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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느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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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느 1:1-4)

제가 며칠 전에 시카고 지역에 새로운 목회지를 정하고 사역을 시작하게 된 두 분의 목사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분은 40세이셨고, 한 분은 37세 되신 비교적 젊으신 목회자였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목회의 방향과 자신의 목회에 중점적인 사역을 소개받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 모두 2세 목회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목회의 포커스가 1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의 중심인물인 2세에 그들의 목회를 자리매김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사실 2세 자녀를 다 두신 우리 성도님이시지만 참 쉽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기르면 좋을까요? 어떻게 가르치면 좋은 인재로 성장하며, 어떻게 해야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방법을 찾습니다. 문제 상황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2세 교육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비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포기하고 뒷전에서 방관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모두가 비관적인 방관자나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 분석하고만 있는 사람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The God of heaven will give us success.' 느헤미야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 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용감하게 그 일에 뛰어들어 해결해보려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옛적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되돌아갑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단일 왕국이 분열되어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으로부터 멸망 받아서 바벨론 포로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뿐만 아니라 남의 나라에 잡혀가서 살게되는 고통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력했던 바벨론도 몇 십년이 흐른 후 새로운 강대국 페르시아에게 멸망받고 말았습니다. 그 포로중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가야였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고통스런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포로생활을 지나면서 그가 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는 완전한 2세입니다. 여러 가지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지만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페르시아 왕궁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2장 1절을 보면 그가 술관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고대 왕궁의 술관원은 왕에게 가장 신임받는 사람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에게 바쳐지는 모든 음식과 특히 술의 맛을 미리 보아 왕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잠을 자는 곳을 보호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가장 왕의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믿음직한 사람, 속임이 없는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미국 텔레비젼의 프로그램중에 Prime Time Live 라는 것이 있습니다. 1992년 11월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두 사람-한 사람은 흑인이고, 한 사람은 백인-에게 한 달 동안 St. Louis에 가서 마치 그 곳에서 새로운 직장과 집을 구하려고 이사하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동일한 배경을 가진 것으로 말하기로 했습니다. 말하자면 대학도 같은 대학 졸업, 경험도 동일한 것으로, 여러 가지 자격요건도 동일하게 말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몰래 카메라를 찍으면서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을 구하는 데도 카메라가 따라가고, 차를 사는데도, 아파트를 얻는데도 함께 따라가면서 취재한 것입니다. 모든 취재를 끝냈습니다.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단지 피부색하나 다르다는 이유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좋지 않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비데오는 보여주었습니다. 후에 두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습니다. St. Louis의 한달 생활이 어떠했나요? 백인이 대답했습니다. '참 좋았어요. 거기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I could make it here. I like this city)' 흑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일 여기서 산다고 한다면, '악조건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If I made it here, it would be 'in spite of')' 우리가 사는 미국 사회, 크레딧이 없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이 사회도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한 것 같지 않습니까? (CT July 14, 1997)
목회도 그렇고 사역하는 것에도 그렇고, 또한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믿을만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까요? 목회자가 목회에서 성공한다는 말을 제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아십니까? 목회의 성공은 숫자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건축비가 많이 들어간 교회를 건축했는지에 따라서도 성공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얼마나 여러분들에게 신뢰할 만한 목회자가 되느냐에 성공의 여부는 달려있는 것입니다. 숫자가 비록 100명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성도들에게서 신뢰받고 있는 목회자라면 그 목회자는 성공한 것입니다. 목회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관계,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불신의 앙금이 쌓이는 관계에서는 아무리 설교를 멋지게 해도, 아무리 좋은 예배당에서 많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하더라도 그 목회는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제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이 사람만, 혹은 저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신뢰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일어난다면 저의 목회는 성공한 것입니다. 많은 이민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목회자로 일해야하고, 그러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이 불편함과 아픔을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배신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믿어주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의 자녀였지만 왕의 신뢰를 얻게 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통하면 일이 잘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믿을 만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서로 신뢰하는 교회, 여러분 모두가 서로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면 우리의 교회는 엄청난 내적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기도하십시다. 관계가 부서져 신뢰가 사라져있다면 기도하십시다. 그래서 신뢰를 회복하십시다. 제가 여러분에게 신뢰받는 목회자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평신도들이 집사님들을 신뢰하고, 집사님들이 장로님들을 신뢰하고, 제직회가 당회를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지 못할 목회자에게 설교를 듣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장로님들에게서 결정되는 일을 진행해야하는 제직들과 평신도들의 불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느헤미야를 만나보십시오. 그가 가꾸어놓은 신뢰의 밭을 한 번 거닐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맺어놓은 멋진 신뢰의 열매를 따먹어 보십시오. 신뢰없이는 어떤 일도 멋지게 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신뢰만 있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뢰를 일구어 가십시오.
