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느 02:1-8)

첨부 1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느 2:1-8)
 
요즈음 저희 교회는 증축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위원들이 함께 모여 생각을 정리해 갑니다. 당장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시작되면 헛수고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낭비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조만간 저희 교회의 연차적인 개축 전체 계획이 발표될 것입니다.
준비하는 일은 사실 얼핏 보기에는 전혀 효율적이지 않아 보이고, 일의 진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아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준비없는 사역은 그 열매가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점입니다. 열매가 맺힌 것 같지만 따먹어 보면 시거나 쓰거나 먹을 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공은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 기도의 기간이 얼마정도였다구요? 약 4개월이었습니다. 기슬르월에서 니산(아빕)월까지 4개월 정도의 기간이 흘렀습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의 마음에는 예루살렘의 훼파소식과 유다백성의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4개월동안 또 무엇을 느헤미야가 했다고 생각되십니까?
금식과 기도, 염려로 보내진 4개월로 인해 느헤미야의 얼굴은 수심과 초췌함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이 묻게 되었습니다. '어찌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냐'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답을 주의해 보십시오. 3절을 함께 읽어 보실까요?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느헤미야의 대답에는 분명한 한가지 목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4개월 동안 음식을 절제하고 주님께 부르짖은 것에는 단 한가지 목표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목표, 그것이 너무도 명료하게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목표이었습니다. 성공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목표가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하는 지 명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의 95%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전혀 글로 적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글로 자신의 목표를 적어본 사람들은 그 중 또한 95%가 그들의 목표를 성취하였다는 보고입니다.
제가 이년전에 달라스 청년부 수련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마지막 날 저녁 청년들에게 자신의 미래의 삶-앞으로 30년까지의 삶을 기도하면서 적어서 제출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수련회 다녀온 뒤에 그들에게 다시 메일 해주었습니다. 저도 물론 그때 저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그 계획대로 되어갔습니다. 그 때 적은 계획에는 지금부터 정확하게 4년을 더 공부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 저의 사역을 시작하는데 학업을 끝낸 후 약 25년 정도의 사역 기간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그 기간을 두 교회(사역지)에서만 다 보내고 싶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스톤 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교회에 오면서 저의 계획이 조금 변경되었습니다.
1953년 예일대학교에서 졸업반 학생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제출하게 했는데 겨우 3%의 학생만 그들의 목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1975년 연구조사 결과는 매우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써냈던 그 3퍼센트의 학생들이 나머지 97%의 학생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목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게 세워져 있으면 성공은 우리 삶에 한결 가까이 찾아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의 평균 수명에는 20년 정도의 수면, 6년 정도의 텔레비젼 시청, 5년 가량의 몸치장, 기다리면서 약 3년의 세월을 보내고, 1년 동안이나 별 유익하지 않은 전화통화를 하며, 약 4달 정도가 신발에 관한 일로 소비된다고 합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시간은 가치 없는 일에 거의 다 소모되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 성공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성공은 사전에 준비하고 결정한 가치 있는 목표의 진취적인 실현'이라고 말입니다. 준비하고 결정한 가치 있는 목표가 느헤미야에게 있었습니다. 현재의 신분이 더 높아지거나 더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아픔을 돌아보고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보다 가치 있는 목표를 그는 갖고 있었습니다.
