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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느 0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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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없는 인생은 없습니다(느 6:1-19)
 
변화와 개혁하는 일에는 어려움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때까지 가져온 생각을 바꾸고, 이제껏 해 오던 습관도 바꾸어야하고, 늘 익숙하게 따라했던 체제와 구조를 변경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원칙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바꾸어야 하는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쉬워요. 그러나 실제로 바꾸는 작업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변화에는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버리거나 바꾸어야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이 아픔을 감내하지 못하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요즈음 한국의 정치는 거대한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시작된 군인 정치가 아닌 문민정부는 몇 년간의 수고와 뚜렷한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 공감할 만한 개혁업적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전의 구습을 벗어버려야 하는 개혁 그 자체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십년 동안 갖추어진 체제의 굴레를 단 몇 년만에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라고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가치와 방법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 담겨있지 않으면, 그리고 자신이 멋지게 누리던 기득권을 포기하려는 태도가 없으면 개혁은 언제나 말로만 외쳐질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혁을 주장하는 자신의 문제만 아니라 주변의 기득권자들에게 밀어닥칠 개혁으로 인한 손실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개혁은 더욱 어렵습니다. 주변의 기득권자들 이들이 참으로 개혁의 걸림돌입니다. 개혁의 당사자들은 그 의지를 실천해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 기득권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모든 노력을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쩌면 개혁의 가장 큰 장애요소입니다.
포로에서 되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개혁의 바람은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십년을 지나도 개혁은 쉽게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간의 백성의 민장들과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있었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귀환이후로 시작된 성벽 재건이라는 개혁작업은 이제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일절은 성을 건축하는 작업은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성문짝을 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무리되었다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성의 퇴락한 곳을 거의 남기지 않고 보수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벽재건의 역사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성문짝만 달면 성벽재건의 역사는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느헤미야가 전갈 하나를 받습니다. 개혁작업의 처음부터 걸림돌이 되었던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등이 전갈을 보내온 것입니다.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만나서 의견을 재 조정해보자고 유혹했습니다. 사마리아의 지도자인 산발랏은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부임한 느헤미야가 너무나 멋지게 그 지역을 개혁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러움과 질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드러지 인물 느헤미야를 제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거하고 싶은 마음은 그를 거짓으로 그를 유인해 살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에는 언제나 걸림돌이 존재합니다. 더욱이 그 개혁의 막바지, 마지막때, 성문짝만 달면 개혁이 정리되는 그 순간에 더욱 강력하게 반발이 일어납니다. 개혁을 완수하는 일에는 거대한 시험거리가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걸림돌을 2절에서 보실까요?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라' 개혁을 중단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무엇입니까?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도록 막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간단한 방법 하나가 있습니다. 개혁의 선두주자, 곧 지도자를 쓰러뜨리는 방법입니다. 그 사람만 쓰러지면 개혁의 바람은 순식간에 잠잠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들은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로 끌어와서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에서 약 25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 곳으로 유인해 오기만 하면 그를 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만 제거되면 개혁은 갈팡질팡하게 될 것은 적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쓰러지면 공동체는 지도자와 함께 허물어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헤미야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오노 평지로 유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느헤미야는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거절합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개혁의 막바지에 생기는 시험과 걸림돌의 특징은 그것이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삼세판도 아닙니다. 