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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없는 사람 (룻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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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요? 사람이 이름을 남겼다는 것은 후대에 기억될 만한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후대에까지 이름이 남았어도 좋지 않은 의미로 기억되고 있다면 이름을 남겼다고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가령 이완용 같은 사람, 얼마나 유명합니까? 이름을 남겼지요? 그러나 이완용을 보고 죽어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고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잘한 것도 없고 기억될 만한 일을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기 위해 죄없는 바위에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을 내기도 하고, 참 여러 가지로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정작 이름이 남겨져 기억되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은 잊혀지거나 찾을 길이 없게 된 수도 많습니다. 가령 '무명용사의 묘' 같은 경우지요. 그들이 목숨을 바친 대가로 후대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 이름들이 기억되고 칭송되어야 하겠지만, 누구인지 몰라서 '이름없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뿐이고, 그 묘에는 꽃보다도 낙엽만 쓸쓸하게 쌓입니다. 또 마땅히 이름이 기억되어야 할 사람이면서 스스로 이름을 감추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서 자기 삶에 주어진 역할 수행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지요.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 칼빈처럼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칼빈 스스로 실천한 것이지요.

오래 전에 제가 선교사 파송을 받고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의 일입니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다가 서부간선도로에서 그만 휘발유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서부간선도로는 막히기로 유명하지만, 밤이 되면 고속도로로 변하는 길입니다. 할 수 없이 아내에게 핸들을 맡기고 저는 뒤에서 차를 밀며 그렇게 주유소까지 갈 참이었지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무슨 추억만들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별 일이 다 생긴 것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갔더니 한겨울인데도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차 한 대가 후진을 해서 다시 돌아오더니 무슨 일이냐며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분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문제라면 배터리 점프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사정 얘기를 듣고 이 아저씨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자기 차 트렁크에서 밧줄을 꺼내 두 차를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유소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끝내 자기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한국 떠나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만들기를 한 셈입니다.

이렇게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 있는 반면, 정말이지 기억될 가치가 없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아무개 같은 사람입니다. 룻기를 기록한 저자가 이 사람의 이름을 몰라서 아무개라고 기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 사람의 이름을 분명히 밝혀서 두고두고 지탄의 대상이 되도록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룻기의 저자는 그렇게까지 하기보다는 이 가치없는 사람을 그저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잊혀져야 할 사람, 없었던 것으로 해도 좋을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오미의 친척입니다. 보아스보다도 더 가까운 친척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어떤 왕래가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가까운 친척이 살 길을 찾아 모압에 이민갔다가 10년만에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에서 우선 그 사람의 인간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나오미가 돌아온 줄을 몰라서 도와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동네 사람이 모두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나가서 환영을 했고 보아스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만 몰랐을 리가 없지요.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있었을 수는 있겠지요. 나오미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매도를 당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랬다면 동네 사람들이 나오미를 그렇게 환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남을 도와줄 형편이 안돼서 나오미를 도와주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보아스의 제안에 당장 밭을 사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재산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5-16).

마침내 베들레헴 지방법원 민사부 재판이 열렸습니다. 보아스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그것을 사라고 내가 자네에게 알려주는 것이네. 만약 자네가 살 것 같으면 사고, 만약 사지 않을 것이면 그 다음 차례인 내가 사겠네.' 엘리멜렉은 나오미의 죽은 남편이지요. 보아스와 아무개 이 두 사람은 엘리멜렉과 형제 사이입니다. 그런데 아무개가 더 가까운 형제이고, 보아스는 좀 먼 형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개는 엘리멜렉과 사촌쯤 되고, 보아스는 육촌이나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엘리멜렉의 땅을 지금 나오미가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은 이미 10년 전에 팔아버린 땅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나오미가 그 땅을 관할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토지제도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각 지파에게 제비를 뽑아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복하는 대로 그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는데,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중요한 매개체였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그 자손에게 이 땅을 주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그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자기들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고, 이 사상이 토지제도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서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방랑민족에게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땅을 똑같이 나누어서 똑같이 평등한 사회를 이루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똑같은 땅으로 똑같이 농사를 지었다고 똑같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농사기술이 다를 수도 있고, 그 해에 홍수가 나서 낮은 지대의 밭을 가진 사람이 망할 수도 있고, 남들 고추 심을 때 참깨를 심었는데 참깨값이 폭락해서 망할 수도 있고, 또 누구는 아들이 많아서 농사지을 일손이 많은 반면에 누구는 자식이 없어서 가진 땅에 다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수도 있고... 이처럼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경제활동의 결과에는 개인차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가 편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지요.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지고 결국에는 가진 토지를 팔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백성 모두에게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서 크게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후에는 모든 토지가 그동안 소유권이 어떻게 변했든 상관없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희년이지요. 사회적인 대변혁이 50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이 희년제도가 얼마나 제대로 이행되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많은 경우에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었고, 그래서 땅을 팔았어도 그 소유권은 어차피 원래의 주인에게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기 전이라도 언제든지 돈이 생기면 다시 되무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토지를 관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엘리멜렉의 두 아들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 토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나오미 뿐이지요. 나오미에게 돈만 있다면 언제든지 그 땅을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팔아야 할 만큼 망해버린 사람이 재산을 모아서 그 땅을 다시 사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보완책으로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해서 그 땅을 되물러 주도록 했습니다. 보아스나 이 아무개가 원래 엘리멜렉의 소유였던 땅을 산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제도에 의한 것이지요.