자! 포로 생활 한 지 벌써 얼마나 지났는지요. 생활은 이제 완전히 안정이 되었구요. 어려움없이 지낼 만하게 된 것입니다. 고국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포로 생활 한지 70년 (538 BC) 정도 지나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대민족에게 해방령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 일차 귀환이 이루어졌지요, 그리고 또 다시 13년 후(458 BC)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제 2차 귀환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살 만하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수산 궁에 있던 느헤미야입니다.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동생인 하나니가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2절을 좀더 정확하게 보실까요?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 살렘의 형편을 물은즉' 이게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는 늘 동족의 문제를 안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궁중에 있는 사람인 그였지만, 또한 어려움없이 궁중의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그였지만 그러나 그는 알았습니다.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잊지 않고 있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니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물어보았습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은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남의 형편, 남의 어려운 사정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은 지금 아무 어려움 없이 지냅니다. 심지어 왕궁의 안락함과 그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모자랄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아픔에 민감해 있었습니다. 그 아픔이 그의 가슴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1차 귀환이 아니라 이미 2차 귀환까지 이루어졌다면 더 이상 동족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쪽의 형편에 늘 안테나를 최고로 맞추어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민 2세들의 가장 부족한 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헌신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교회내에서만 한정시켜서 말해 보십시다. 헌신도가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는 열심이고 최선을 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주의 문화의 영향일까요?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자신의 것에는 풍족하면서 남의 어려움에는 인색한 사람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만납니다. 남의 아픔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삶에 우리는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남아있는 지도자'라는 책을 쓴 John Haggai 박사는 지도자의 일곱 번째 원리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무엇을 원하는가? 씨를 뿌리라. 투자하라. 친구를 원하는가? 우정을 쌓는 것에 투자하라. 사람을 원하는가? 사람에 투자하라. 존경받기를 원하는가?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에 투자하라... 투자한다는 말은 남에게 베푸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우리는 베푸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투자인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함께 하면 그 사람이 나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안락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더 이상 챙겨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을 우리는 찾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에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찾고 있습니다. 한 시인이 다음과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것만은 안되지>라는 시 전문입니다. '누가 은근히 알린다/ 이 땅에 올 때/ 그 분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사는 데 그만 빠져/ 그걸 잊어버렸다고// 그로 인해서 그분 앞에/ 다시 서지 못하면/ 그건 안 될 일이지/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 그 곳 형제들을 내 몸같이 여기고/ 하늘에 소망 두라 하신 말씀/ 거역하고 되레 그분이 쌓은 보물/ 헐어버리고 있다면/ 그건 안되지/'-김옥녀의 '그것만은 안되지'-
우리도 그것만은 안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 그 곳 형제들을 내 몸같이 여기고 하늘에 소망 두는 삶 거역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그 분이 쌓은 보물 우리가 헐어버려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남을 돌아보십시다. 남의 아픔에 눈을 돌리고, 손을 펴 보십시다. 교회는 투자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움켜쥐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내 것만 쓰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 투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장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아픔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을 보십시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남을 돌아보는 것 겉치레가 아니었습니다. 그 슬픔의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동안이나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십시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남의 아픔에 눈을 돌리는 교회, 그 헐벗음에, 그 굶주림에 눈물 흘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를 만나서 받아와야 할 가르침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지십시오. 우리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지 않습니까?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이웃이 있고, 목마름에 애타하는 이웃이 있음을 우리의 무관심으로 조금씩 죽어가는 이웃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함께 행복해야하는, 함께 기뻐해야 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있음을 깨달아 보십시다.
프랑스의 여류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의 전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굶주리는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식사를 최대한 줄여서 하다가 영양실조가 원인이 되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녀만큼은 못되어도 남을 돌아보는 작은 손은 우리에게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2-3일 전 신문기사를 읽고 왠지 부끄러워 숨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시카고, 아니 전 미주 지역에 우리의 안타까운 북한의 동포 돕기 운동이 한창입니다. 시카고의 잘 알려진 한 교회에서 북한 동포, 북한의 나의 형제를 돕자고 3만 불을 헌금한 기사였습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어본 느헤미야. 남의 형편을 물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쓰실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그를 통해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느헤미야의 교회가 되어보십시다. 신실한 교회, 믿을 만한 교회, 서로를 신뢰함으로 힘과 용기와 위로가 솟는 교회, 우리의 것에만 매달려 아옹다옹하다가 그 분의 말씀 다 놓치는 교회가 아니라, 굶주림에 괴로워하는 이웃, 목마름에 아파하는 이웃, 외로움에 쓰러진 우리의 이웃에게 넉넉한 손으로 다가가는 교회, 이것으로 인해 더 큰 사역감당하는 아름다운 느헤미야의 교회를 만들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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