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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발을 벗은 사람 (룻 0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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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뉴질랜드에 온 것이 작년 2월 초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딱 1년 반이 되었지요. 한국에서는 아직 추위가 극성이었는데,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내려보니 여기는 늦더위가 한창이었어요. 오클랜드의 바이블칼리지 근처에 Pak n Save가 있어서 쇼핑 겸 구경을 나가보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더군요.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이 사람들은 신발 살 돈이 없지는 않을텐데 맨발로 다니는 것이 참 이상했어요. 며칠 후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외국인 학생 담당 선생님 하는 말이 한국 학생들에게 늘 받는 질문은 '왜 당신들은 안에서는 신발을 신고 밖에서는 신발을 벗고 사느냐?'는 것이었답니다. 외국 사람이 집에 한번 오면 신발 벗는 것이 큰 문제지요? 어떤 사람은 신발 벗고 신는 데 한참이 걸립니다.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예요. 우리는 신발을 벗고 사는 게 편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신발 벗는 것이 아주 불편한가 봐요. 그래도 키위들은 아시아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이 있어서 좀 낫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 살 때 미국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면 흙이 묻은 신발을 신고 그냥 들어와요. 여기서는 신발이 그렇게 더러워질 일이 없으니까 설령 신발을 신고 들어와도 큰 문제는 없는데, 아프리카는 다르잖아요.

동양문화권에서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이나 힌두교 사원에 들어갈 때는 절대로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신발은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전에 들어갈 때는 더러운 것을 제거한다는 상징적인 표시로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나 관습은 성경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장면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곳에 더러운 신발을 신은 채 서 있을 수 없지요. 또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겸손과 복종의 상징입니다. 일종의 무장해제, 또는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있는 것과 그것을 벗고 맨발로 서 있는 것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신발뿐만 아니라 발도 사람의 신체 가운데서 가장 더러움에 노출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발은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어른 앞에서 이 발을 내보이는 것은 큰 결례입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 젊은 여자들이 여름에 대부분 양말을 신지 않고 다닙니다. 나이드신 어른들이 이것을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더군요. 아주 교양없고 무례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보았던 천사들은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감히 부끄러운 발을 내보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큰 권위 앞에서는 마땅히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반면에 일반적인 상황에서 신발을 벗거나 벗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되겠습니까? 굴욕과 수치를 당한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 사람의 권위나 존엄성이 심각하게 손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신발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학교가 끝나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신발이 없어진 경우가 몇 번 있었어요. 그처럼 난감한 일이 없습니다. 신발이 없으면 밖에 나갈 수가 없잖아요?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신발 없이 밖에 나가는 것은 괴롭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엉엉 울면서 맨발로 집에 가야지 어떡합니까? 남들 보기에 창피하기도 하고, 또 집에 가서는 신발 잃어버렸다고 혼나야 하고... 신발 잃은 것도 속상한데 위로는 못해줄 망정 왜 혼을 내는지... 도둑 중에서도 신발 도둑이 제일 비열한 도둑일 것 같아요.

그런데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계약을 확실하게 하는 증표로 신발을 벗어주는 것이 있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렸는데, 원래 신발을 벗기는 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였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아내는 다른 데로 시집가서는 안되고, 죽은 남편의 형제가 이 여자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아서 죽은 형제의 대를 잇도록 해야 하는 것이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남편의 형제가 이 의무 이행하기를 거부하면, 이 여자는 그 남편의 형제를 장로들 앞에 데려가서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도록 했습니다. 최고의 모욕을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집안은 신발 벗기운 자의 집안이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바로 룻에 대한 의무를 거부하는 이 아무개에게 꼭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신발 벗는 것이 그러한 모욕으로서가 아니라 계약을 확증하는 관습으로서 시행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무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신발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건네줍니다. 어떻게 해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모욕 형벌이 이처럼 계약을 확증하는 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도덕불감증에 걸린 세대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파렴치한 패륜아의 집안으로 취급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 아무개는 그런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재산에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습니다.

이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입니까? 바로 사사기예요. 그 사사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말입니다. 그래서 도덕도 바뀌고 관습도 바뀌었습니다. 신발 벗는 것이 과거에는 큰 수치였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너무 많다 보니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렇게 못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로 그 의미가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과거에는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율법이 이제 자기들 편리한 대로 멋대로 꿰맞춰져서 옳지 못한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우리가 홈그룹 모임에서 안목의 정욕에 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떤 분이 호주에 갔다가 해변에서 여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발가벗고 누워 있는 것을 보셨답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사회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인간의 도덕적 감각과 기준까지 바뀌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방치되고 조장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도 거슬리고 더 나아가 죄악을 대량으로 생산해내게 되는 이러한 구조들을 보편적인 가치로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룻기의 저자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이 아무개를 얼간이로 만들고 있는지 보세요. 언뜻 보면 아무개는 아주 당당합니다. 자기 주관대로 조금도 꿀림없이 하고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에요. 당시의 풍습에 따른다면 부끄러울 것도 없고 지탄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크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주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해서 성공하면 결국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저자는 이 아무개를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아무개는 신발을 벗는다는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당시의 풍습이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분명하게 그것을 말했습니다. 율법이 살아있는 한 그 의미는 결코 없어질 수도 없고 잊혀질 수도 없고 변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당시의 풍습이 율법의 조항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존재의 근간이 되었던 율법이 아무리 왜곡되고 남용되었다 할지라도, 신발 벗는다는 것이 수치의 극치라는 의미는 변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 당시에는 신발 벗는 것이 계약서에 싸인하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할지라도, 형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신발을 벗기운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온 역사를 통해서 진리인 것입니다. 이 룻기의 저자가 그것을 왜 모르겠어요? 그리고 후대의 많은 독자들이 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룻기의 저자는 그 당시의 풍습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무개가 신발을 벗었다고 자세하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또 독자들의 이 룻기를 읽으면서 행간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개는 지금 자기가 하는 행위의 의미를 모르기는 하지만 최악의 수치와 굴욕 속에 스스로를 처박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보와 장난꾸러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는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가 장난꾸러기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어른들을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니? 그게 무슨 뜻이야?' 장난꾸러기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인사라고 하는 거야. 어른을 만나면 너도 인사를 해야 해. 하지만 '안녕하세요?'는 내 인사니까 너는 '나는 바보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해.' 그러니까 바보는 좋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쫓아가서 '나는 바보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아무개가 바로 그런 바보인 셈입니다. 자기 하는 짓이 얼마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있고 당당하게 신발을 벗고 있단 말이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 풍습이 그러는데, 남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양심에 거슬리는 일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일은 없습니까? 남들이 다 하니까 괜찮다는 생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독약입니다. 사실 세상의 풍습을 따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이고 세상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받기 전의 인간을 묘사하면서 '이 세상 풍속을 좇았다'(엡 2:2)고 말합니다. 이 세상 풍속은 하나님의 말씀과 아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어떻게 충돌합니까?' 하는 질문에 윤목사님이 '심하게 충돌한다'고 하셨는데, 그런 세상의 풍습을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같이 따라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결국 우리가 남들과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아이덴티티, 즉 그리스도인의 증명서가 될 것입니다.

혹 우리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아무개가 하나님의 율법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감히 신발을 벗을 수 있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할 때 범죄로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일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도덕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어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루에 몇 번이나 신발을 신고 벗으세요? 신발을 벗을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악을 제거하는 훈련, 그 하나님께 복종하고 헌신하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을 때마다 이 어리석은 아무개처럼 수치스럽게 신발을 벗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부끄러움을 뒤집어씀으로써 그리스도를 또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지 않도록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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