지도자에 관한 영향력 있는 책을 자주 펴내는 쟌 맥스웰은 '열매 맺는 지도자'라는 책에서 우리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데 6가지 지침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지침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목표는 이타적이어야 한다:이기적인 어떤 목표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켜,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큰 목표를 세우라' 느헤미야의 목표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이 아니라 그의 고국에서 신음하는 백성, 무너진 성벽,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주는 가치 있는 목표를 그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있는 목표는 매우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뼈를 깍는 아픔, 번뇌, 희생을 각오한 결단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떠했는지 한 번 보실까요? 본문 2절을 보면, 왕이 수색이 가득한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면서 질문하자 느헤미야가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이런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왕의 음식이나 특별히 술을 관장하는 사람은 왕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수심이 있거나 얼굴에서 어떤 표정을 읽게되었다는 것은 목숨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왕으로서는 당연히 의심이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독살의 위험을 감지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고대에서는 왕의 권력이 극대화되어있던 때라 의심이 드는 그 순간 그를 처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가치 있는 목표를 거두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어도 목표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여기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 재건을 건의한 것은 그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르훔'이라는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그는 사마리아에 있었던 아닥사스다 왕의 신하입니다. 그가 바로 얼마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하여 보고한 사람입니다. '만일 그들이 성벽을 재건하게되면 그들은 필연 당신을 배반할 것이고, 조세도 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받은 아닥사스다는 그의 말대로 성벽재건을 중단하고 허락하지 않는 칙령을 내렸었습니다. 바로 이런 현 상황에서 또 다시 성벽 재건을 논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반역모의자로 오해받게 될 수도 충분히 있는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목표를 세워갔습니다.
가치 있는 목표는 식은 죽 먹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어딘가는 희생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희생의 각오가 없이는 이타적인 목표, 값어치 있는 목표는 세워지기 어렵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무슨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까? 정말 가치 있는 것입니까? 남을 위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계십니까? 자녀를 잘 길러 사회와 교회의 일군으로 만들고 싶은 훌륭한 목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희생하시면서 그것을 실현해 나가시겠습니까? 느헤미야에게서 교훈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목표가 좋아도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 목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더 좋은 하나님의 약속된 땅, 지시하시기만 하는 그 땅을 향하면서 자신의 친척과 정든 고향, 삶의 모든 터전을 희생했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면서 애굽의 안락한 왕궁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첫째가 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더 고귀한 목표를 위해서 차선의 것들은 포기하십시오.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좀 더 안락해지고 싶은 욕망, 좀 더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모두 다 가질 수 있는 행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 가지는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 오니까 성전 개축의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 당회에서 저의 목표를 말씀드렸습니다. 2세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먼저 하게 될 것 이라구요. 감사하게도 장로님들께서 모두 이해해주시고 승낙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들으셨겠지만 이 본당 공사는 이번 개축 공사의 제일 먼저 오는 우선 순위가 아닙니다. 교육관에 대한 투자는 다른 한 쪽-본당 공사를 희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가 희생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입니다. LA 풋볼팀 레이더즈의 쿼러백 Ken Stabler에게 한 기자가 다음과 같은 영국산문 한 구절을 전해주었습니다. '나는 먼지가 되기보다 차라리 재가 되리라. 나의 불꽃이 고갈되어 소멸되기보다 차라리 빛나는 불길 속에 나의 불꽃을 태우리라.' 그리 달갑지 않은 먼지가 아니라, 태워져서 재로 바뀌는 희생과 불길 속에 나를 태우는 희생의 불꽃이 되어야 성공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희생을 각오하고 예루살렘 성 재건을 건의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한 랍비가 6살난 장난꾸러기에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날마다 너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너무나 멋지구나. 그래 엄마가 어떻게 기도해 주시지?' 6살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이 아이를 잠들게 하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기도 않는 성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최소한 하루 세 번 이상은 기도하실텐데요. 그렇죠?
예루살렘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슬픔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자기 백성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예루살렘성의 훼파 소식은 그의 가슴 깊숙히 고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잘 들여다 보시지요.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했습니다. 이 슬픔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장 4개월의 기간동안 어쩔 줄 모르면서 고민했습니다. 본문 1장 1절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은 지 20년 되던 해의 기슬르 월(11월 12월)-데벳, 스밧, 아달월-에 능욕과 훼파의 소식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장 1절에는 그가 왕 앞에 수심 가득찬 얼굴로 만난 때는 바로 (출애굽된 달을 한 해의 첫달로 하는) 니산월(3-4월)입니다. 4개월이 지나간 것입니다.
