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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기가 필요합니다 (느 0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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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필요합니다 (느 4:7-23)
 
대심방이 드디어 마감되어 갑니다. 구역장님과 부구역장님, 교우들이 함께 협력해서 멋진 구역심방을 정리해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어떤 구역은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11시경에 심방을 받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고 그래서 불평담긴 뒷얘기를 간간히 듣기도 했지만, 모두 도와주셔서 잘 마쳐가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여러분의 기도에 힘입은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도 밤 늦은 시간에 심방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오는 데 차 안에서 집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때때로 주님 일 하다가 지칠 때가 있어요. 목사님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중단하고 싶을 때가 있지요? 주로 언제였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게 만들고, 사역을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가 어떤 경우였습니까?
느헤미야 3장 말씀을 통해서 보면 성벽 재건이 일단 시작되고 나니까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된 것 같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오늘 4장 말씀은 3장의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된 다음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1절과 7절 말씀을 통해서 보면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혹은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벽 재건이 시작되고,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어 가는 상황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절반 정도 일을 이루어갔을 때 즈음입니다. 시작이 반이라 했는데 실제로 반 이상 사역을 이루어 놓은 단계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대로 이미 처음부터 반발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누구도 열심히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기대감이 그들의 정신을 온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도 이루어져 간다고 느낄 때 좀 더 확실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꼭 이러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시들해집니다. '열심'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감당하려고 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시간과 정력과 물질과 정성을 다하는데도 문제가 일어납니까? 대답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너무도 명백하게 일어납니다. 요즈음 한국에는 교회를 잘 성장시켜가면서 주목받는 젊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 중은 한 분의 글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누가 교회일 좀 하려고 하면 '저 사람은 실업자라서 시간이 많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열심이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소리 듣고 일할 맛이 나겠습니까? <내가 할 일 없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냐? 나도 바쁜 사람이라구. 이렇게 치사한 소리 듣느니 교회 일 안하고 말지>라며 하려던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또 등록한지 얼마 안된 성도가 하나님 앞에 충성 좀 하려고 하면 '도대체 교회 나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저렇게 설쳐대는 거야? 조용히 좀 지내지' 하며 기를 죽입니다. 그러면 일하려던 사람도 기운이 빠져 <그래 나는 교회 나온 지 1년밖에 안 됐다. 그러니 교회 나온 지 오래된 너 혼자 해라>하고 맙니다. 저희 교회 어떤 형제는 찬양대에서 봉사하려고 하다가 '노래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찬양대냐?' 하는 말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찬양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누르고 계속하려고 하면 '욕 먹고도 버티고 있는 것을 보니까 달리 갈 데가 없어서 그러는 거구나'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있습니다. 열심히 섬겨보려고 하는데도 꼭 누가 시비를 겁니다.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훌륭한 비젼을 이루어 가려고 하는데도 반드시 거기에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은 이미 주변에 비웃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분노하면서 사역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퇴락한 곳이 보수되어 가는 것을 들은 산발랏,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암몬 사람, 아스돗 사람들이 분노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쳐서 요란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역, 비젼이 넘치는 주님의 일에는 어쩌면 거의 반드시 걸림돌과 방해 작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에만 걸림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외적인 걸림돌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위대한 줄타기 곡예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Karl Wallenda입니다. 그는 몇 년전 푸에르토리코에서 23미터 높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줄타기만이 삶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는 전율의 순간을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왈렌다의 아내도 공중 곡예사였는데, 자신의 남편이 그 치명적인 낙상을 하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아주 중요한 얘기를 남겼습니다. '남편 Karl은 그 줄타기를 하기 전 석달 내내 떨어질 것만 생각했었죠. 남편이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더니 남편은 줄 위를 자연스럽게 걸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했지요.' 그리고 아내가 말하기를 자신의 남편이 평소에는 일꾼들에게 맡겼던 곡예줄의 장치를 몸소 관장하며 버팀줄이 안전한지 철저히 확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입니다. 내부의 적이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겠습니까?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감을 상실합니다. 포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안될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이 멋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마구 몰아가는 성벽 재건의 일이 힘에 부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수북히 쌓인 흙더미를 보면서 좌절한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을 패배의식에 맡겨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엄청난 장애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실이지만 그런 눈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북한 흙무더기를 보면서 '야 이 흙더미가 없어지고 나면 얼마난 확트이고 멋진 성벽이 그 위용을 나타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요? 언제인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골리앗을 보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강력한 힘앞에 좌절하면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다윗의 시선과 그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크면 클수록 나의 물맷돌이 맞을 확률은 훨씬 높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의 힘이 다 쇠약해졌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당신이 어찌 그 일을 맡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만무하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 앞에 놓인 흙무더기는 거대한 산으로 돌변하고 맙니다. 잘 진행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시각이 흙무더기에, 그리고 지치고 지친 그들의 육신에 고정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는 말이 터져나오게 되었습니다.
줄타기 곡예사의 낙상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내부의 자신감을 상실하면 줄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까마득히 올라 온 23미터 아래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의 눈에 자꾸만 줄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흙더미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비젼을 상실한 그들의 마음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힘이 쇠약해지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젼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육체가 쇠약해질 만큼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금은 이제 힘을 재충전할 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고지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부에서 허물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내가 골리앗을 무찌르겠다'고 선언하자 어떤 일이 제일 먼저 일어난 줄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내부의 소리가 들립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 17장 28절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비젼을 가로막았습니까? 다윗의 가족안에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내부의 적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지금 자기들이 모두 포로로 잡히느냐 볼모로 잡혀갈 것이냐의 갈림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이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불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대꾸합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내부에서 먼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윗 너는 싸울 만한 사람이 아니다. 내부의 적을 조심하십시오.
