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찌르는 가시 (민 33:50-56)

첨부 1



찌르는 가시 (민 33:50-56 )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당신은 필요 없는 존재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가치 있고 인정받고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느 곳에도 필요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없을 때 일이 잘 안돼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면서 쾌감을 가지게 되지만, 반대로 자기가 없는데도 일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잘되어갈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있나?'라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퇴직을 당하는 직장인들의 가장 큰 절망감도 역시 자신이 회사에서 필요치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노상 하는 얘기도 '나는 이제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입니다. 그래서 노인분들이 모여 폐지를 주워서 이웃을 돕거나 청소를 하거나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의 가치는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 자인가?'라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되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럴 때 많은 분들은 신자의 가치관을 열심히 하고 많이 하는 것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신자는 자신을 가장 가치 없는 인간으로 보는 신자입니다. 자신을 가장 가치 없고 무능한 인간으로 보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가치 있는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나는 가치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가치 있는 신자가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행동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신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만 내세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본질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인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식층이고 소위 고위 종교계층의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인 죄인, 세리, 창기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고 자기 소유로 삼아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는 자들을 환영하신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신자가 왜 세상에 있어야 하느냐?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반문입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을 해야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이 안하면 안할수록 하나님의 일은 그만큼 손상을 입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정을 하고 아부를 해야할 판입니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자님, 제발 내 일좀 해주세요'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일 해줄테니까 복좀 줄래요'하면서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때문에 뭔가 일이 잘돼서 기분이 좋으면 이것저것 열심히 하게 되고, 일이 잘안풀려서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던 일까지 팽개쳐 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기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되거나 미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신자로서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 혼란이 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도대체 나는 뭐냐?'는 자신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려지면서 발생하는 혼란입니다.

특히 선교단체들이 이런 혼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기 단체의 존재가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두고 있고, 하나님의 일이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 '당신의 단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이 말에 반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단체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고, 또 열심히 성경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말이 이해될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은 자기들이 더욱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해주는 것이고,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함으로써 자기 선교단체의 가치를 높이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해서는 안되고 꼭 존재해야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가치를 두는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다면 신자는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분명히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남겨두시고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할 일은 '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대한 봉사이고, 충성이고, 전도이며, 헌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기도 응답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은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은 내 봉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봉사를 기뻐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 헌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받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망각하고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될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가치 두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상이 안돼는 것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우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우상이고 남편도 우상이고 아내도 우상이며 심지어 교회도 우상이고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도 우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소망과 상식과 가치관을 혼합해서 제조해낸 가짜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출 20:5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를 위하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상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위하여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부처나 마리아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형상입니다. 예배당 건물도 형상이며 예배 의식도 형상입니다. 따라서 예배당 건물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예배의식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떨 때입니까? 자기를 위할 때입니다. 형상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 형상인데 어떻게 형상을 없앨 수가 있습니까? 다만 자기를 위한 형상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상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잘 기억하시면서 본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요단 가 모압 평지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전에 중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52,53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거부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나 무당이나 점치는 것들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일이 잘되겠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응답을 위해서 온갖 방법과 기술을 동원하는 것들도 우상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기도의 참된 의미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세계를 이루어 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할들 그것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이미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고, 자기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려고 하고, 눈에 보이는 신비한 현상에 마음 뺏겨서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에게 과연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사람을 다 몰아내고 우상을 부수라고 하는 것은 '이제 너희는 너희들의 생각과 욕망으로 살아온 세계를 벗어나서 나에게 붙들린 채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 세계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의지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세계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고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홍해 앞에서 애굽 군사 때문에 죽게되었다고 울었고,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물이 없다고 해서 불평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그러한 것으로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사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은혜로 사는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보이는 것을 의지했던 가나안 사람과 우상은 크나큰 방해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없애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것이 나에게서 사라지면 금방 죽을 듯이 야단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살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한시라도 세상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친구라는 관계, 친척이라는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식장에 가야할 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에 둘려 싸여 있을 때 복음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되고, 희미한 마음으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결코 우상으로부터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 오랜 세월동안 습관으로 자리한 채 우리를 따라다녔던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우상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 우상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가나안 사람을 모두 쫓아낼 것을 기대하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상을 부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나 습관들이 어느 정도 뿌리깊이 박혀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근심 걱정은 바로 뿌리깊은 습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의 습관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박고 자리하고 있음으로서 온갖 괴로움과 근심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시기하면서 못견뎌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싶고, 미워하는 모든 고통과 번민들이 사실은 우상으로부터 떠나지 못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54절에 보면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뽑힌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산업으로 주시는 방법은 지파의 수에 따라서 공평하게 분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잘한 사람에게 많이 주고 못한 사람에게 적게 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도 많고 적음이 없도록 수에 따라 분배하십니다. 그리고 땅위 위치는 제비뽑아서 결정했습니다. 제비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주어진 기업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다 무너뜨렸을 때 가능한 삶의 모습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할 때 옆의 사람이 얻은 것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나 미움이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습성이 드러날 때 결국 그들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보면서 불평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것을 주셨으면서 왜 나는 주시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의 불공평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똑같이 분배했다고 해서 인간의 욕심이 사라지고 경쟁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공평하게 분배해봐야 불평은 끊이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나는 저 사람보다 열심히 했는데 왜 저 사람과 똑같이 줍니까?'라는 불평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무너뜨릴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셨고,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대로 감사하면서 살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상을 부수라는 하나님의 진짜 뜻은 55, 56절에 숨겨져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신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몰아내지 않았을 때 그 남겨둔 자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가시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거민에게 행하기로 한 심판을 이스라엘에게도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위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포기한 대가는 하나님의 기업이지만, 그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가 바른 인간 되지 못할 때 도리어 우리를 심판해 버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부수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부숴야 할 이유는, 우상이 우리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들고, 분쟁하게 만들고, 원수 맺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뜻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부수지 못한 육체의 욕심이 도리어 가시가 되어서 우리를 찌르고 괴롭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괴로움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우상을 부숴 버리지 못한 결과임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그것이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흐르게 하고, 번민과 고통에 빠지게 하는 가시들은 사실은 여러분들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이 주어진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축복이 아니라 찌르는 가시입니다. 가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의 것을 여러분들에게 두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시가 여러분을 인간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남편이 가시역할을 합니다. 자식이 가시 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찌르게 함으로서 이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너뜨려야 할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괴로움인 것을 알게 하셔서 인간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움을 당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처음에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괴로움의 조건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런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찌르는 가시를 우리 곁에 두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상처도 받고 괴로움도 당해봐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큼 가치 없는 인간이며 믿음이 없는 인간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않게 됩니다. 찌르는 가시로 인해 눈물만 흘리고 한탄만 하지 마시고 믿음을 배우고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