마음의 참된 동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아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영어로 동정이란 낱말은 compassion입니다. com과 passion이 결합된 것입니다. 아픔을 함께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고통, 아픔을 뜻하는 passion이라는 말은 바로 아이를 낳는 아픔/ 십여개월의 어려움과 낳을 때의 산고를 의미하는 womb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느헤미야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너무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에도 있고,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도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사람이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4절을 함께 보실까요?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합니까? 느헤미야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옵니다. 문제를 보고 아파하라, 울부짖으라, 금식하라, 그리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라! 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병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미국의 폴 브란트가 은퇴할 때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에게 주고 싶은 마지막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을 받은 폴 브란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픔입니다.' 나병은 병의 초기나 중기에조차도 아픈 부위에 통증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상처를 입어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치료하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체의 일부분을 완전히 절단해야하는 심각한 단계까지 가게되는 것이라 합니다.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거대한 상처입니다. 잘라 내어버려야만 해결되는 중병입니다. 아픔은 우리 삶을 일깨우는 자명종입니다. 아플 때마다 우리는 원인을 발견하려고 하며 또한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통은 우리를 그만큼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먼저 아파하는 사람을 우리는 찾고 있습니다. 문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와 아픔을 듣고 우는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에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금식하면서 눈물로 하나님께 울부짖는 성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자녀교육은 불모지와 같다고 말씀드려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통계는 성인 239명, 유치부 17명, 유초등부가 22명 Youth가 명, 한글 청년이 14명, 영어권도 14명이라고 알려줍니다. 어른이 300명을 바라보는 교회에 유치.유초등부가 합쳐서 40명도 안 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젼을 가지고 일해야 할 청년들이 한글권, 영어권 합쳐보아도 30명도 채 못되는 것이 여러분과 저의 아픔이 아닐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아침마다 새벽기도에 우리의 성도들과 함께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교회 청년부가 되살아나게 도와주옵소서.'
2세와 1.5세를 위한 교육이 허물어지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 교회를 아무리 잘 보수하고 증축하고 물려준다 하더라도 받아 누릴 우리의 미래의 주역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투자이겠습니까? 또 다시 어떤 건물로 바뀌고 마는 아픔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문제를 보고 우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평하기보다 울면서 기도하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 모양이냐?' '벌써 이차 귀환까지 이루어졌는데 여태 무엇하고 있었단 말이냐'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수일 동안, 아니 어쩌면 4개월 정도를 울며 기도하며 지나지 않았습니까?
자녀를 붙들고 울어보십시오. 말씀을 들으면서 울부짖어 보십시오. 찬송과 경배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려보십시오. 우리 교회 문제를 보면서 절절하게 울어보십시오. 올바르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 문제를 가지고 눈물을 흘려보십시오. 그래야 일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금식하십시오. 모든 것을 단절하고, 먹는 즐거움조차 사양하고 울어보십시다. 자녀를 부여잡고 울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한탄스럽고 하나님께 죄송스럽고 어쩔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픔 때문에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듣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점잖은 사람만 앉아있는 곳이 아닙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는 곳입니다. 가정문제를 가지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눈물의 기도를 유지하십시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울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해결되는 위로는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지금 예루살렘성의 파괴소식을 듣고, 동족을 향한 아픔을 가지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차 포로 귀환을 이끈 사람은 에스라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방해를 시작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역적모의가 벌어지고 있다고, 성이 건축되면 더 이상 조공도 바치지 않고 세금도 거부하면서 왕에게 큰 손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고소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글을 받은 아닥사스다가 어명을 내려 성 건축을 중단하게 했고 성 안에 있는 기물까지 파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중심 인물이 바로 르훔과 심새였습니다.
이 소식을 느헤미야가 다 들었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금 가장 왕의 신임을 받는 그, 권력을 가지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르훔과 심새를 처리하고 문제 해결에 뛰어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것부터 먼저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울면서 기도하는 일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금식하면서 기도부터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해야 그 일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일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역보다 더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올 때 목회비젼을 적어보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실 제가 목회를 해봤나요, 대단한 경험이 있나요. 참 난감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뭘 써야 하나요?' 사실 여러 좋은 교회가 미리 잘 만들어 놓은 멋진 비젼을 멋있게 종합해서 쓰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쓸 수만은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하고 목회비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 첫째장의 서두부분을 그대로 옮겨놓겠습니다.
