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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젼을 함께 나눈 성도 (느 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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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얘기를 좀 들려 드릴까요? 유다민족의 바벨론왕국 포로생활이 기원전 586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50년에 고레스 왕이 주변의 메대 왕국을 정복하고 바사제국을 세웠습니다. 페르시아라는 나라이지요. 그 나라가 강성해지더니 급기야 막강했던 바벨론 제국을 기원전 539년에 정복해버렸습니다. 바벨론 왕국을 정복한 바사(오늘날의 페르시아)제국의 시조였던 고레스 왕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그 다음해인 538년에 칙령을 내려 포로들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까지 메대 바사 제국의 영토로 확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벨론지역의 안락함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고국을 찾았습니다. 538년 제 일차 귀환은 스룹바벨이 주도하여 5만명이 이스라엘로 되돌아 왔습니다. 522(1)년에 다리오 일세가 바사제국의 왕이 되었고, 485년에는 아닥사스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아닥사스다 왕 시대인 458년 에스라의 주도로 제 2차 귀환이 2천명의 남자와 가족들이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13(4)년이 지난 445년에 소수의 그룹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제 3차로 귀환을 했습니다.
지금 저희가 공부하는 느헤미야서는 바로 제 3차 귀환 이후에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1차로 귀환한 시점으로 보면 약 90년이 좀 더 지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귀환했을 때보다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도 많이 늘어났겠지요. 그런데 주변의 여러 족속들이, 주로 유목민인 베두인들이 자꾸만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노략도 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물어졌던 성을 쌓을 필요를 느꼈고, 그 일이 예루살렘 형편을 들었던느헤미야를 중심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완성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쉽게 보여도 한 가지 일을 마무리짓는 일은 어렵습니다. 내가 가진 좋지 못한 습관 하나를 바꾸는 일도 만만치 않지요? 더욱이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해 나갈 때 한 마음으로 나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생각이 다르구요, 방법이 다르지 않습니까? 심방을 하면서 사업의 어려운 점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가 '사람을 쓰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마음을 합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일 것입니다. 어려움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 하는가입니다.
4장을 살펴보면 그들이 성벽 재건을 이루어 감과 동시에 적의 침략도 막아야 했던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으로 일하여야만 했던 상황이었지요. 성벽재건 작업과 군사적인 방비를 함께 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옷을 벗지도 못하고 잠자리와 일자리를 연결시켜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법하지요? 어려운 내부 상황이 서서히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일련의 유다 백성이 아내와 더불어 울면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여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란다는 아우성이었습니다. 매우 기본적이고도 가장 근본적인 아픔입니다. 아마도 1절에서 불평하는 이들은 일반 노동자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그룹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어쩌면 평소에 일반 노동자들을 고용했었던 사람(고용주)들이 독려해서 성벽재건에 참여하게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쁨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성벽 재건에 뛰어들긴 했지만, 막상 성벽재건 공사를 하는 동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공사하는 동안, 하루 품삯 노동자들의 생계 문제를 고용주들이 고려하지 못한 듯 합니다. 노동자들이 성벽을 재건하느라고 노동을 할 수 없었으니 당연히 처자식들의 끼니를 공급하는 일이 막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와 더불어 고통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불평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불평만이 어려운 상황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흉년까지 겹치게 된 것입니다. 밭과 포도원과 집을 가진 자들도 그것들을 전당잡히고서야 겨우 곡식을 얻어 올 정도의 흉년이 그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4절은 메대 바사 왕국에 무거운 세금까지 내느라 '빚'을 지지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먹고사는 곡식 문제와 빚의 문제가 얼마나 컸던지 자식들이 종으로 팔려가는 일까지 생긴 것입니다. 자식이 종으로 팔려 가는 아픔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흉년 때문에 성벽 재건의 시기가 무척 좋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일을 추진하다 보면 이렇게 좋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환경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아픔과 원망이 나올 만큼의 상황이 꼭 흉년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입니다. 이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 흉년 때문만이 아닌 다른 것에도 있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을 한번 보실까요?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font? 누구를 원망한다구요?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료, 동족, 자기와 함께 선택된 그 백성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었으면 흉년 탓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구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동족 바로 유다 형제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구요? 동족 형제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5절도 한 번 보실까요? 어떻게 말하는지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 도다.' 우리의 허기진 배와 그리고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허기지지 않은 어떤 형제의 배와 동일하고, 우리의 자녀도 '저희 자녀'들과 같다고 원망 섞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한 부류의 유다인들은 자기의 자식을 노예로 팔아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다른 한 쪽은 그 어려운 처지에 놓인 유다인의 딸과 자식들을 노예로 사들이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고통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부류의 사람,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태도를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흉년과 같은,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거대한 원인이 여기 등장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입니까?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메대 바사에서 파견된 고위 관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동족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도 귀인과 민장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백성은 굶주림으로 자식을 노예로 팔고 있는 상황인데 그들은 배불리며, 고리 대금업을 하면서 그들의 자녀를 노예로 사들이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넉넉하게 가진 형제들이, 풍성하게 누리고 사는 지도자들이 어려운 형제와 함께 나누지 않은 이유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동족의 아픔을 보고도 자신의 배부름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 얘기가 여기 담겨있는 것입니다. 상황은 적절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람들 때문에 당하는 상황의 어려움도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백성의 부르짖는 아픔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아픔을 듣고 나자 느헤미야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6절입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느헤미야는 백성의 아픔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귀인과 민장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두가지 큰 실수를 그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형제들에게 취리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취리라는 말은 고리 대금업을 통해 이익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에 보면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는 말을 보면 귀인과 민장이 받았던 이자률은 월 1%, 연 12%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이자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오늘 새벽기도의 말씀중의 하나도 '형제에게 이식-이자'를 취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과 26절의 말씀에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참 아름다운 율법이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이 옛적의 율법만 잘 지키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형제입니다. 한 자매입니다. 기쁨과 즐거움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지는 형제입니다.
