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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오미 정책 (룻 0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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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 선교사와 몰래카메라, 그리고 그들의 고뇌

최근에 터키의 텔레비전에 선교사들의 활동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방영되었습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마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접근해서 각본에 따라 질문을 하면서 대화를 유도해 갔습니다. 여기에 말려든 선교사들은 이슬람이 거짓종교요 무하마드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선교사들에 대해서 즉각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중에 한국인 선교사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는데, 다른 선교사들보다 이 한국 선교사가 이슬람에 대해 심한 비판을 해서 한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당국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답니다. 이 선교사는 긴급히 피신해서 현재 은신중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제한지역에서의 선교사역은 낭만이 아닙니다.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때로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위험을 무릅쓴다거나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만일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사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위험이나 고난은 선교사역에 방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위험이나 죽음이 아닙니다. 자기희생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역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들어가서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태국에 우리 선교사님들이 많이 가 있습니다만, 그분들의 고민이 뭔가 하면 씨가 안 먹힌다는 거예요. 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숨쉬고 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불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갑자기 숨을 안 쉬고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전도할 때 느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학문의 수도답게 철학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복음을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바울도 견디지 못하고 아테네를 일찍 떠나고 맙니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분쟁의 역사였습니다. 민족간의 분쟁, 국가간의 분쟁, 종교간의 분쟁, 종족간의 분쟁, 이데올로기간의 분쟁... 지난 20세기는 이데올로기간의 분쟁이 절정에 달했었고,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함께 민족, 혹은 종족간의 분쟁이 여기저기서 불거졌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세계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종교간의 분쟁이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종교간의 분쟁이란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쟁입니다. 이 두 종교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부정하면서 적개심을 키워왔습니다. 이 두 종교가 화해를 한다거나 사이좋게 지내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2. 어떻게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그래서 이슬람권에서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가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데다가, 그것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그들의 생활이기 때문에 개종을 한다는 것을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무슬림도 무슬림 나름이겠지요.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명목신자가 있는 것처럼, 무슬림도 nominal muslim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사회 자체가 이슬람 사회가 아니고 종교의 자유가 시행되고 있는 곳에서는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개인의 종교가 아니라 가족 집단이나 사회 집단, 더 나아가서는 국가라는 집단의 종교로서 이데올로기의 역할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 한 개인이 그 종교를 떠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또 그들의 신념 역시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에 못지 않아서 그들이 이슬람 신앙을 버리고 개종하게 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선교사로 파송받고 언어연수를 위해 영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처음으로 무슬림 한 사람을 만나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이슬람권에서 선교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와 흥분 속에 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말하더군요. '너 지금 나한테 기독교인이 되란 말이니? 그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생전 처음 만난 무슬림에게서 저의 환상이 산산조각 난 것이죠. 만약 그 사람이 저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무슬림이 되라고 했다면, 저의 반응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서 이슬람 선교한다는 것이 보통 각오로 할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국에 무슬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국이야말로 이슬람 사회가 아니고 종교의 자유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개종하는 무슬림들이 있지요.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무스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보다 기독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수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슬람은 확신에 찬 선교적인 종교입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영국의 블레어 총리가 코란은 아름답다며 두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총선이 다가오니까 표를 얻기 위한 술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만큼 영국에서 이슬람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자, 그렇다면 터키 같은, 더 나아가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탄자니아를 떠나면서 다음 선교지는 아랍권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없어요. 가서 마음껏 전도를 할 수가 있습니까? 어디 가서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까? 또 선교사라고 드러내 놓고 말이나 할 수 있습니까? 어렵게 몇 년 사역하고서도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 사람은 지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저는 그런 곳에서 가능한 선교사역의 모델을 이 룻기에서 찾았습니다.

3. 나오미에게 배우는 선교

제가 제한접근지역에서의 선교의 모델로 삼은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그래서 이 선교모델을 나오미 정책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선교사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서 여호와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흉년을 피해 먹고 살 길을 찾아 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오미가 여호와를 떠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살 때나 모압에 이민가서 살 때나 이 사람은 언제나 신실하게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일 뿐입니다. 나오미는 거기서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와 종교를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모르죠, 나름대로 열심히 전파했는지도. 그러나 전파했다 할지라도 아마 씨도 먹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 신을 섬기고 있었고, 그 사회에서 모압 사람이 자기들의 신을 떠나 새로운 신을 섬기게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나오미는 그냥 살았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오미가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여호와 신앙을 버리거나 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쉽지 않고 상당한 제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가장 엄격한 이슬람 국가라 할지라도 외부인이 합법적으로 들어와서 자기의 종교적 신념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 자유는 주어지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은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나오미처럼 소극적으로 자기 종교를 유지하며 살 수는 있다는 말이지요.

나오미는 10년 동안 한 사람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선교사가 10년 동안 아무에게도 전도할 수 없다면 어떻게 견디며 살 수 있겠어요? 그러나 나오미는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이민간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10년 아니라 20년이라도 부담없이 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산 결과는 어떻습니까? 룻이라는 한 영혼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10년만에 겨우 한 영혼 얻은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선교지에서는 몇 개월만에 교회를 수십개 개척했다는 선교보고도 있는데 말이죠.

제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니까 저를 후원하던 교회의 장로님이 이렇게 물으시더군요.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것이 투자한 것에 비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 교회에서는 IMF 터지면서 저를 후원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후원을 그만하기로 결정을 했었고, 이제 그 적당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투자의 효과면에서 본다면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10년 만에 한 영혼 얻는 투자를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그러나 나오미가 10년만에 얻은 한 영혼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고로 존경하는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주장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영혼은 10년의 세월보다 더 소중하고 천문학적인 선교비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투자의 논리로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선교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선교지의 상황이 다양한 만큼 접근하는 방식이나 정책도 다양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부분은 앞으로 기독교와 함께 세계를 양분하고 치열한 분쟁을 계속하게 이슬람권의 영혼들에게 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교정책이 바로 이 나오미 정책입니다. 선교사의 이름으로는 발도 붙일 수 없는 곳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섞여 살게 되면서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렇게 해서 그 중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생겨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후속조치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꽉 막힌 사회, 복음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는 집단에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이 나오미 정책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오미 정책은 굳이 선교지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진행되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나오미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룻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된 것처럼, 우리의 인격, 우리의 언행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이 감화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오미를 모압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해밀턴에 두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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