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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담의 비유 (삿 0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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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옛날 구약시대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해 해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대담하게 일어나서 가서 위대한 군대와 나가 싸워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걱정 말고 나가 싸워라' 그러자 이 사람이 '하나님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난 도저히 못 믿습니다. 내가 오늘 저녁에 양털을 준비해서 그것을 마당에 놓겠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일 아침에 마당에는 이슬이 없고,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는 것으로 믿겠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됐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마당은 거칠거칠하게 말라있고,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요. 오늘 저녁에는 양털을 갖다 놓는데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마당에만 좀 이슬이 있게 해 주십시요.'

아주 그냥 배짱 좋은 친구입니다. 하나님하고 흥정을 하려는가 봅니다. 그 다음날 아침 새벽에 나가보니 마당은 촉촉이 젖어 있는데 양털에는 이슬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흥정을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미디안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백성들을 불러 모았더니 3만2천명이나 모아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미디안과 전쟁을 하는데 두려운 사람을 집으로 돌려 보냈는데 2만2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9천7백명을 보내고 300명만 데리고 가서 왼손에는 횃불, 오른손엔 나팔 들고, 미디안 군대와 싸워서 전과를 이루었는데 적의 인명 피해 는 셀 수 없다고 나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기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여룹바알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기드온의 아들이 70명이라고 합니다. 장가를 여러번 간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장가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라는 사람은 축복을 참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요즘에는 이렇게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능력을 기드온에게 보여주시고 이렇게 장가 많이 간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사기 8장 22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 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들은 왕이 못되어서 안달인데 말입니다.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하자 국민들이 다 와서 왕으로 추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나는 당신을 다스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아들들도 당신들을 다스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기드온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뭔가 달랐습니다. 기드온의 아들이 70명이나 되는데 이렇게 아들이 많다 보니 그 중에 한 명 정도는 잘못된 아들이 나올 법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잘못된 아들 한 명이 드디어 등장을 합니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는 이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등장하여 자기 형제 70명을 모조리 다 몰락시켜 버렸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며 이복형제들 70명을 다 한꺼번에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70명의 형제중에서 제일 막내아들 한 명이 살아났는데 그 한 명을 통해서 성경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어져 갑니다. 그 기드온의 제일 막내 아들의 이름이 요담이라는 아들입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형제를 다 죽이고 왕이 되자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이때가 요담이 몇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산꼭대기에 올라 사사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요담의 비유라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감람나무에게 나무들이 찾아갔습니다. '감람나무여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옵소서!' 감람나무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영화롭게 하는데 내 어찌 이것을 버리고 다른 나무들 위에 가서 요동하리요'

그러자 이번에는 무화과 나무를 찾아갔습니다. '당신이 우리 나무들의 왕이 되어 주시오' 그랬더니 '나의 단것과 아름다운 것을 버리고 내가 어찌 나무들 위에 가서 요동하리요'

이 나무들은 다시 세 번째 나무 포도나무에 찾아갔습니다. '포도나무여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소서' 포도나무가 말합니다. '나의 단 것 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 새 술을 만들어 내는데 내가 이것을 버리고 어찌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거절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 찾아갔습니다. 가시나무에 찾아가서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소서' 했더니 이 가시나무가 하는 말이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나의 왕을 삼겠
거든 와서 내 그늘아래 거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
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으로 유명한 요담의 비유는 끝이 납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나무가 등장합니다. 네 나무가 등장하지만 두 종류의 나무가 등장합니다. 한 종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종류는 가시나무입니다. 여기서 가시나무와 포도나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는 아비멜렉의 칼에 죽은 70명의 이복 형제들을 말하고 가시나무는 자기 형제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 왕을 상징합니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내 어찌 이를 버리고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버리고 내 술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내가 어찌 이를 버리고 사람들 위에 다른 나무 위에 가서 요동하리요' 이렇게 세 개 나무는 고백 합니다.

여기서 성경 말씀을 잘 보면 이 세 나무들이 고백하는 것에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가지 모두 '나' 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나의 실과 나의 단 것, 내 술. 이런 '나'라는 것이 등장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하나님이 등장하고 사람이 등장 합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나무의 모습에서 나의 기름, 나의 단 것, 나의 새 술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상을 이러한 말씀속에서 추측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섬깁니다. 이웃을 섬깁니다. 섬기면서 하나님을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요동한다' 는 말로서 설명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내 그늘 밑에 와서 피하라. 내 밑으로 오너라'라고 정반대의 사상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JOY란 단어를 아십니까? 이것은 영어로 기쁨이란 뜻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J-Jesus 예수님, 그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가 O-Others 다른 사람들, 세번째 Y-You 당신, 그러므로 첫 번째가 예수님이요. 두 번째가 내 이웃, 다른 사람들이요. 세 번째가 '나' 라는 이 등식이 성립되어야만 JOY라는 기쁨이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러한 개념을 요약해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새 계명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 나무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위에서 죽어간 아비멜렉의 다른 형제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는 사회에서 찾아 볼 수가 없고 사회 뿐 만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이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도 이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아타까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도 내 스스로를 위해 살고 내 가정, 내 식구만을 위해서 살아 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그러한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문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 밑에 들어가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모든 사회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사사기 9장 5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서 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아비멜 렉이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 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 하노라 소년이 찌르매 그가 곧 죽은 지라』 두골이 깨뜨려 져서 비참하게 죽었음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요담의 비유는 권력을 부리다가 비참하게 죽은 몇몇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하신 말씀입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들을 들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세겜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중에 있는 족속을 말합니다.

그 시대의 사회는 그 시대의 종교이상 발전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이상 절대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 할 수 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했는데 빛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는 나의 본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해서라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이 사회의 어둠과 같이 맞장구 쳐버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고 한국교회라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말씀으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내가 나의 삶의 목표요. 우리 가정의 삶의 목표입니다. 열심히 벌어서 남에게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말씀이 맞는 말씀이지만 마음대로 안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다 안됩니다. 성경말씀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죽고 내 이웃을 살린다는 것은 참 힘든일입니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과 이 말씀을 믿는 우리들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내 이웃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 어떻게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서 삽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죄된 모습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러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도저히 말씀가운데서 지킬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게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오직 권능을 받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내 스스로는 못했는데 성령께서 나와 함께 역사하여 주셔서 나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뒤집어 놓으면 이제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오직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의 주위의 환경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나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위의 것들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시대는 상대방이 변하라고 화염병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 화염병을 내 자신에게 던지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내 마음 문 속에다 화염병을 던지길 바랍니다. 화염병을 남에게 던지기에 앞서 내 자신에게 던져서 불을 지릅시다. 성령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길이 내 마음속에서 타오를 때 어쩐지 조금씩, 조금씩 나의 생각이 변하고 나의 마음이 변하고 나의 행동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내 자신이 이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놀라운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성령이 역사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서 점점 천국의 백성이 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것을 소망하며 그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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