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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발람과 나귀 (민 22: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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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죄를 지은 인간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치와 약점을 가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죄인된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속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 속성이 보여집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TV를 볼 때 가장 부담없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그것은 나보다 못된 사람들이 등장해서 나보다 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극진히 잘해주는 내용이 나올 때 옆에 아내가 있으면 채널을 돌려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은 그 드라마의 남편같이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드라마의 남편을 통해서 약점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노골적으로 채널은 돌려버리지 못하지만 심기는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아내가 눈치없이 '당신도 저 사람같이 좀 해봐라'라는 말을 한마디라도 했을 때 아마 좋은 말로 대답할 남편은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드라마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못된 남편의 모습이 등장할 때는 아주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된 사람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은 아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수치를 은폐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속성에서 나타나는 행동의 단면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중에 인기 있는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수치스러움을 고발하는 영화는 인기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이 등장해서 착한 일을 하는 캠페인성 영화는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영화는 보고 있어봐야 마음에 부담만 올뿐인데 누가 보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영화는 인간의 수치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저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책도 도덕적인 책은 인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수치와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앞에 나온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무화과 잎을 걸치고 나옵니다. 더러운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깨끗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의 몸에 걸침으로서 떳떳하고 정정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서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수치는 감추고 대신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울 수 있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사람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서보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착하고 도덕적인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누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착한 사람으로 판단하십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를 짐승보다 못한 자로 취급해 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귀와 발람이라는 인간이 등장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나귀와 발람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고발하시는 한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1절에 보면 발람이 나귀를 타고 모압의 귀족들과 함께 모압으로 향하게 됩니다. 발람이 모압을 가게된 이유는 15절부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나머지 발락에게 사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요청을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발람은 모압의 사자들에게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뿐이다라고 했고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12절)고 말씀하셨고 발람은 그 말씀대로 모압의 귀족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 발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5절부터 보면 발람에게서 뭔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락은 발람이 오기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앞서 보냈던 귀족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서 와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더 높은 귀족을 보냈다는 것은 발람을 그만큼 높이 대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발람을 크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발람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테니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합니다.

이 요청에 발람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8,19절에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압의 사신들과 함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이 말을 보면 발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람의 믿음이고, 또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본문에서 발람이 가는 길을 여호와의 사자가 막아서고 또 34절에서 발람이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애당초 하나님이 발람에게 지시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왜 뒤에는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러한 점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발람이 두 번째 사신들이 찾아왔을 때 다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 알아보겠다고 한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처음 사신들이 왔을 때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사신이 왔다고 해도 그냥 그들을 돌려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또 다시 하나님께 묻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결국 발람에게는 귀족들을 따라서 모압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락이 재물과 세상 영광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발람이 또 다시 하나님께 물어 보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혹 하나님의 지시가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던 것입니다. 발람이 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자 했었다면 두 번이나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은 첫 번째 답에 대해서 그대로 순종하기 싫어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발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첫 번째와 같이 '가지 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라'고 하십니까? 이것을 하나님이 뜻을 번복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아마 발람은 모압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이 나서 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행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발람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음을 본문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위에서 풍랑을 만났고 그 결과로 고기 뱃속으로 삼킴을 당했던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요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도 하나님이 모압으로 가라고 하는 말씀에 나귀를 타고 떠났지만 그 길의 도중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발람의 모압 행을 허용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모압 왕 발락의 유혹에 빠져있는 발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발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귀를 이용하십니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나귀가 길을 가지 않고 밭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발람은 화가 나서 나귀를 돌이키려고 채찍질을 합니다. 그래도 나귀는 발람의 말을 듣지 않고 발람은 계속해서 매를 때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시고 나귀는 발람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30절에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고 합니다. 나귀는 짐승입니다. 짐승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서 인간과 대화를 하도록 하십니다. 나귀를 인간의 수준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이지만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심으로 상대적으로 발람을 나귀인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인 나귀도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고발합니다. 길을 가지 않고 버티는 나귀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나귀처럼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인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지금 여호와의 사자를 바라보고 행동합니다. 비록 자기 위에는 자기의 주인인 발람이 타고 있고, 매를 때리면서 길을 가기를 원하지만 나귀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발람도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임을 알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합니다. 단지 나귀만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소유물이 나귀가 자기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며 애꿎은 나귀만 매를 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행동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동하면서 사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유물을 바라보고 행동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발람과 같이 짐승보다 수준이 낮은 인간임을 지적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나귀도 나를 바라보고 행동을 하는데 너는 왜 나를 보지 않고 네 뜻대로 행동하려고 하느냐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발람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발람 스스로는 하나님이 모압으로 가라고 해서 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압으로 가고 싶어했던 것은 발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발람은 '나는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묻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럴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또는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가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기며 자기의 일로 인해서 믿음이 방해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자신이 원하는 좋은 쪽으로 성취되기를 원하는 속마음을 감춘 기도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믿음을 기도로서 증명하고 싶은 기도 아닌 기도였는지는 일에 대한 나중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면 설령 일이 잘못되거나 잘 안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신앙이라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현재 일이 잘 안된다면 그것이 현재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지금의 이 형편에 순종할 수 없다는 거역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일을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발람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나귀가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에만 화를 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내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화를 내지 않습니까? 그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은 전혀 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24절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좌우에는 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하나님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고, 막다른 길이고, 독안에 든 쥐입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믿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한평생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쳐서 잘살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죽습니다. 죽음이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자의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서 마쳐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막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앞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맞는 인생으로 빠져 나가보려고 애를 쓰며 살지만 그 애씀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영혼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발람은 자신이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음을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야 깨닫게 됩니다. 31절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발람의 눈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가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러자 발람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나귀가 바로 여호와의 주장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음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발람의 입에서는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라고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발람이 나귀를 때리면서 자기의 길을 가기를 재촉하는데 나귀는 가지 않고 버티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을 여러분의 나귀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나귀 위에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여러분이 타고 있는 나귀가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마음대로 안되면 매를 때리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쪽으로 나귀를 끌고 갈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나귀, 즉 인생과 무척 씨름하고 다투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탄 나귀 앞을 하나님이 가로막고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몰랐을 때 내 힘으로 나귀의 길을 돌이켜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25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라고 합니다. 억지로 나귀를 길을 가게 하려고 했을 때 발람의 발이 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억지로 내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발람은 나귀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나귀를 통해서 발람을 상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고 바라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바라보든 돈을 바라보든 바라볼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이 바라보고 사는 그것을 통해서 더욱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상하게 하실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인생을 고통과 질고와 슬픔 속에서 영혼이 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는 인생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뜨여서 자기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내가 주인 되어서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린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지금의 이런 인생에 태우신 것은 나를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환경으로 집어 넣으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람과 같이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인생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을 깨닫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여러분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여러분의 마음대로 움직여진다면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결국 죽음입니다. 33절에 보면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고 합니다. 나귀가 발람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발람은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여러분은 끝까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결국 멸망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인생이 움직여 봐야 가는 길은 여러분의 탐욕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인생에 감사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느냐를 묻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가리고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세상 것을 끌어 모으는 인생을 살아가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타고 있는 나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도 여러분을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데 쓰여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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