자, 내부의 적에게 무릎을 꿇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들어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내부의 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외부의 적의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자신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유다 백성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보지도 못하는 순간에 쳐들어와서 유다백성의 건축을 완전히 망쳐버리게 될 것이라는 외부의 적의 소리가 거대하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문제가 커져 보이도록 환경도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12절을 함께 보실까요?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 와야 하리라 하기로' 벌써 주변에 적의 침공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적의 침입을 막을 사람을 빨리 파병해달라고 아우성하는 것입니다. 내부의 적에 밀리기 시작하면 침묵하고 있던 외부의 적조차 벌떡 일어나 소리치면서 달려들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도 문제는 주변에 늘 있습니다.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거대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내부의 적에게 백기를 들었을 때입니다. '나는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그 문제는 잽싸게 보이지도 않게,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쳐들어와 우리의 고지를 점령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목표와 비젼을 상실하는 순간, 내부의 적에게 무릎 꾸는 순간 적이 오히려 '이미 승리는 내 것이라'는 엄청난 함성을 지르면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내부의 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명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외부의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문제를 분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렇지요?
14절을 보실까요? '내가 돌아 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14절에는 중요한 세 단어가 등장합니다. '두려워 말라' '기억하라' 그리고 '싸우라' 이 세가지입니다. 이 중에서 두가지는 내부의 적을 무찌르는 무기이고, 한가지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유다의 대적들 곧 사람이 아닙니다. 더욱이 엄청난 흙무더기 환경도 아닙니다. 악조건도 결코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도저히 헤쳐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부정적인 생각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사람들의 막강한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크시고 정말 두려우신 그 분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분만 두려워하면서 살면 우리 안에 있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적들은 즉시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두려움과 좌절감을 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두려워 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두려움에서는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기억하라는 명령도 우리 안에서 염려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내부의 적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부에 웅크린 적의 사건을 역전시키는 해결책입니다. 좀더 적극적인 주문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만을 기억하라는 요청입니다. 신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잘 되면 기억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망각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크신 하나님, 능하신 하나님, 결과적으로는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990년에 'Comeback'이라는 책을 쓴 데이브 드러베키의 이야기에는 주님을 기억하는 삶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프로 야구팀 샌프랜시스코 자이언츠의 올스타 투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팔에 종양이 생긴 것을 발견했는데 그 자라는 정도를 보니까 암 종류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볼을 던지는 왼쪽 팔의 근육을 약 50%정도 떼 내서야 수술이 끝이 날수 있었습니다. 투수로서의 생명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재활치료도 받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해 그는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맞붙은 신시내티 Reds팀을 4대 3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음 경기에 또 출전했습니다. 더 빠른 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팔 뼈가 탈골이 되었고 고통스럽게 경기장에 쓰러진 그는 들것에 실려 나와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결과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팔을 절단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만난 그가 그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무도 인생이 멋진 것이라고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환경에서 눈을 떼어 주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Nobody ever promised that life would be fair. Everybody is going to have adversity. The only way to handle it is to take our eyes off our circumstances and put them on the Lord). 이런 것이 주님을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두 번째도 팔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멋진 투구를 계속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기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팔을 절단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에 관계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었다고 문제가 다 사라져버립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100% 늘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 주일 보게될 5장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환경에 따라서가 아니라 동일하게 바라보는 것이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내부의 적의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팔이 절단되어도 내부의 적, 불만과 원망과 좌절감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 해결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는 것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가 문제 해결에 더 추가되어 있지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 이 원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싸우는 것입니다. 20절에 보이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기에 전진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물맷돌을 직접 던지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돌입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직접 데리고 온 종들의 절반은 성벽 재건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고, 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파수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17절을 보시면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면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23절은 느헤미야 자신이나 형제들이나 종들이나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옷을 벗지 않고 싸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면서 싸우십시오.
처음 집사님의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목사님은 지칠 때가 없느냐고 질문하신 뒤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느라고 하는데도 너무도 많은 영혼들이, 특별히 젊은 영혼들이 딴 길로 걸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주저앉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시간 어저께 집사님의 질문에 대답을 드립니다. 물론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집사님의 사역으로 인해 한 생명이라도 건져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주님을 기억하면서 이루어 가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이 미국에 흩어진 수많은 교회를 통해서 한 생명씩 한 생명씩 건져지고 있다면 그 일은 비젼이 있는 것입니다. 집사님의 사역은 결코 헛된 것일 수 없습니다. 내부에서 좌절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만나십니까? 여러분의 삶속에 움틀거리는 꿈에 걸림돌이 자꾸만 생겨나십니까?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패배의식과 좌절감과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에 자꾸만 사로잡히십니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용기를 가지십시오.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용기를 재충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옷을 벗지 않고 지키고 이루어 가겠다는 비젼으로 무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는 용기입니다.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는 용기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 할 것 있을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좋은 환경이든 어려운 상황이든 주님만 기억하고 바라보겠다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날마다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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