'목회 비젼을 머릿 속에 그리면서 가장 먼저 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젼보다 앞서는 것은 그 분께 꿇는 우리의 무릎이다'는 음성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한다''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한마디로 묘사하라면 바로 '눈물로 기도하시는 어머니'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제게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저의 머릿맡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어머니, 다 성장한 저를 붙들고 눈물로, 방언의 기도를 드리시는 어머니입니다. 70이 되신 지금도 밤을 새워 눈물의 호소를 드리는 어머니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님의 기도의 후원이 저를 지금 지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체험 없이는 목회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입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분을 만나 보아야하고, 만져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만나보시겠습니까? 어떻게 만져보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림을 받지 않아도 일은 멋들어지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순서를 제대로 안 것이었습니다. 일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최우선이 아닙니다.
기도는 모든 것의 처음입니다. 저희 교회에 지금 건축이 필요합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자녀 교육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까? 부모님들이여,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 말로만 자꾸 고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엎드려 눈물로 기도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우리 교회의 교육문제를 놓고 울면서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 목회에는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저희들의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그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야 합니다. 환경이 잘되면 교육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미국 땅에 환경이 좋지 않아서 도덕이 무너지고, 교육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해서 자녀를 제대로 못 기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달라스 있을 때에 30대와 청년들에게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주택을 구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여유자금으로 최소한 국민학교만은 자녀를 크리스쳔 스쿨에 진학시키라'고 했습니다. 저는 크리스쳔 스쿨만이 우리 자녀를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기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공립학교에서 배움을 받는 것보다는 더 나은 크리스쳔의 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우리는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를 갑니다. 거기에다 집을 얻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저는 여기에 계시는 모든 성도들에게, 특별히 어린 자녀를 두신 분들께 크리스천 학교에 보내지 못하면 죄책감에 빠지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을 먼저 하십시오. 장난감보다 더 먼저 있어야하는 것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고, 또한 부모가 자녀를 붙들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침대에 누운 자녀의 손을 잡고,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는 자녀를 껴안고 기도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우선 순위에 충실하면 구태여 크리스쳔 스쿨만 고집할 필요가 당연히 없지 않겠습니까? 염려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기도해 주십시오. 교회를 위해서 생각하고 계획하시기보다 기도해 주십시오.
느헤미야는 고통스럽게 울다가 금식하기 시작했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주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우리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셔서 크고 두려운 하나님 그분께 기도해 보십시오. 느헤미야처럼 제일 먼저 자신을 깨달은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나는 그 분 앞에 서기 부끄럽고, 선다면 감히 고개 들지 못하는 죄인으로 서서 기도해 보십시오. 고개 들지 못한 세리의 기도 응답받지 않겠습니까? 크고 두려운 하나님, 저의 죄를 살피시면 저는 꼼짝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 저에게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기도입니다. 개혁의 처음은 기도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증축 문제도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이미 우리는 시작부터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기도해야 제대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경직 목사님의 대한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도전적인 것입니다. 한 미국의 박사가 한국의 영향력 있는 세 지도자를 만나서 한 목사님의 얘기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 중의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번은 당회에서 제가 느끼기에도 심한 공격을 한 목사님께서 받았습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는데, '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제가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것에 대해 좀더 간절하게 기도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일년 내내 당회원 모두가 한 목사님의 현명한 제안을 보고는 결코 한 목사님이 다시 한번 더 거론한 적이 없는데도 결국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역사는 새롭게 쓰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역사도 새롭게 고쳐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충분히 성숙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교회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제가 다시 저희 교회 통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일 낮예배 239명, 새벽기도 연 인원 245명, 비록 한 주간 다 합친 것이기는 하지만 날마다 새벽미명에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는 성도가 이 만큼 있다는 것은 이미 성공을 점쳐두고 있는 것입니다. 제 가슴이 벅찬 것입니다. 물론 더 늘어나야 합니다. 사실 이 시카고에 이런 교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주일 낮 예배 숫자에 눌리는 새벽기도 인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저희 교회 숫자가 500명이 된다면 새벽기도 인원은 최소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501명외 되기를 기도합니다. 숫자에 민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들의 숫자에는 민감하십시오. 