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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레위인 (민 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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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자들의 믿음이 참된 것인가, 거짓된 것인가를 알려면 그 인간이 무엇을 지향하며 사는가를 보면 됩니다. 인간이 지향하고 있는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속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아무리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것이라면 분명히 그 속에는 예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속에 예수가 자리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것과는 절대로 혼합될 수 없는 분입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거룩하시다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직책 때문에 거룩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신분과 직책이 예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거룩이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목사라는 신분과 직책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누구든 목사라는 직책을 얻으면 거룩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분과 직책에 따라서 사람을 달리 대우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신분과 직책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세상과의 구별 그 자체를 가지고 거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동하신 것은 모두가 거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삶을 통해서 거룩을 선포하시고 상대적으로 거룩 되지 못한 세상의 죄를 고발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다면 모두 거룩하지 못한 더러운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룩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거룩하신 분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셨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나와 예수님을 분리해 놓은 채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예수님만의 일로만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한국교회의 크나큰 오류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헌금하는 것으로도 안되고 봉사하는 것으로도 안되고 수 천명을 전도하는 것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는 것 외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단지 예수를 믿으라고만 외치고 있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자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은 세상과의 구별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과 혼합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망하는 자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망하고 철저하게 심판 당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마 3:10). 어느 때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날에 나무를 찍어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한 나무는 불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곧 길이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나를 구분한 채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것으로 끝났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주님의 삶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삶이고 거룩하신 분은 의례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나의 삶은 십자가 지신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곧 망하는 길이고 불에 던짐 받을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나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지 아니면 주님으로 위장한 거짓된 주를 따르고 있는지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진리이며,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나 소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과연 주님이 지상에서 하신 일속에 포함되어 있는지, 또는 선지자 사도들이 하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있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고, 없다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을 상식으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성경만을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적용하는 것도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곧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참된 계시에 대해서 눈이 어두워지게 만들고 엉뚱한 것을 계시로 알게 해서 망하는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귀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참된 계시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교회는 교회의 부흥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당연한 상식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상식을 벗어버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계시만 가지고 생각할 때 과연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나 선지자들이 교회의 부흥을 말했던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국 계시에 없는 것을 가지고 계시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처럼 주장하고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등장되는 인간의 온갖 종교놀이들이 인간들을 망하는 길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향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지향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미련과 애착을 가지게 만듭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세상을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건져내어서 씻고 고쳐가도록 합니다. 이런 인간들 사이에 세상을 버리라고 외치는 자가 등장한다면 그를 죽이고 싶어하고 없애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었을 때 그 기업에서 다시 레위인을 위해서 성읍을 주고 들을 주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단지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한 조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레위인들이 어떤 기능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자신 스스로를 점검하고 배우면서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을 폭로자, 또는 고발자의 기능으로서 이스라엘 속에 자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기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레위인을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을 드러내고 고발하게 하시기 위해서 레위인을 이스라엘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을 부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지향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레위인이 이스라엘 속에서 함께 살아갈 때 이스라엘이 불편하겠습니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혹 이스라엘도 레위인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은혜로 살아간다면 레위인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에서 벗어나서 세상에 미련을 두고 애착을 가지며 살아갈 때 레위인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이 레위인으로 인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인을 세상 속에 두신 것은 '저 사람을 보니까 내 믿음은 믿음이 아니구나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구나'라는 기분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끄럽게 만들려고 레위인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어두움으로 하여금 '너는 진짜 어두운 존재다'라는 것을 고발하고 폭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 속으로 보내신 것은 바로 레위인을 이스라엘 속에 있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분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부끄럽게 하시고 죄를 고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신 첫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 곁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분과 가까이 하려고 하면서 환영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슬슬 피하면서 될수록 멀리 떨어지려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멀리 떨어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까이 할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상은 깨끗한 존재를 싫어하고 밀쳐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가까이 하는 예수는 자기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를 도와주는 마귀가 만들어낸 가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교인들은 자기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는 말을 싫어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전하는 교회를 싫어하고 거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의 더러움과 죄를 감추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밀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곧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주했을 때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타락한 인간이며, 나쁜 인간이며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세워두시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인생과 우리의 인생을 비교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 제대로 산 인생인가를 알게 하셔서 옳은 인생을 따라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대로 된 인간을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 앞서서 그 역할을 담당할 레위인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레위인은 한 지역에 밀집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흩어져 있습니다. 