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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일하십시오 (느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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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십시오(느 3:1-)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자신의 삶을 바쳐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고 그들에게 기업이 될 땅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졌고 기력이 쇠잔해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았습니다.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과 유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고별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그들 앞에 다시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마지막 여호수아가 당부한 유명한 말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이 우리의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지도자 여호수아의 말을 들은 백성들이 한결같이 목소리를 높여서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라' 백성들이 화답합니다. '일어나 건축하자'
멋있는 화음입니다. 이런 화음이 없이는 아름다운 교향악은 들려질 수 없습니다. 역사는 혼자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함께 해야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셨듯이 황폐하게 된 정도가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대부분 성벽의 두께는 보통 3-4미터 가량이었고 넓은 곳은 7미터가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성문의 높이도 4-5미터정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사역을 이룬 비결이 사실 3장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거의 이름으로 가득찬 장입니다. 거의 내용이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달고 건축하고 중수하였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장은 느헤미야서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담겨있는 장이라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중요한 장입니다.
공사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우리 교회의 지금 모습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동차를 파킹하시다가 보셨습니까?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교인들은 참 점잖하셔서 그리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시지만, 오늘 새벽기도 마치고 나왔는데 거대한 덤프 트럭에 흙더미가 실려 나가는 것을 보는 저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역사를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름답고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성전은 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여러분이 아니어도 언제인가 이 교회는 증축을 하게 될 것이고 성전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역에 여러분과 제가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히 거대한 주님의 복입니다. 다윗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평생에 준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영광은 아들 솔로몬이 누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 일절을 보십시오.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다' 그랬습니다. 2장 18절의 말씀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자'는 그들의 고백이 드디어 실천에 옮겨진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교회이든지 <비전은 행동으로 바뀌어야 능력이 있는 비전>입니다. 말로만 이루어지는 역사는 무능한 역사입니다.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Vision Into Action 이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멋있는 비젼이 있다고 해도 실천되지 않으면 감격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비젼에 감동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절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비젼은 보여지면 질수록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치는 증가합니다. 우리의 기대가 점점 올라갑니다. 기대에 푹 빠져버립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실제로 드러나지 않으면, 비젼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 높아졌던 기대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면서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허물어진 성벽을 중건해야겠다는 생각에만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3장 말씀은 성벽 재건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장에는 엄청난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치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보는 듯 합니다. 많은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한 장에 서른 여덟명의 다른 이름이 등장하고, 마흔 두개의 서로 다른 그룹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벽 재건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놓칠 수 없는 원칙이 여기서 보여집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역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한 사람이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몇 사람만, 재정적인 능력있는 몇 사람만 있으면, 마음 맞는 몇몇 교인만 있으면 그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그룹이 함께 어울려 작품을 만들어내야 진짜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건축 후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물질을 함께 드리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시간을 투자했다면 그것은 결코 어려움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말 영광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성전 건축의 영광을 여러분과 제가 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있는 몇 몇 사람만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누구부터 사역을 시작했습니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모범입니다. 제사장이라고 그 사역에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희 목회자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수출신인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건축자였습니다. 