저는 새벽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더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변화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만이 개혁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으로 교회는 새로워 질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본문 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중보기도의 중요함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문제만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중보기도팀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남에게 눈을 돌릴 수 있는 기도, 이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은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기도 제목에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아닌 자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 생명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서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제가 저희 교회에 꼭 세우고 싶은 것은 크리스쳔 스쿨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에 앞서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좋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좋은 글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에 의해 쓰여진 책을 읽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알려주는 책들을 우리 자녀들이 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일은 저 혼자, 그리고 제 자녀들에게만 잘 이루어지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저의 자녀들만 아무리 그렇게 훈련받으려고 해도 주변이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자녀들도 그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도 우리를 위한 기도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나를 위해서처럼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이 시카고를 위해서, 미국 땅을 위해서, 우리의 지울 수 없는 고국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느헤미야가 무엇이 답답해서 그렇게 슬피웁니까? 고국에 남겨둔 보물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두고 온 땅 덩어리가 갑자기 몰수되는 고통이 벌어진단 말입니까? 느헤미야는 주 여호와의 종,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릴케의 시중에 <엄숙한 시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지 걷고 있다.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지 죽고 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세상의 정처 없는 자들이 우리에게 걸어오면서 우리의 기도를 사실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도 나를 쳐다보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이북동포들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안타까움이 우리의 중보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에스겔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22장 30절 말씀입니다. 멸망하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중보기도를 할 사람입니다. 중보기도로 역사는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에스겔 시대에 하나님으로 멸망치 않게 기도할 중보자가 없었음이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한 사람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에 의해서도 역사는 바꾸어 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중보기도로도 하나님의 뜻이 바뀌어 질 수 있지 않습니까? 모세, 여기 살아있는 증인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앞에서 중보의 기도, 내 이름을 차라리 지워달라고 기도한 그의 기도로 멸망을 면하지 않았습니까? 시편 106편 23절은 '그 택하신 모세가 ...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중보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확인해보십시오. 원래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이웃을 위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11절을 통해서 보여집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아닥사스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이다'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의 목표를 유의해서 보십시오. 형통하여 아닥사스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도록 해달라는 기도, 얼핏보면 순전히 자신만을 위한 기도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기도입니다. 왜 은혜를 입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는지를 정확하게 보시면 해답은 나올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4개월동안 금식도 하면서 울면서 기도하자 그의 얼굴은 수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왕이 그의 수심에 가득찬 얼굴을 보면서 무언가를 느낍니다. '네가 병이 없는데 어찌 얼굴에 수색이 가득하느뇨? 분명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 느헤미야의 말을 보십시오. '나의 조상의 성읍이 황무하게 되고 성문이 타버렸는데 어찌 근심이 없겠습니까?' 왕의 신임하는 자가 근심에 쌓인 것을 본 왕은 되묻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나를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우리의 기도는 헌신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왕의 권력앞에서 은총을 입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의 이유가 바로 '허물어진 성을 재건'하는 데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무엇입니까? 또 다시 묻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기도는 우리가 변화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십시오. 느헤미야가 기도한 '왕 앞에서 은총을 입는 일'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하기 위해 자신이 쓰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헌신의 기도였습니다. 기도와 간구의 최종 목적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입니까? 결국 목표가 우리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번창하는, 그래서 좀더 안락한 삶과 풍요로운 삶 그 수준입니까?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참 기도이며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물질을 풍성하게 주셨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기도한다면 우리가 바로 느헤미야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잘 모르신다면 받고 난 다음에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것을 가지고 '허물어진 성벽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게 하여 주옵소서. 혹시라도 형제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당연히 있겠지요-쓰러져있는 그 형제를 일으키는데 그것을 쓰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의 복을 주셨다면 그 자녀를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쓸 것인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모든 것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목표는 그것이 아님을 이해하십시오.
