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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앞에 놓여진 안식 (출 20:8-11, 히 0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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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계명과 관련해서 우리는 많은 혼동 속에 있습니다. 주 5일제의 시행으로 인해 안식일에 대한 개념의 이해가 다시 논쟁 거리로 부각되어 있기도 하고, 안식일은 토요일인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고 있는지, 그러면 제 4계명은 폐지되었는지 등등에서 시작해서, 심지어는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식일 법은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 곧 창조 질서가 세워질 때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율법의 완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폐지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안식에 인간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안식일 준수의 근거를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자유와 관련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된 생활로부터 자유케 하신 이후에 주신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명기 5장에 언급되는 십계명에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근거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출31:13;레19:3).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영화롭게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모든 율법은 자유케 하는 율법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율법의 기본적인 동기는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여러 가지 조항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속박하고, 공포정치(?)를 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안식일 법도 이해되어야 합니다. 확실히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배푸신 축복이며, 자유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무너지는 곳이면 어김없이 안식일 준수도 무너지는 것을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구약 성경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축복의 장이며,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을 듣는 날이었고, 성공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적 전통이 자리잡은 포로 후기에 와서 안식일은 율법주의화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금하신 것을 장로들의 유전을 통해 여러 가지 목록을 작성해서 지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안식일의 의미는 상실한채 율법적으로 사람을 속박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셨는데, 그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질서에 의한 것이든, 출애굽에 의한 것이든 안식일의 제정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의 날을 축제의 날로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율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하는 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과 베푸신 자유에 대해서 기뻐하며 축제하는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식”은 하나님께서 일주일 중의 하루에만 의도하셨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지킨다고 해서 다른 엿새 동안은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하여 날과 절기에 대한 율법적인 조항들은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골2:13-17절은 그림자는 물러가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셨고, 그로인해 우리는 날과 절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확증합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안식일은 이제 완성되었고, 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하루 즉 주일을 제정해 둔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고백이 신약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록 몇 군데 주의 날에 대한 언급들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법을 세울 정도로 근거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는 아무런 갈등없이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노동을 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에도 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자기의 생업을 계속하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터툴리안이 어떤 열심있는 사람들은 주일에까지 일을 쉬기도 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2세기까지는 주일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회적인 약자로 존재했던 기독교가 자신들의 절기인 주일을 쉬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안식일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 권위가 흘러 나왔음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의 규정과 정신, 4계명의 보물을 캐내듯이 주일을 준수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곧장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2세기 초반의 글들 속에서 “Sunday'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으며, 주후 200년 경에 터툴리안이 쓴 글에는 ”the holy Lord's day'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 성수는 처음 시기부터 매우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던 것이며, 주일 성수는 안식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표징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구약의 율법의 완성의 의미를 부여함에 있어서 다른 율법들은 폐지 또는 의미의 전승이라는 개념이 가능했지만, 실제 안식일은 그 날을 계속 지키는 한에는 그 의미의 완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날이 현실적으로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1. 주일은 축제의 날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기본적인 개념은 기쁨과 축제라는 사실을 다시 지적하고 싶습니다. 전통적으로 주일에는 이런 일을 해선 안되고, 이런데는 가선 안되고, 이런 것은 보아서는 안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있어 왔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우리의 주일 개념의 초점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의 전통위에 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유케 하신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경배하는 날이기에 가장 즐거운 축제의 날입니다. 주일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누릴 진정한 안식을 내다볼 수 있는 천국 축제의 날입니다. 할 일과 하지 못할 일 등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들입니다.
2. 주일 성수는 신앙고백의 표입니다.
구약시대에 일주일에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사회는 굉장히 단순한 사회였고, 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노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차례씩 모든 노동력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고대 사회로 볼 때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매주 휴식을 하도록 한 고대 사회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쉴 수 있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표징입니다. 만나 사건을 보면 더 이해가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매일같이 내려주셨습니다. 많이 거두어도 하루가 지나면 먹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만나의 핵심 메시지는 매일같이 하늘 양식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앞두고는 이틀치를 거두었고, 안식일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일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모든 육축까지 쉬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없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3.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을 드러냅니다.
구약 시대 노동자들은 일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노동력의 착취가 애굽에서의 생활이 아닙니까! 이제 자유함을 얻은 이스라엘은 심지어 이방인과 나그네들, 육축에 이르기까지 모두 쉬도록 합니다. 주인만 쉬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들과 종들까지 쉬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은혜로 자유를 얻었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의 상황(재력, 권력 등)에 관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쉼으로 인간이 노동 혹은 다른 가치와 대체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을 했는데, 다시 쉼없이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일의 노예가 분명합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 쉼없이 달려가는 것은 자신이 재물의 노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쉼없이 달려가는 것은 자신이 지식의 노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사람은 안식일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들 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그것들 위에 여러분의 가치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학교 시험과 학원 생활 때문에 주일을 포기하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은 종의 신분으로 돌리는 것이 됩니다. 지금은 학점이 되겠지만 나중에는 직장이 되고, 그 후에는 레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존엄성을 주일성수를 통해서 고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주일은 연합을 누리는 날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주셨기에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달력위에 있는 다른 날들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숙제와 시험으로부터, 여행과 레져등과 같은 일들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예배 공동체에 두어야 합니다. 주일은 성도의 연합을 체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가족들이 주일 내내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옆에 있는 지체들의 얼굴을 돌아보지 못하고 단지 예베 의식만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진정으로 구속받은 공동체의 이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예배의 공동체성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부족한 점들은 보완하기 위해서 기관과 부서모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또 다른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주일에는 오직 주의 일을 위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은 주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밝힙니다. 소교리문답 제 60문에 대한 답을 “안식일은 거룩하게 하려면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모든 세상의 업무와 오락까지도 끊고, 그 날을 종일 거룩하게 쉬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로 그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다만 부득이한 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드려야 할 시간만큼은 예외 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업무와 오락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배와 함께 하나님의 일로 시간을 보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들의 일주일간의 생활과 시간계획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엿새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들만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놀다가, 주일에 공부하려는 사람은 주일을 지킬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 엿새를 투자해야 합니다. 또한 주일에 할 수 있는 일에는 부득이한 일, 자비를 베푸는 일, 그리고 종교적인 일이 포함됩니다. 부득이한 일이라 함은 경찰, 소방서, 전력공사 등등의 일이고,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 함은 의사, 간호사 등의 일입니다. 종교적인 일은 교회의 사역자들입니다. 이런 예외 규정은 오늘날 더욱 더 필요한 부분입니다. 고대사회는 농사문화였기 때문에 규정이 많을 필요는 없었지만, 오늘날은 사회가 너무나 다변화되었기 때문에 그 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 중심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어야만 합니다. 재물, 명예를 수단으로 주일에 위의 일을 하는 것 또한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피할 수 있는 길 또한 있음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를 중심에 두고 직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일이라면 그 안에서 주일 성수를 위해서 다른 부분을 희생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축복이며, 의무인 주일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소교리문답 103문은 우리가 4계명을 지켜야할 의미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예배적인 활동들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인식하는 것과 함께, 성령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세상의 힘겨운 일과 악으로부터 벗어나 이생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우리 앞에 놓인 영원한 안식을 내다보며 미리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위해 많은 것들을 투자하고 헌신하려는 결단을 하십시오. 이렇게 굳은 신앙 고백을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진정으로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강화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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