기러기가 V자형으로 떼를 지어 날아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기러기들은 그렇게 날아가는 이유가 있음이 조류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떼를 지어 날아가게 되면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나 더 오래 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러기떼가 V자형을 하는 이유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V자 대형으로 날아가면 공기대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연약한 기러기들이 쉽게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연약한 동료들을 위해 그들은 V자를 그리며 날아갑니다. 주로 가장 힘이 있는 기러기가 제일 앞서고 그래서 그 기러기가 제일 먼저 지치게 되는데 이것 때문에 가끔 기러기들이 앞 자리를 서로 바꾸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생각하는 공동체의 모습아닙니까? 이것뿐만 아닙니다.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되면 반드시 서너 마리의 동료가 함께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냥 날아가는 듯이 보이는 기러기의 날개침에도 아름다운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거룩한 천국의 유업을 이어 받을 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하는 한 형제에게서 높은 이자를 취하는 행위는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러기처럼 V자형을 만들어 주어 연약한 자들이 쉽게 함께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형제에게 이식을 취하지 않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행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고 싶지 않으십니까?
두 번째는 '형제를 노예로 삼는 일'에 대한 경계였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이 노예가 된다는 일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것은 마치 오늘날의 인신매매와 동일한 발상아닙니까?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고귀한 인격체입니다. 물건이 아닙니다.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아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사이에서 팔고 사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더 나아가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있는 이때에 모여든 유다 백성이 자녀들이 서로 노예로 사고 팔린다는 것이 너무 엉뚱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일을 이루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 돈을 매개로 자녀들이 노예가 된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 때문에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랑으로 관계를 묶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2차대전중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든 좋다.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 가지면서 살아보라. 당신은 예상치도 못했던 힘이 어디선가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그 엄청난 고통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 자기의 고통에 묶여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도할 때 주어졌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형제의 고통은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묶여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궁극적으로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형제끼리 이식을 취하면서, 노예로 사고 파는 일이 생겨났습니까? 그 해답을 정확하게 보십시오. 9절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또 내가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이라구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말입니다.
사실 얼핏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 같지요? 먹을 것 없으니까 먹을 것을 위해서 돈을 빌리고,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으니 이자를 물어야하고, 이자를 제대로 못 갚으니 집과 포도원과 밭을 전당잡혀야 하고, 그래도 안되니까 자식을 노예로 파는 일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거기에 한 몫 한 것이 흉년이었겠지요? 그리고 거기다가 동족인 귀인들과 민장들이 자신들만의 이익만 챙겼기 때문인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될 지 몰라도 제일 중요한 원인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진짜 원인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으니 형제의 사정을 돌아볼 줄도 모르고, 율법이 그렇게 강조한 형제들에게 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각기 제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말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우리의 심성이 행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귀인이어도, 아무리 민장으로 지도자 행세를 해도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별 것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에 매달려 살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사라진 자들의 행동의 결과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다운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백성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서 유대인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율법으로 맺어진 관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유대민족이 대단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 사는 것 외에 무슨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놓치면 이방 사람의 비방거리 외에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완전히 놓치고 나니까 약속의 백성인 그들 형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돈이 형제들보다 먼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옛말처럼 돈나고 사람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사람보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으면 사람과의 관계가 일그러집니다. 모든 것이 물건으로 보입니다. 돈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인격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도 문제가 아닙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두려워하면서 지켜 가는 것, 이런 것이 없으면 모두가 헛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이렇듯 강력하게 하나님을 마음에 회복하는 말씀을 들은 유다백성들의, 특별히 귀인들과 민장을 포함한 그들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13절 마지막 부분을 한번 보실까요? '... 하매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대로 행하였느니라' 귀인들과 백성의 민장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느헤미야의 말을 통해 들은 그들의 태도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을 담으면 우리의 행동이 바뀌어 집니다.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 경외하기를 강조해주면 그들의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분명한 진리입니다.
함께 비젼을 나누는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경외하기를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지금 거룩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하더라도, 일에만 매달려 하나님 경외하기를 소홀히 하고 잊어버리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귀인들과 민장의 과오를 우리가 다시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비젼을 함께 나눈 형제의 아픔을 보고 도울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계셔야 돈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들이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이 교회의 비젼을 함께 나누어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함께 영원한 유업을 받아 누릴 사람들입니다. 형제를 돌아보십시다. 형제의 고난과 아픔과 기쁨에 함께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꼭 필요한 것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의 마음 밭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자리잡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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