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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증거 하지 말지니라 (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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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위력은 대단하여, 한 사람의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약3:5-10절을 보면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라고 말씀함으로 사람의 입의 파괴적인 기능을 잘 나타냅니다.
적어도 십계명의 제 9계명은 일차적으로 법정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법정에서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목적으로 거짓 증거를 하는 문제입니다. 법정에서 증인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과학적인 수사가 어려웠던 고대 사회에 있어서 증인들의 증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거짓 증거에 대한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우선 모든 법정적인 증언은 반드시 2명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증인들의 증언에 따라 사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잘못된 증언이나, 거짓증언으로 인하여 이웃의 생명을 해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신19;15절은 “사람의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봇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열왕기상 21장은 거짓증거의 위험성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아합은 자기의 별장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났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합당한 가격을 쳐줄테니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않으신다고 거절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나봇의 기업을 빼앗기 위해 취한 행동이 거짓증인을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두 명의 거짓증인을 내세워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증언을 하게하였고, 이것은 곧 나봇을 사형에 처해지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에 대해서 보다 철저한 규정을 지켜왔습니다. 가령 두 명의 증인은 반드시 각각 다른 장소에서 증언을 해야 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사람이라도 다른 증언을 하면 모든 증언은 무효가 됩니다. 또한 증인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재판을 받는 사람과는 어떤 형태로든지 관련이 없어야 합니다. 가령 원한관계, 채무 관계, 혹은 친인척관계, 인격이 의심되거나, 도벽 등 범죄에 연루된 사람등은 법정인 증인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법정에서의 거짓증거의 대가 또한 매우 중했습니다. 신19:18-21절에는 “그 형제는 훔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고 말씀하여, 거짓증거를 한 사람에게는 그 거짓증거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주려던 형벌의 무게만큼 죄를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 증거로 인하여 사형에 처해지는 죄였다면, 거짓증거를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동해복수법(Lex Talionis)의 원리입니다.
기본적으로 제9계명은 정직한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이웃에 대한 거짓 증언이 난무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안전을기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진실됨은 공동체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영역입니다. 거짓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가로막는 가장 일반적이고 무서운 죄악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아울러서 제 9계명은 우리에게 모든 형태의 거짓된 말을 제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부정직한 말입니다. 거짓말, 허위 사실을 알리는 것, 악한 마음으로 중상모략하는 것 등입니다. 먼저 지적해야할 것은 성경전체를 통해서 거짓말은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 즉 부모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등에 대해서는 그 죄악의 중요성을 곧장 인정하지만, 실제로 다른 죄악들에 비해서 거짓말은 훨씬 더 그 죄의 무게를 작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의 문제는 종종 죄의식없이 거짓말을 하고 지내는 상황을 도출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원리적으로 볼 때 거짓말은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며, 거짓말은 공동체의 안녕과 공동체의 정의를 구현해가는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짓말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악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해를 끼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누가보다도 죄악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둘째는 익살스러운 형태의 거짓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판단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양치기 소년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농담이었어요”라고 말함으로 거짓말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잠28:18-19절은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농담이었다고 말하고는 넘어가려는 경우에 대해서도 성경은 반대합니다. 이처럼 제 9계명은 엄숙한 문제인 것입니다. 웃음은 건강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 웃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형태의 거짓말은 필요에 의한 거짓말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웃의 유익을 위한 거짓말,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 등이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이는 이웃을 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을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십계명의 제 9 계명을 범한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주저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계 제 2차 대전때의 일입니다. 유대인들을 색출하려는 나치에게 유대인을 숨겨주고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우리 집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제 9계명을 지키는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라합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정탐꾼을 숨겨주고는 그들을 잡으려고 온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제 6계명을 범하는 죄는 아닐까요?
성경은 거짓은 어떤 형태이든지 진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요일2:21). 이 때문에 어거스틴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현재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영원한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선의의 거짓말의 문제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전체의 문맥적인 고려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기록되었다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문자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 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맹세도 해선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또한 선의의 거짓말 즉 필요에 의한 거짓말에 대해서도 오픈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시대 십브아와 부아라는 히브리 산파는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성경을 그런 행위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다고 말씀합니다(출1:15-21). 라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의 거짓말하는 행위를 두고 히11:31절은 그녀가 정탐군들을 평안한 가운데 영접했다는 것을 믿음의 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을 한 것인 칭찬받는 본질적인 제목은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은 어떤 행위가 있는 믿음인데(약2:25) 그것은 선의의 거짓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선 혹은 침묵의 문제는 훨씬 더 회색지대에 해당합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이 잘못되게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뉘앙스의 말이나, 혹은 잘못된 이해로 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교정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들도 고려해야 합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등의 경우이겠지요. 어떤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도 포함됩니다. 가령 인사말같이 “식사하셨어요?”라고 말했는데, 안했다고 하면 또 어색할 것같고 부담도 될 것 같아서 밥먹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동기도 선의의 거짓말의 동기도 아닌 경우입니다.
또한 공손의 거짓말도 있습니다. 거짓말하려는 동기로 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이고 존중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는 예의바름에 대한 일반적인 풍습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속이기 위한 동기라기보다는 에티켓으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전통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해선 안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의의 거짓말의 영역을 넓혀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선배들이 선의의 거짓말조차도 거부하였던 전통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식의 경우론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제 9계명을 지키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극단적인 상황(Dire circumstances)에서만 허용되어야 합니다. 이 극단적인 상황은 단순히 우리가 거짓말을 함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경우는 매우 제한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쟁이나 나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의 문제일 경우나 매우 극단적인 필요의 상황일 때만 허용되어야 합니다. 제9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동일한 무게를 가진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사회적인 범죄요, 자신과 이웃을 죽이는 범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정치인이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진리는 바로 설지 모르지만 덕을 세우지 못하고, 반대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112문은 “하나님의 뜻은 아무에게도 거짓증언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지 말며 잡담이나 비방하지 말고 정당한 이유없이 또는 사연을 들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정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거짓말이나 모든 위증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은 악마가 사용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초래합니다. 오직 진리를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선한 이름을 보호하고 드높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9계명의 정신을 잘 표현합니다. 거짓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게 만드는 것 또한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원리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이웃의 명예를 보호하고 높이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형태의 거짓말을 말할 때가 되었습니다. 레5: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보고 증거해야할 것을 증거하지 않는 죄도 동일한 거짓증거의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방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 증거하지 않는 죄도 동일하게 거짓증거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자들이 주님의 제자들이며,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동일하게 신약시대이후 ‘순교자’라는 의미를 포함하였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았기 때문에 증거하는 사람을 순교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고, 그것을 증거해야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이 복음을 온전히 말하는 것이야말로 제 9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아무도 거짓말하지 않고 일생을 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악의에 찬 거짓말도 했을 것이고, 혹은 심각한 죄로 간주하지 않고 가볍게 거짓말을 하면서 지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먼저 이 시간에 매우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거짓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길 바랍니다. 살인하는 것, 간음하는 것, 도적질하는 것과 동일한 무게의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길 바랍니다. 모든 거짓의 아비는 마귀입니다(요8:44). 반대로 우리 하나님께는 진리만이 있으며, 그 분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오직 참된 것을 말해야할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사람은 저마다 하루에 약 3만마디 정도의 말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그 말들 중에 나의 말은 얼마나 이웃을 더 존중하고 세워주며, 진실된 것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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