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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잊혀진 이름 오르바 (룻 0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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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오르바 (룻 1:14-18)

1. 기억될 뻔했던 여인

우리 말에 '-할 뻔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많았는데 그렇게 안됐을 경우를 말하지요. 가령 죽을 뻔했다는 말은 죽을 가능성이 많았는데, 운이 좋아서 살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살 뻔했다고 한다면 무슨 뜻입니까? 살 뻔했다는 것은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뭐가 좀 잘못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그만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가능성이 많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되었을 때는 참 안타까운 상황이 됩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다면 안타까울 것도 없겠지요.

저는 이 룻기에서 오르바야말로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어 빛날 뻔했던 여인인 것을 봅니다. 기억될 뻔했다는 것은 기억되지 않고 잊혀졌다는 말이죠. 그러나 기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오르바라는 이름은 여기서 이렇게 한 번 언급된 이후 영원히 잊혀져 버렸습니다. 오르바가 친정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시집을 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는지, 아니면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쓸쓸한 생을 마감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오르바는 나중에 나오미나 룻과 편지라도 주고받으며 살았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성경은 오르바의 일생에 대해서 영원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잊혀진 여인이 된 것입니다.

제가 오르바를 단순히 잊혀진 여인이라기보다 기억될 뻔했던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르바는 룻과 마찬가지로 나오미의 집에 시집온 모압 여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오르바는 기억될 만한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의 두 아들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인데,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말론이 형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며느리들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으로 순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르바가 맏며느리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말론의 아내는 룻입니다. 그렇다면 오르바가 먼저 시집을 온 것인지, 아니면 기룐이 형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오르바가 룻에 비해서 어떤 면에서건 뒤떨어질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룻보다 나이가 많았는지 혹은 시어머니의 사랑을 더 받았는지도 모르지요. 오르바는 모든 면에서 룻과 동일하거나 동등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선 오르바가 나오미의 집에 시집왔다는 것은 개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두 며느리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되겠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그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습과 종교에 동화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당시는 종교가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던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르바가 자기 친정, 자기 민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오미는 그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르바는 나오미와 헤어지기 전까지는 완전한 개종자로서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오르바 역시 룻에 못지 않게 효성이 지극한 여인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이 죽은 아들들과 자신을 선대(善待)했었다고 말하지요?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섰을 때 오르바 역시 시어머니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고목나무 같은 늙은이를 바라보고 살 것이 무엇이냐며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권유에 눈물로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붙잡았습니다. 결국 친정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돌아가는 오르바의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늙으신 시어머니를 버리고 떠나는 오르바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어쩌면 평생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룻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면, 오르바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2. 오르바의 선택과 룻의 선택

그러나 결국 오르바는 룻과는 달리 모압, 자기 민족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함으로써 영원히 잊혀진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르바의 선택과 룻의 선택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택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준 여종 하갈에게 멸시를 당해야 했습니다. 라헬도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 큰 약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셉을 낳았을 때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했어요.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사 4:1)고 그 상황을 묘사합니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서 다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일곱 여자들이 한 남자를 붙잡고 당신에게 경제적으로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을 테니까 우리를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가장 큰 저주는 자손이 끊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르바의 인생이 바로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자식 없는 저주받은 여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늙으신 시어머니 모시고 아무런 욕심 없이 그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만, 사회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의 젊음이 너무 아깝습니다. 젊다는 것이 오히려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버린 불효를 무릅쓰고 뒤돌아서고야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인생보다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것이었고, 다른 민족 가운데 이방인으로 섞여 살기보다 동족의 따듯한 품 안에서 살기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왜 오르바는 룻처럼 끝까지 나오미를 따르는 선택을 하지 못했을까요?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르바 역시 인간성을 보아서 룻과 별 차이가 없는데, 왜 어머니를 버리고 돌아가야 했을까요? 오르바의 미모가 뛰어나서 돌아가더라고 얼마든지 다시 시집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까요?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해 볼 수 있지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룻과 오르바의 차이는 미모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룻이 끝까지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그녀의 효성보다도 여호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룻의 선택을 인간적인 효성만으로 접근해서 바라보면 감동적인 이야기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의 이야기는 효성이 지극했던 여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야를 잉태하게 될 계보에 편입되는 이방 여인의 믿음 이야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룻이 나오미를 따르기로 선택한 것은 자신의 젊음과 미래를 포기하고 늙으신 어머니를 보필하겠다는 인간적인 정과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참된 신이시며 그의 백성이 됨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믿음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과 오르바의 차이였습니다. 오르바 역시 룻 못지 않게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또 공경할 마음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일생을 희생하게 할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비록 오르바가 개종하고 여호와를 섬기게 된 것 같았지만,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를 만한 데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넘어집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게 되지요.

3. 나오미의 실수

결국 오르바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고, 우리는 우리는 그것을 두고두고 안타깝게 생각을 하는데, 거기에는 나오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억지로라도 오르바를 데리고 유대로 갔어야 했고, 그랬다면 오르바 역시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이 되었을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룻처럼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르바처럼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룻 같은 믿음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르바 같음 믿음은 늘 돌봐주고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소위 양육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 씨를 뿌려놓고 잘 자라는지 벌레가 먹는지 돌아보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저 혼자 잘 자라겠지 하고 내버려 둘 수도 없습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의 인생을 염려해 그의 행복을 위해서 돌아가라고 했지만, 결국은 오르바로 하여금 영생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다시 우상과 헛된 신에게 돌아가도록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르바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한 나오미의 영적 판단력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도 이처럼 영적인 행복과 현실적인 행복이 충돌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는 오르바의 선택을 할 것인가 룻의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르바는 다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모처럼 얻었던 영혼의 안식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룻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젊음도 포기했지만, 참으로 소중한 것을 얻었다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젊은 인생을 포기하고서라고 얻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젊음 아니라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이라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일인 것이지요.

다행히도 룻은 포기했던 젊음을 보상받게 됩니다. 잊으려고 했던 여자로서의 행복을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그것 봐라, 이처럼 세상일을 희생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일에서도 풍성하게 축복해 주시지 않느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룻의 경우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너스일 뿐이지 본질적인 보상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법칙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충성하면 현실적인 축복도 많이 받는다는 공식을 여기서 도출해 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현실적인 축복은 보너스일 뿐입니다. 보너스는 받으면 좋은 것이고 안 받아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룻이 추구했던 행복은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받는 것이었지, 결코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것을 추구했더라면 오르바와 같은 선택을 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너스를 주시면 안 받을 필요는 또 없는 거지요. 그저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보너스를 안 주신다 할지라도 룻과 같은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보너스 같은 현실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느라 진짜 행복을 상실해 버린 오르바의 선택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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