직접 못을 박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어디를 중건합니까? 그들은 양문을 중건했습니다. 양이 들어가는 문, 하나님께 바칠 희생의 제물인 양이 통과하는 문을 건축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영적인 일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렇지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 예배당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성한 노동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병자를 돌아보는 삶에서도 예배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구역 대심방을 하는데 마지막 가정에 들어가서 참 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 한 아들이 얼마 전에 자원 봉사자로 뉴욕에 다녀왔습니다. 그 곳 이름은 Camp Hope입니다. 정신 박약자, 저능아, 신체 부자유자, 자기 혼자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삶을 이루어가도록 도와주는 장소였습니다. 몸이 부자유스러운 한 소년의 몇 숟가락 식사를 위해서 한 시간도 족히 걸리는 봉사를 하며, 신체적으로는 다 성장한 그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과, 허리가 휘청할 만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변기에 앉혀주는 일, 얼핏 생각하면 거의 생산적이지 않은 그런 류의 일을 위해서 약 6주간을 보내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몸을 가누지 못해 허물어져있는 그들의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꺼내 설명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는 대학 3학년인 그 아들의 고백입니다. 'It was a life-changing experience' '그것은 삶을 바꾸는 경험'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당에서 가만히 앉아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배, 살아 움직이는 예배가 제사장들과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벽 재건을 위해 제사장들은 신성한 땀으로 예배를 익히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여리고 사람 그룹이 등장합니다.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했고, '어문-물고기의 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 그룹이 건축했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4절의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입니다. 그 다음은 누굽니까?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입니다.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바아나의 아들 사독입니다. 그 다음은요? 오늘 설교 참 쉽네요. 그 다음, 그 다음만 얘기해도 한 시간 충분히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한 한 단어는 바로 '그 다음은'입니다. 누군가 혼자만 계속하는 것입니까? 혼자 이름만 나온다면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역은 이 사람이, 저 사역은 저 사람이 합니다. 혼자 독점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역을 나누어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러 지체가 함께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저의 목회단상 기억하세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만일 아주 능력이 많은 손 하나만 있는 몸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기형중에도 너무나 엄청난 기형적인 몸입니다. 교회는 부족해도 함께 일해야 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 시카고의 수백만 장자가 없는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부족하지만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것입니다. 능력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재정적으로 좀 힘이 부쳐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함께 일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고 여자고 구별이 없습니다. 힘만 있으면 되나요? 세밀한 것을 감당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말씀을 계속보니까 주로 남자 이름만 나오지요? 그러나 12절을 보실까요?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 여자라고 제외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예루살렘 절반을 다스리는 능력있는 사람도 있구요, 귀족들도 있습니다, 금장색-금 세공업자 오늘날로 말하면 주얼리 샵하는 사람도 있구요, 향품장사-화장품 판매하시는-하나냐도 있구요, 상인들도 있습니다. 여자들도 물론 있습니다. 전 공동체가 함께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여러분 모두가 참여하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외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능하다면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노래하시는 분은 노래하는 것으로, 예배당을 깨끗하게 정리하시는 분은 그런 사역으로, 가르치는 자는 잘 가르치는 것으로, 마르다 같은 사람은 언제나 부엌에서 섬기는 것으로, 각종 다양한 사역을 우리는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4절은 '분문'쪽에서 성벽을 재건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분문은 바로 분뇨나 오물을 처리하는 곳입니다. 그런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도 아무말없이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장을 보면 느헤미야는 사역의 현장을 약 40군데로 나누어 놓고 한 현장씩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양문이면 양문, 어문, 분문, 골짜기 문, 샘문 등등으로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들보를 얹었습니다. 문짝을 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물쇠와 빗장을 채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풀무 망대를 중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여러분 모두가 필요합니다. 자물쇠를 담당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거대한 성벽을 만드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조그마한 일을 감당할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15구역 대심방을 하는데요, 그 구역은 칭찬받을 만한 구역이었습니다. 구역장, 부구역장 두 집사님께서 아침 아홉시부터 밤 11가 넘도록 함께 심방을 했습니다. 부구역장 되시는 분은 그 전날 구역원 모두를 위해 정성스럽게 예쁜 꽃바구니를 준비해 오셨고, 그리고 구역원중의 어떤 분은 아침에 커피와 음료수까지 준비해 주셨습니다. 11시가 넘어서 교회에 도착한 저희들이 함께 손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심방을 마감했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해야 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함께 하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낼 수 있습니다.
