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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를 기울이십시오 (느 0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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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십시오(느 8:1-12)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는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의 개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성벽이 완전하게 세워졌습니다. 적절한 파수군도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성벽만 가지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52일만에 세워진 기적적인 성벽 가지고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답게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멋진 빌딩은 더 큰 목표를 향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교회 건물은, 예루살렘 성벽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벽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희 교회는 아직 개축 작업이 아직 마치지는 않았지만 마치고 난다면 우리 시카고 한인 연합 장로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의 해답이 바로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실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엘룰월, 말하자면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6월 25일에 성벽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이 엿새를 지나 칠월 첫날을 맞았습니다. 성벽 재건을 마친지 겨우 6일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오늘 본문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벽재건 했으니 축제도 필요했을 지 모르고, 어쩌면 52일만의 역사로 인해 피곤에 지친 몸은 쉬어야 할텐데도 불구하고, 쉴 여유도 거의 없었을 6일이 지난 칠월 첫째날에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왜 모여들었습니까? 모여서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청한 것입니다. 굉장합니다. 성벽재건의 기쁨보다 더 앞선 어떤 것이 눈에 보이십니까? 성벽보다 더 필요한 것이 보이십니까?
그것도 누가 어떤 말씀 사경회를 하니까 와보라고 말해서 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자신들 앞으로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무얼 하려고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했을까요?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말씀에 그들은 목말라 있었습니다. 말씀의 기근에 그들은 굶주려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 이것은 성벽 재건의 개혁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 성벽에의 갈급함보다 더 소중하고 귀중한 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배고픔입니다. 한때 70년대 한국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외친 노래가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마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말씀에 대한 갈급함'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시카고 지역의 개혁 선두 주자가 되려고 한다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말씀에 대한 갈급한 그 마음입니다. 남자만에게도 아니고, 여자에게만 아니라, 무릇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빵으로만 밥만 먹음으로 살 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 때문에 목숨을 건 순교자들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쟌 맥아더 목사님의 책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이란 책에는 그 목사님의 친구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고 성경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모은 성경중에는 16세기 영국의 성경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피의 여왕'이었던 메리여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인들을 핍박하며 신앙을 부르짖는 자들을 죽여 수많은 피를 흘렸는데 그 동료 신앙인들이 순교자의 피에 성경을 담근 피에 적셔진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치려면 붙어있어서 조심스럽게 펼쳐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또 자주 발견되는 것이 있었는데 눈물자국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읽은 그 옛적 순교자들의 모습이 담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너무도 흔한 성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간절함은 너무도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그리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십시오. ''말씀을 가져와 달라!'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 달라!' 우리에게는 예루살렘 성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로 가져와 달라는 우리의 열심이 필요합니다. 누가 강조해서가 아니라, 누가 Push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면서 읽는 말씀은 우리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3절을 보시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새벽부터 나와 있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정오까지 꿈쩍하지 않고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경 말씀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어지럽혀진 삶을 정돈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 놓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니콜슨이라는 사람이 쓴 '쟌 애덤스'의 실화 전기의 내용입니다. 200년전의 일입니다. 영국에서 몹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플래쳐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바운티'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남태평양 핏컨이라는 섬에 가서 많은 인디언들을 교화하여 작은 자유의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9년만에 그 집단 사회는 실패해 버렸습니다. 보통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 작은 섬에도 발생했던 것입니다. 살인, 폭력, 성도덕의 문란, 알콜 중독자등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중 한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지도자였던 플래쳐가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운티의 다른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던 쟌 아담스가 어느 날 창고를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다가 성경 한권을 발견했습니다. 9년동안 아무도 읽지 않았던 책이었습니다. 그는 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2개월간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기를 포기하고 다시 핏컨 섬의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글을 하나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핏컨 섬 사람들은 문명한 영국인들의 영향으로 불과 구년만에 술주정꾼이 되었고, 폭행자와 성적인 문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쟌 애덤스가 발견한 한 권의 책으로 애덤스뿐만 아니라 섬 전체가 소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니엘 웹스터의 말이 정확한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가장 확고한 기반은 하나님의 말씀외에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미국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를 좇아가기만 한다면 미국은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다.' 현대문명의 엄청난 발전으로 우리 인간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그저 그렇게 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거대한 나라입니다. 12억의 인구가 있는 잠자는 사자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굶주림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떡만 해결하면 나라가 강성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거의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93년에 한국의 자동차는 수입금지 품목입니다. 그런데 5만대 가량이 그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한두대가 아니라, 시계나 보석처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관 사람들이 오케이하면 됩니다. 썩은 것입니다. 부패는 문명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먹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성벽재건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무엇이었다구요?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한 갈급함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태도 한가지가 첨가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보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요.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들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펼때에 어떻게 했다구요? 모든 백성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존경한다는 표시입니다. 국회에 대통령이 들어오면 앉아있던 모든 국회의원들이 일어납니다.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나 듣는 마음, 이것은 중요한 우리 신앙의 태도입니다. 말씀을 들을때의 태도는 그 말씀이 역사하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경건하게, 경외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와는 네 개의 문자로 되어있습니다. 이네개의 문자는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냥 그대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와로 읽지를 못해서 아도나이-주님-그렇게 읽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여호와라고 읽지만 말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베낄때도 그 네 개의 문자가 나오면 목욕재개하고 다시 앉아 그 네 개의 문자를 써내려 갔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성사문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아무렇게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찮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일어서서 존경심을 표하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들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마음, 조심스러운 마음, 그래서 옛적 신앙인들은 성경을 이렇게 들고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함부로 다루지 않겠다는 표시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면 아멘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했습니다. 말씀을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아멘하면 엎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아멘으로 응답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더 깊은 경배가, 더 몸 굽혀 경배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7절과 8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망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말씀이 들려집니다. 율법책이 낭독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오늘 7-8절은 말씀이 들려질 뿐만 아니라 말씀을 해석해 주어 깨닫게 해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자들이-이들은 물론 제사장계열의 사람들입니다-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설명해주고 해석해주어 말씀의 참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설명해주고 해석해주어 말씀을 들을 때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 혼자서 하는 말씀의 사역이 아닙니다. 누가 같이 합니까?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 등등이 백성곁에 서서 말씀을 해석해주고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많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평신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설명해줄수 있는 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의 생명의 비밀을 알릴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장이 아니라 비대하기만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년부터 우리 교회는 매주일 오전에 각 선교회별로 말씀을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공부 리더는 각 선교회 회장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선교회 회장이 될 것이고, 그들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해석하여 주며,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무척 도전적이지 않습니까? 목회자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말씀을 더 가까이 하면서 많은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말씀 때문에 그들 가슴이 열린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 때문에 가슴을 치는 아픔을 맛본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하시는 용서하시는 사랑하시는 말씀 때문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깨달아 가면 갈수록 삶의 기쁨이 점점 차 오릅니다. 다른 것들이 주지 못하는 만족함이 서서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생겨납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을 이길 능력을 하나씩 하나씩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말씀을 바로 알면 참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서 주는 기쁨보다 더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읽어 올바르게 깨달은 말씀은 삶의 기쁨이 됩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으로 인한 기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힘이 되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연구에 의하면 새는 8일간 정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12일간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개는 20일입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500일간을 아무런 음식이 없이도 생존합니다. 혹시라도 참다운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없이 500일간을 무사히 지내는 거북이 성도는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자꾸 읽으십시오.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윌리엄 맥킨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아 지킬 수가 있고,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우리 조국의 운명은 더 고귀하게 바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 찾아 경건한 태도로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우리의 참 능력과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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