네 번이나, 그것뿐만 아니라 다섯 번째는 편지까지 보내면서 끈질기게 유혹합니다. 지속적인 유혹에 주의하십시오. 개혁하는 일의 막바지에는 한 두 번의 시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해옵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면 알아차리십시오. 그 때가 시험의 마지막 때임을 말입니다. 그 때만 견디어 내면 문제는 해결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개혁의 막바지에 있는 시험의 또 다른 특징은 6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 도다' 두 번째 특징이 무엇입니까? 개혁의 적은 최종적으로 인신공격을 합니다. 몇 번이나 오노 평지로 내려오라고 했지만 꿈쩍하지 않자 이제는 편지를 보내면서 엉뚱한 비방을 하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가 왕을 배반하고 바사제국의 속국인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려고 한다는 거짓 소문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소문이 왕에게 들리면 당장 느헤미야는 자신의 자리에서 &51922;겨나게 될 것입니다. 음해입니다. 거짓 소문은 만들어 내기는 쉽지만 그 상처를 싸매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됩니다. 아니 심지어 그 악성의 인신 공격으로 인한 상처를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그 지도자가 도중 하차 해버리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소문은 소문을 낳습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거짓 인신 공격은 엄청난 결과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산발랏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좋지 못한 의도를 한 번 보십시오. 편지를 보내는데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당시 공식 문서는 파피루스 가죽에 내용을 써서 끈으로 묶은 다음 인장으로 날인하여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전달과정에서 일어날 내용 변경을 막고 기밀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그가 유다 땅의 책임자인 느헤미야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렇게 봉하지 않은 채로 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전달하는 자들도 그 내용을 보고 더 퍼뜨리도록 일부러 봉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짓으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몰고 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중에 이미 직간접적으로 그 상처를 경험하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나이 30세에 축음기를 발명했습니다. 그가 축음기를 만들고 난 다음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남을 공격하는 의도적인 거짓말은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사탄의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바로 비난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내어놓는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을 다스리고 입을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짓으로 남을 공격하는 사탄의 도구로 우리가 사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을 할 때 꼭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몇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진실한가) true? 두 번째는 꼭 필요한가 necessary? 세 번째는 이 말이 유익한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말을 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정돈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세 번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하는 사탄의 마지막 공격은 선지자까지 동원해서 율법을 어기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0절을 보실까요? 스마야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산발랏과 게셈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도 성공하지 못하자 마지막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의 선지자 혹은 제사장이었을 스마야를 뇌물로 사서 그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느 날 스마야를 보려고 했더니 그가 두문불출하고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직접 찾아갔더니 그가 느헤미야에게 말한 것입니다. 적들이 느헤미야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가장 안전한 성소의 외소, 외소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로 들어가는 문 바로 앞에 위치한 뜰을 가리키는데 그 곳에는 평상시에는, 제사를 드릴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규정되어 있는 그 장소에 들어가자고 유혹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율법을 어긴 자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고소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어긴 자는 죽일 수 있는 율법이 있으므로 충분히 느헤미야의 사역을 중단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벽을 짓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말씀을 어긴 죄목으로 고소당하면 가장 치명적이지 않겠습니까? 사탄의 공격은 이처럼 치밀합니다.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은 느슨하지 않습니다. 치밀합니다.
주님의 어떤 사역을 이루어가려고 할 때는 반드시 사탄의 이러한 공격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사역이 마무리 될 단계에서는 더욱 심각하다고 가르쳐 줍니다.