시비에스 뉴스맨인 챨스 아즈굳이라는 사람이 재활 병원에 있는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두 여인은 각기 우연히 스트로크을 맞아 마가렛이란 여인은 왼쪽을 거의 마비되었고, 룻이란 여인은 오른 쪽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두여인의 공통점은 한때 꽤 알려진 피아니스트였던 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트로크이후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안 재활 센터 책임자가 하루는 그들을 찾아와 피아노를 연주해보도록 격려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두 사람은 용기를 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각자 한 손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책임자는 각자에게 솔로 곡을 두 사람이 각각 쓸 수 있는 한 손씩 사용해서 솔로 곡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수 많은 연습 끝에 마침내 그들은 그 일을 해냈습니다. 한 손씩 사용하여 함께 연주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 낼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 4장 11절-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 장로님들 이 말씀 아주 익숙하시지요? 지난 금요일 장로님 성경 암송 구절이었거든요. 하나님은 각자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은사대로 섬기도록, 봉사의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만큼 하시면 됩니다. 비교해서 남들만큼이 아니라 여러분의 은사대로, 그 만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고 적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쟌 &47225;펠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 능력보다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함께 하는 능력에 나는 가장 후한 대우를 할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은혜와 능력 따라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플로리다주의 Lake Wales에는 Bok Tower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죠지아 산의 대리석과 플로리다의 패각암-조가비나 산호의 석회퇴적물로 된 암석-으로 만들어져있는 데요, 그 안은 식물과 동물형태로 아름답게 꾸며져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57가지의 종(bell)을 들여놓으려고 만들어진 곳입니다. 흔히들 종악(carillon)이라고 말하지요. 벨이 울려 멋진 음악을 냅니다. 그 종중에 무게가 11톤이나 나가는 가장 큰 종이 있구요, 제일 작은 종은 17파운드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세기부터 있어왔던 이 종악을 위해서 필요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11톤이 나가는 종이 17파운드밖에 안나가는 종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고, 11톤 짜리보고 너무 커서 간수하기 어려워 내 버려져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종악을 위해서 모두 다 필요합니다. 거대하건, 너무나 작아 쓸모없어 보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 꼭 필요합니다.
이처럼 여러분 어느 누구도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빠질 수 없습니다. 능력이 조금밖에 없으면 작은 부분을 맡으시면 됩니다. 모두가 다 다섯 달란트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달란트여도 만일 남기기만 했다면 주님께 동일한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함께 교회를 섬기십시다. 사실 교역자만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더 아름답게 섬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강조해도 모든 사람이 다 섬기면서 주님의 교회에 있지는 않습니다. 제 목회의 목표중의 하나도 가능한대로 더 많은 평신도들이 사역하는 것이지만 백퍼센트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5절을 한번 보실까요?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부담치 아니하였으며' 한 무리의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맞지 않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든지 아무튼지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100% 참여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능한대로 여러분들은 주님의 역사에 가담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장전에도 이미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성벽 재건을 비웃으며 방해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들이 사역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하게 방해를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찬가지로 '주의 역사'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주님의 역사이라면 가담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2장 20절로 다시 되돌아 가 보실까요?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아무런 기업이 없는, 주님 거하는 예루살렘에서 아무런 물려받을 것이 없는 삶보다는 주님의 교회에서 아름다운 권리가 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냥 뒷짐지고 있는 것보다는 팔을 걷어 부치고 앞장서는 것이 좋습니다. 뒷전에 처지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역하게 하십니다.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성벽을 세우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성벽 재건의 주역입니까? 아니면 말로만 참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의 역사에 아예 뒷짐지고 있는 사람입니까? 교회는 함께 해야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들어오셔야 교회의 사역이 여러분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의 기업이 될 것이며 권리와 명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성공은 모두가 함께 하는 그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B.C. Forbes 라는 사람은 '성공이란 t-e-a-m-w-o-r-k이다'고 말한 것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함께 하는 것만이 성공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팀을 이루어 이끌고 가는 교회가 성공적인 교회입니다. 몇몇 사람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주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시카고 한인 연합 장로교회의 주전 선수입니까? 아니면 모두 관중석에 앉아 구경만 하고 계신 분입니까? 오늘 저희 교회는 함께 뛸 주전 선수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전선수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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