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평화의 언약 (민 25:1-13)

첨부 1


신앙생활은 힘으로 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이해하십니까? 즉 신앙은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유명한 전쟁이야기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잘 아실 것입니다. 조그만 소년인 다윗이 거인인 골리앗을 이긴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상대방의 힘 앞에 기가 죽어있었습니다. 상대방과 자기의 힘을 비교해서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할 때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다윗이 등장해서 신앙은 힘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힘없는 다윗이 등장해서 거대한 세상의 힘을 부숨으로서 신앙은 힘을 축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빼고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골리앗 같이 힘을 내세워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앞에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다윗을 내세워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과연 골리앗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 편에 서 있습니까. 골리앗을 동조합니까 다윗을 동조합니까. 혹 골리앗 같이 자기의 힘을 의존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 편에 서있는다는 것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힘의 전쟁의 방식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힘없는 어린아이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에서 신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음성도 없는 분을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분처럼 믿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분을 있다고 우기고, 한낱 책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때로는 크나큰 심적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보이는 것을 믿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천국 못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면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잘 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전혀 반대의 것을 요구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상의 힘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의 조건이 전혀 없는데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에 뭔가 반발심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죄의 문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것의 관계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을 믿고 의지하느냐, 아니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하고 대신 보이는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대체했느냐를 가지고 죄의 여부를 따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도 흔히 생각하듯이 착하던 사람이 갑자기 술과 노름에 빠지고 가산을 탕진하고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을 신뢰하고 그분에게만 순종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분이 미덥지 못해서 대신 확실한 믿음을 제공하는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버린 것을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일 계명은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믿음의 대상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계명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해 버리는 것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신앙한다는 것은 자기 포기와 힘든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힘이 없어서 당하는 고통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럴 때도 변함없이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만 신앙하기 위해서는 놀라운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내까지도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1,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이 제사할 때 같이 그들의 신에게 절했다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소행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4절에 백성의 두령을 잡아서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면 하나님의 진노가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으로 본문을 보면 쉽게 하나님의 교훈을 찾아낼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음행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생각하는 보편적인 교훈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앞서 말한 인간의 타락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눈앞의 보이는 즐거움에 더 사로잡힌 인간의 죄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음행하지 마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단순한 음행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따르기보다는 보이는 즐거움에 치우쳐 있는 인간의 타락의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음행은 단지 인간의 타락이 맺어낸 하나의 열매였을 뿐입니다.

만약 음행과 우상 자체를 타락이라고 말해버리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음행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나는 타락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해 버릴 것입니다. 또 음행하지 말자, 우상 섬기지 말자는 강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새사람이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새사람 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될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음행 우상 등 인간의 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도 '너희는 그러지 말라'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죄의 모습들을 '너희는 그러지 마라'는 교훈적인 차원에서 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큰 실수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곧 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은 음행을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으니까 우리는 음행을 하지 말자'라고 할 것 같으면 과연 인간은 음행을 피할 수 있습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음행의 행동이 없다고 해서 자신은 음행의 문제에서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이스라엘이 음행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쁜 행동이 기록돼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타락한 죄인의 정체가 폭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인격을 가지고 자신을 미화하고 더러운 모습을 가리면서 스스로 거룩한 신자인체 했던 우리의 죄의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해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보이는 것에 치우쳐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본 채 이 말씀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으로 인해서 그치느냐 입니다. 진노 아래 있는 자로 하나님께 나온 우리에게는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 안에 염병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염병이 '비느하스'란 사람으로 인해서 그치게 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회막에 모여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것을 본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의 막에 들어가서 그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찔러서 죽여 버립니다. 그럴 때 염병이 그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잘한 행동이 있어서 그것이 기쁨이 되어서 진노가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의 진노로 회막에서 울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한 것은 비느하스의 행동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신 것이 아니라 비느하스를 보시고 진노를 그치신 것입니다. 이것을 13절에서는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비느하스의 행동이 이스라엘 전체를 속죄한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창으로 두 남녀를 찔러 죽인 것을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행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시고 이스라엘을 속죄하십니다.

여기서 우린 다시 한번 한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은 우리편이 아니시다'는 것을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도 아니고 우리편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편이라면 음행 했다고 해서 염병으로 24,000명이나 죽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 편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편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은 비느하스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그치신 것입니다.

질투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등장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없습니다.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질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음행을 하고 그 여자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같이 절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질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비느하스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인해서 이스라엘은 염병이 그치고 평화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선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흔히 '평화'라고 하면 다툼이 없고, 아무 문제가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을 연상합니다. 또 마음의 평안함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화를 공급받고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란 이런 차원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언약은 비느하스가 두남녀를 죽임으로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평화라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를 가리켜서 평화라고 말합니다. 평화란 아무일 없이 조용하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평화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전에 다툼과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싸움이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툼, 싸움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평화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세상에 있었는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해결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적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적,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습, 그것이 1-3절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즉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피조물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적이고, 진노의 대상이고, 싸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물리쳤을 때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스하스가 두 남녀를 죽인 것을 기뻐하시고 그것으로 평화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동한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고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마음으로 행동하십니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맞다고 하신 것을 나도 맞다고 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십니까?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시면 평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으로 하나님같이 죄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평화를 알 수 없습니다. 평화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전쟁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의 전쟁입니까?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자신의 사고방식과의 전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나의 타락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할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음행한 두남녀를 죽이는 것 자체가 전쟁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이 소유해야 할 정신입니다(13절).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질투심으로 행동하는 자가 등장하고 그 행동에 동조하는 사람에 한해서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정신을 그대로 보이신 분이 누굽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본받아서 그 마음으로 행동하시고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속죄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편에 서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마음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가 곧 나의 질투가 되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에 동조하지 않고 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하십니까? 여러분에게 그 질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질투로 찔러 죽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여러분 안에 소리 없이 존재하고 있는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비느하스의 입장에 서서 여러분 자신을 창으로 찔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자세로 여러분 자신과 싸우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점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점령되어 갈 때 하나님의 평화를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보이는 것에 매여 살아가는 자신을 정죄하면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만 바라봄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