자, 그런데 이런 유혹과 시험은 느헤미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사역을 마무리짓지 못하도록 막는 시험거리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인가 입니다. 느헤미야가 3가지의 시험을 받았을 때 각각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해결방법입니다.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자신을 쓰러뜨리려고 할 때 느헤미야가 취한 해결방법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사역자체에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역을 할 때는 다른 것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에만 매달리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이것저것 신경 쓰면 초점이 흐려집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사역에 유혹이 들어오면 그대로 용납해버리고 맙니다. 학교생활 하셨을 때 이런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상하게 시험때만 되면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꼭 이 공부를 해야 인생이 성공할 수 있는가? 평소에 안 하던 인생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하지 않고도 성공한 여러 사람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문제를 꼭 시험때만 되면 끄집어내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초점을 흐트르지 않아야 사역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지금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사람 만나서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습니다. 하루 빨리 성문짝을 달아야 사역이 마치게 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역에만 집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방해작업이 있어도 사역의 마지막 골, 그 목표를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성벽재건 사역을 떠나 지금은 어디로든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느헤미야의 목표지향적 태도를 배우게 된다면 시험이 우리를 흔들어 놓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그들이 느헤미야를 거짓으로 인신공격하자 8절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너희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시험을 이기는 두 번째 요소는 평소에 자신을 정직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에게나 누구에게든지 거짓없이 성실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떳떳합니다. 공정하지 못하면, 깨끗하지 못하면 공격이 다가올 때 견딜 수 없습니다. 깨끗해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거짓 인신공격인데 깨끗하지 못하다면 정직성을 잃어버렸다면, 공평무사함을 상실했다면 어찌 설 수 있겠습니까? 깨끗해야 그래도 큰 소리로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아야 자신의 뜻을 계획과 목표를 끝까지 완수할 수 있는 법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보아도 그 자신의 정직함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한가지 덧붙인 것이 있습니다. 9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나의 손을 힘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오해와 중상모략은 하나님께서 막아주시지 않으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정직을 호소해도 어떤 경우는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공평하게 처신했다고 해도 거짓 인신공격을 쉽게 빠져 나갈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점을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를 받을 때가 있으십니까? 전혀 엉뚱한 중상모략을 받을 때가 있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짓 인신 공격을 받을 때가 있으십니까? 오해를 받을 때 우리의 아픔은 상상할 수 없는 경우도 너무도 많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얼마나 앞서는지 모릅니다. 되 갚아주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지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의 손을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로 해결되어야 완전한 해결이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11절입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같은 사람, 곧 제사장이 아닌 나 느헤미야는 결코 외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율법을 말씀을 정확하게 실천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해결책은 말씀에 근거해 그의 삶을 움직여가겠다는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 위에 굳게 서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수기 18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 울지니라.' 느헤미야는 말씀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말씀을 지켜야 함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에게는 죽음의 협박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정말 밤에 자객을 보내어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믿고 있었던 제사장인 스마야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긴장할 법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왕에게 잘못된 이야기가 들려져서 자신의 직분이 위태롭게 될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역에 충실했둣이, 또 다시 느헤미야는 죽음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그의 삶에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말씀을 가볍게 여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하나 뿐인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14-5세기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요한 후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루터보다 먼저 면죄부에 대해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인간은 돈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에 의하여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콘스탄스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어 쇠사슬로 화형주에 결박되었습니다. 화형 나무 근처에는 나무와 건초더미가 쌓여져 있었고 그의 목까지 덮이게 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형 집행관 폰 파펜하임은 후스에게 그의 신앙을 다시 한번 고려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양하였습니다. '나는 성서로부터 확증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이 점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시다. 내가 저작하였고 가르쳤고 설교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오늘 나는 기쁘게 죽을 것이다.' 마침내 불이 점화되었습니다. 후스는 목소리를 높혀 노래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가 세 번째 이 구절을 되풀이하고 '당신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되셨나이다'라고 계속해서 노래하였을 때 불길이 바람을 타고 그의 얼굴을 덮쳤습니다. 그는 여전히 입술과 머리를 움직였고 마침내 질식하여 죽었습니다. 그에게서 벗겨진 사제복이 불속에 던져졌고 그의 타버린 재는 거두어져 근처 라인강에 던져졌습니다.
후스는 말씀을 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복음은 오늘까지 우리에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적같은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함께 읽어보실까요? '성 역사가 52일 만에 엘룰 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성벽재건이 몇 일만에 끝이 났느냐하면 단 2달도 채 못되어 완성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빠른 기간이었는가 하면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그 완성 소식을 듣고 다 두려워하고 낙담할 정도로 빠른 기간에 마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면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느헤미야의 삶의 태도를 본받으면 반드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시험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풍랑 없는 인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나 문제와 시험과 유혹과 협박과 오해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 해결방법을 모르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여기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묵상하십시오. 그의 방법을 따라가 보십시오. 시험을 이기고 목표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 교회도 느헤미야의 모범을 따라 시험을 능히 물리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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