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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군대 (민 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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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군대(민 26:1-4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뭔가 특이한 단체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습니다.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의 일을 겪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무서운 일을 겪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그처럼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다루십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드시고자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쫓아낼 만한 나라로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군사 훈련을 시켜서 힘이 강한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죄를 경고하고 그들의 죄와 싸울 수 있는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세상의 죄를 경고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필히 요구되는 것은 이스라엘은 세상과 같은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죄에 빠져 있으면서 세상의 죄를 경고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죄를 경고하기 전에 오히려 먼저 자신이 경고를 받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이스라엘이 세상과 같은 죄에 빠져 있을 때 가차없이 그들을 징벌하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오늘날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한사람 한사람은 우리들 신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모델로 앞세워서 이스라엘을 때리시고 가르치시고 경고하시고 교훈 하시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스라엘 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죄를 경고하고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단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교회가 먼저 죄를 알아야 하고 죄와 멀어져야 하고 죄에 대해서 경고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새이스라엘이면서도 세상과 같은 죄에 빠져있는 모습에 대하여 경고를 받고 그로 인해서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멀어지면서 세상에서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인 우리들은 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로서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개인의 일에 푹 빠져서 바쁘다는 핑계만 내뱉은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이면서 신자답지 못하고 교회이면서 교회답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솔직히 표현하자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경고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똑같은 죄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 신자들의 솔직한 모습인데 그런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욕심 내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가난해도 정직하게 살고 낮은 자리에서도 기뻐하며 삽시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호화로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수입한 돌을 처바르고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혈안이 된 수많은 교회들이 과연 욕심 내지 말고 살자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힘을 잃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자로서 세상의 죄를 경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도 같은 모습이기에 말을 할 수 없는, 신자로서의 가치와 힘을 잃어버린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혼자 천국가면 다 되는 곳이 아닙니다. 신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자로서 세상을 경고하는 자가 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처럼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상한 것은 신자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의 태도나 세상이 교회로부터 경고를 받을 때의 태도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마지막을 외쳐도 세상은 눈하나 깜박하지 않습니다. 멸망에 대하여 무척이나 대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지금 나중 일에 대하여 신경 쓰고 관심둘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바쁜 일이 태산인데 어떻게 나중 일까지 신경 쓰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떠합니까? 똑같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바쁘게 삽니다. 바쁘게 사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바쁘다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세상과 똑같이 마지막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교회에 와서 경고를 들을 때도 단지 간섭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바쁘다는 것이 굳이 직장을 다니고 공부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바쁩니다. 그들에게는 교회보다는 데이트하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더 급합니다. 고전 7:33절에 보면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나누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두어야 할 관심이 온통 아내에게로 쏠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바쁜 것입니다. 시집간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바쁩니다. 관심이 아내와 남편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세상을 경고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진리와 의로 하나되어야 하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다른데 관심을 둔 채 교회에 와서는 안되고 다른 것에 욕심을 두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진리와 의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교회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면 찾아오고, 노닥거리고 시간 보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을 경고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진리와 의로 하나된 단체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둘아 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부터 이런 마음인데 그런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서 마지막을 경고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죄를 경고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말로 싸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싸움꾼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마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민수기는 1장부터 이러한 정신을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민수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맨 먼저 말씀드린 것이 이스라엘은 싸움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는 오늘 본문과 같이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2,3절을 보면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군대대로 계수하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각 종족의 두령과 계수한 숫자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같습니다. 5절부터 계수한 숫자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민수기를 시작하면서 숫자를 계수하라 하시고 또 26장에 와서 다시 숫자를 계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는 시각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국가로서 출발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다워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과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민수기 1장에서 숫자를 계수하는 것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살아야 군대다운 군대가 될 수 있는가를 광야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1장에서부터 25장까지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원망과 반역 등 모든 모습들은 하나님이 군대다운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은 군대에서 제외되는 것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보다 26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가 적습니다. 전체 이스라엘로서는 1720명이 감소된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염병 후에'라고 합니다. 즉 26장에서 계수된 사람들은 염병을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만 기업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숫자의 변동사항은 하나님이 약속한 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떠난 후 수많은 불평과 원망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동기는 모두가 자기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살아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런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원망이요 불평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가나안의 모습으로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군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쫓아내야 할 이스라엘이라면 당연히 그들에게는 생존을 앞세우는 모습은 허락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생존이 아닌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내면서 생존을 앞세웠던 사람들은 군대에서 제외됩니다.

그런데 군대라는 것은 적이 있어야 생깁니다. 싸울 상대가 없는 군대란 전혀 불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싸워야 할 대상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나라를 핍박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원수요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3:8절에서 발람이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은 자를 저주하는 자체가 곧 하나님의 원수여 하나님의 저주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누구든 교회를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시는 단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언약백성으로서 가져야 자세를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저주는 그들 안에 임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자세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의 군대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축복한 그리스도의 몸을 핍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내부를 치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세상을 경고해야 할 군대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먼저 이스라엘 안의 세상의 죄의 모습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갑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까만 생각하지 먼저 우리의 내부를 치시는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치십니다. 우리 안의 죄를 먼저 제거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대다운 모습은 자신은 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을 때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놋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는 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군대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안다는 것은 '나는 이제 내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군대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교회가 군대로서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교회도 생존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교회부터 하나님의 원수로 나서면서 어떻게 세상에 죄를 경고하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부터 십자가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싫어합니다. 오직 생존의 문제가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를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말씀이 존재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내부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과 싸우면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싸우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행여 생존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와 싸우며 살지 않습니까? 교회는 분명히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는 군대인데 교회로 모이면서도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확보하고자 싸우는 것은 아닙니까?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닫아버리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라고 하나님이 선택해서 부르신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경고하라고 부름 받은 단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군대로서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군대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세상과 똑같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세상에 대해서 아부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오히려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합당하지 않는 것은 군대에서 제외됩니다.

여러분이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군대로서 필요한 모습을 갖추고 살아갑니까? 군대로서 필요한 모습은 죄를 안짓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겪었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하고, 어린양의 희생을 아는 마음이 필요하고, 비느하스 때문에 염병에서 살아남으로서 나도 죽어야 할 죄인이었음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을 동원해서 내 생존의 문제를 내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적의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먼저 자신부터 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은 포기한 채 오직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으로 살고자 힘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가나안의 모습을 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곧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십니다. 세상에서 죄를 경고하고 진리와 의를 드러내는 군대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교회로 부르셔서 우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합니다. 생존의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자꾸 생존에 도움이 되는 쪽에 고개를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저주하고 있는 모습임을 아십니까?

이래도 아무 생각없이, 진리와 의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교회로 오시겠습니까? 바쁘다고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외면해 버리시겠습니까? 교회 나오신다고 군대 된 것은 아닙니다. 군대다운 군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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