우리의 목표, 우리의 기도응답의 목표는 더 고귀한 것입니다. 더 높게 잡으십시오. 옛말은 이렇게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벌레의 눈을 가진 민족은 망하고, 새의 눈을 가진 민족은 흥한다'고 했습니다. 항상 땅만 보면서 기어가는 벌레의 눈은 그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창공을 나르는 새의 눈은 언제나 폭넓게 내다보며 살 것이기에 그 눈을 가진 민족을 살아날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분명히 나를 위한 기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 기도는 응답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울면서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기도만 아니라 중보의 기도로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민족의 아픔을 덜어주는 그런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복을 위해 기도해도 그 목표를 정확히 아는 그런 사람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예루살렘 성벽을 짓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에 어인을 찍어 보낸 아닥사스다가 어찌 이렇게 간단하게 물어온단 말입니까? 여기에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세 번째로 성공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 빠질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자들에게 오는 순적함의 은혜입니다. 성공은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의 합작품입니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아닥사스다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기 전에 지난 번 보낸 칙령에 대해 언급이 분명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말 속에 혹시라도 숨어있을 지 모르는 의도를 간파하는 작업이 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설득으로는 상대방의 생각을 절대로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혹시 여기 남편 생각을 바꾸고 싶은 아내 계십니까? 자신의 생각을 아무리 얘기해보십시오 고쳐지나. 안됩니다. 우리는 못 바꿉니다. 바꾸려고 하면 반드시 목소리만 높아지고 혈압만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이 웬수'로 바뀌고 맙니다. 기도의 예비함, 기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기도만이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만이 우리와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기도로 바꾸시려고 하십시오. 우리의 논리 가지고는 분쟁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과 생각이 느헤미야의 얘기를 듣는 순간 바뀌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그 남자의 마음은 누가 지배합니까?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렇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남자와 그 남자를 지배하는 여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지배하십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남편과 아내의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려면 어떻해야 합니까?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 21장 1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의 생각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967년 4월 21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 망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스탈린의 딸이 소련을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것입니다. 케네디 공항에 내린 그녀는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생각을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이 도우셔야 정확해집니다.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 올바르게 바뀔 것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성공에 필요한 것은 정확한 구상입니다. 기도로 구상해야 합니다. 기도하시면서 계산하셔야 합니다. 기도 없는 계산이 필요한 것이 아닐 기도와 동시에 계획하시고 구도를 짜야합니다. 목표를 앞에 두고 목표 수행에 필요한 것들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개축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세워진 목표에 따라 구상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헤미야에게 왕이 필요한 것을 묻자 세밀하게 준비된 말을 전합니다. 6절에서 8절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로 기간을 정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땅으로 가는 동안 필요한 무사통과 서류를 요구한 것입니다. 여권과 비자를 다 준비해 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사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건축 자재입니다. 그것들을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뜨거운 기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성을 최대한 사용하십시오. 이것이 필요합니다. 저것도 필요합니다. 차근 차근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던 4개월간을 매우 소중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기도 없이 계획만 세우고 있지도 않았고, 기도하느라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생각 없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도 당연히 듣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공을 원하십니까? 여기 느헤미야가 보여주는 원칙이 있습니다. 사업을 잘 운영하고 싶으시지요? 가정에서 성공적인 가장이 되고 싶으시지요? 느헤미야를 묵상하십시오. 세상이 말하는 성공방법에 유혹 받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원칙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원칙이 더 효과적입니다. 성경적인 방법을 고수해보십시오.
플로라 슬로슨 Wueller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는 노력만큼 슬프도록 헛된 것은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다른 쪽 뺨을 돌려대는 일은 결국 자신과 상대방을 파괴하는 상황만 몰고 올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생명샘에 매일매일 의지하지 않은 채 사랑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시도해 보십시오. 당신은 곧 가물어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샘만 발견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가정에서 성공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사업과 직장에서의 성공도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