내고 양보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 자식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자는 무시하게 됩니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것을 안다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기뻐하고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유입니다. 그 뜻에 복종하고 온유함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십시오. 우린 너나 나나 똑같은 문둥병자였습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었다면 모두 저주 아래서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십자가 덕분에 이렇게 말씀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을 아는 자로서 온유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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