이 아무개는 보아스의 제안을 듣고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엘리멜렉의 땅을 사서 나오미에게 돌려준다, 이것은 그 땅을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엘리멜렉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 땅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나오미가 그 땅을 가지고 있다가 얼마 후에 죽으면 그것이 자기 땅이 되는 것입니다. 희년이 되어도 찾아갈 주인이 없으니까 영원히 자기 가문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지요. 계산에 빠른 아무개가 이 좋은 기회를 마다 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당장 사겠다고 나섭니다.

아무개가 땅을 사버리면 보아스로서는 낭패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그 땅에 관심이 없습니다. 보아스의 관심사는 룻이지요. 그러나 그 땅이 없이는 룻도 없습니다. 땅은 아무개에게 주고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면 좋겠지만, 법에 의하면 땅과 룻은 하나입니다. 그러니 자칫하면 룻을 저 아무개한테 빼앗길지도 모를 위기 아닙니까? 보아스가 침착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제 2탄을 날립니다. '그런데 말이지, 그 땅의 권리가 나오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데 어떡하지? 엘리멜렉에게 아들 말론이 있었잖아? 그 말론이 일찍 죽기는 했지만 그 아내 룻이 여기까지 따라왔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땅의 소유권이 룻에게 넘어간 상태인데 어떡하면 좋지? 자네가 그 땅을 사면 그 땅주인 룻과 결혼을 해서 그 아들에게 그 땅을 물려주어야 할텐데, 그래도 생각이 있나?'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상 아무개와 룻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라 죽은 말론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땅은 절대로 아무개나 아무개 가문의 땅이 될 수 없고, 괜히 그 땅값만 날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 말에 아무개가 어떻게 나옵니까?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이익이 될 줄 알고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손해가 뻔한 것을 보고 물러서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기주의자입니다. 나오미가 굶어죽든 말든, 젊은 룻이 과부로 평생을 살든 말든, 자기 형제 말론의 대가 끊기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관심이 있는 것은 자기 재산에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것뿐이지요. 이런 사람의 이름이 기억될 가치가 있습니까?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룻입니다. 그런데 아무개는 룻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권리를 포기합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발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하나님을 찾아온 이방 여인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여자였습니다. 어머니와 똑같이 이방 여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려는 이 룻을 온 마음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룻은 그 효성과 선한 행실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귀하고 소중한 여인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룻은 엘리멜렉의 밭에 감추어진 보배였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 보배를 다시 감추어놓고 모든 노력을 다해 그 밭을 사려고 합니다. 바로 그 보배인 룻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아무개의 실패는 우리에게 매우 심각한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눈앞의 이익만 챙기려 했던 아무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욕망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스스로 포기하고 되었고, 결국에는 그 이름이 하나님께 기억되지 못하고 영원히 잊혀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이름이 기억될 만한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귀하게 여기고 추구하고 있습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물론 남들과 마찬가지로 장사도 하고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재물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다 망했던 아무개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재물에 대한 욕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욕망으로 눈이 멀어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보아스 역시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하면서 파티를 열고 먹고 마시던 사람이었지만, 그 이름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어 길이길이 기억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기억되는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께 기억되고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믿음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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