참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모든 이스라엘이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이스라엘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고 말합니다.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이라는 것은 우연하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장소를 말합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여서 도피성으로 도망쳤다면 그 누구도 그 자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도피성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피난 장소인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레위인이 살고 있는 도피성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이라는 피난처를 만드십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체가 피난처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가령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발생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이라는 정신에 입각해서 바로 살고 있다면 그 살인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도망쳐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도피성 또한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러한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과 똑같이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원수이고 그에게 보복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도피성으로 피할 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인이 거하는 곳에 도피성이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으면서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보여줘야 할 레위인은 철저하게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쪽이 사랑 받는 쪽 때문에 큰 낭패와 손해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상대방을 용서하고 용납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죄를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고통 없이 만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은 도피성이 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레위인 같은 인간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세상을 의지하려고 해봐야 결국 세상으로부터 상처만 받은 채 낙심하고 눈물만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을 자신의 도피성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사랑이 없고 레위인이 없는 세상을 고치고 잘 가꾸어서 자신의 왕국으로 삼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예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도피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도피성으로 삼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자신의 도피성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수모와 고통을 교회를 통해서 위로 받고 보상받고자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로부터 더 큰 고통과 상처를 입게 될 뿐입니다. 교회에도 진정한 레위인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레위인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모든 고통과 희생을 담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레위인이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도피성이 되십니다. 문제는 예수님 앞에 선 우리들이 전혀 엉뚱한 것을 지향하며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기 위해서 달려드는 무리들로부터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상처 주고 무시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기 위해서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멸망 받을 자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이 고발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 설 때마다 여러분의 죄가 폭로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구하며 주님께로 나오십니까? 혹 아니면 예수님 때문에 나의 죄가 폭로되고 정체가 드러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밀쳐내고 피하려고는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상대방의 죄지은 것을 내가 대신 품어주고, 그 사람의 고통 때문에 내가 손해보는 사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레위인입니다. 이 레위인을 여기저기 있게 해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더러운 속을 드러내시면서 '너는 더러운 인간이다 죽어야 할 인간이다'는 것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레위인이 있는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누군가가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있구나'를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받아주는 레위인을 보면서 자신들의 더러움을 깨달아야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레위인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고발하고 지적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레위인에 대해서 감사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 팔 성읍을 주고 그 들도 함께 주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인에게 들을 주라는 것은 단지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레위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레위인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그들을 밀쳐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레위인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은 레위인을 자기들의 모임에서 추방해 버리고 맙니다. 레위인의 생계수단인 십일조를 내지 않음으로서 레위인이 자기들 곁을 떠나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예수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을 지향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때 가장 싫은 것은 자기의 허물을 들춰내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는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목사를 칭찬하고,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목사는 공격을 하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나는 어떻게 사는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불신자 욕하고 남 욕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레위인으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신자는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의 더러움을 찾아가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 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레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는 과연 레위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레위인의 삶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고발당하고 더러운 속이 드러난 것 같이 이제는 여러분이 레위인이 되어서 세상이 여러분 때문에 죄가 고발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레위인으로 살아야 하고 가정에서 레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여러분이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고, 여러분이 가는 곳은 레위인이 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있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살고 자기 자랑으로 살고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런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피해 나오는 사람들의 도피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도피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레위인으로 모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도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결국 누군가를 다시 상처를 입혀서 쫓아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만 지향하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레위인답게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이 있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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