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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데렐라와 에스더 (에 0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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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와 에스더 (에 2:12-18)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그러던 신데렐라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요정의 도움으로 왕궁의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고 거기서 왕자의 눈에 들어 우여곡절 끝에 왕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재 투성이의 지저분한 아이라는 뜻인데, 늘 구박받고 힘들고 궂은 일만 해야 했던 신데렐라가 졸지에 왕자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환상적인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죽었다 깨어나도 왕자의 신부가 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평생 밭이나 일구고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하층민들은 이야기 속에서나마 신데렐라가 되어 잠시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상상 속의 행복마저 없다면 가난한 하층민들의 삶은 더욱 고되고 비참한 것이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늘 시달리고 당하기만 하는 하층민들에게 복수의 즐거움도 줍니다. 그 불쌍한 신데렐라가 왕자의 신부가 되었다는 것, 얼마나 신나고 통쾌한 일입니까? 그리고 못된 계모와 언니들이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는 것도 얼마나 고소해요? 여기서 카타르시스가 발생하지요.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면서 그동안 억울하게 당했던 고통과 분노가 다 해소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이야기는 힘들고 지친 서민들의 삶에 끊임없이 희망이라는 에너지를 공급해 줍니다. 구박받고 궂은 일만 하던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녀에서 왕자비로의 변신은 누구나 동경하고 염원하는 성공, 신분의 변화 아니겠어요? 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지 모르는 거예요. 신데렐라처럼 운이 좋았다든가, 아니면 착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이든가, 혹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것이든가, 이처럼 어떤 요인에 의해 꿈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신데렐라처럼 착하게 산다거나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면에서 보면 여기 나오는 에스더는 전형적인 신데렐라이기도 합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사촌오빠의 손에 자랐습니다. 신데렐라처럼 구박을 받고 궂은일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고아라는 신분은 마치 천형과도 같이 그의 삶을 운명지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과거에 전쟁포로로 끌려온 노예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의 출신성분과 성장배경은 최악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왕비가 되었으니까 에스더야말로 신데렐라 스토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에스더는 얼굴이 예쁘다는 것 하나만으로 왕비를 뽑는 콘테스트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얼굴만 예쁘다고 왕비로 뽑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집안 배경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은 우선 얼굴 예쁜 처녀들을 불러 모아서 왕비 후보군을 만들었단 말이지요. 비록 그 후보군에 들었다 할지라도 전쟁포로의 후손이요 고아로 자랐다는 것은 유리할 것이 못 됩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원조회 제도가 없었던 모양이군요. 물론 그 후보군에 들 수 있는 조건으로 고아나 소수민족 출신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수민족 출신의 고아 처녀가 왕비를 뽑는 콘테스트에 나간다는 것은 결코 유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재 투성이의 하녀 신데렐라가 왕궁의 무도회에 나가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지요.

에스더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밝히지 않은 것이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정직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에스더는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왕비가 된 것입니까? 만약에 에스더가 왕비가 되기 위해서 없는 사실을 꾸미고 거짓말을 했다면 곤란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비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후보가 다니지도 않은 학교를 나왔다고 기재하면 불법선거운동이 돼서 당선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퇴학 맞은 것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허위학력기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영국의 한 대학의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력서에다 그 얘기는 절대로 안 씁니다. 그렇다고 제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까? 만약에 혹시 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뗀다면 그거야 정직하지 못한 것이 되겠지요. 왕비를 뽑는 콘테스트에 나온 처녀들에게 자신의 출신성분을 밝혀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거나, 또는 소수민족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조건이 있었더라면,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때로는 처신하는 데 있어서 지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이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사의 입국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나라에 선교사로 가는 분들은 선교사라는 신분을 철저히 감추고 들어갑니다. 학생 신분이나 비즈니스맨의 신분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우리가 그런 경우를 보고 거짓말했다,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교사역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하면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신분을 모두 밝힌다면, 그것이 정직한 일입니까?

적극적인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린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몰아내기 위해서 거사를 계획하던 사육신들은 일이 탄로 나기 전까지 세조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그들이 세조에게 충성한다고 말한 것은 기계적인 척도로 말하자면 명백한 거짓말이지요. 그러나 도덕성과 가치의 척도로 말하자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칫 이런 기계적인 순결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런 기계적인 윤리를 따르다 보면 더 큰 죄악을 범하게 될 수도 있거든요. 하나님은 그런 꽉 막힌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기계적인 도덕률의 대표적인 예가 철저한 율법주의지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자신들의 출신성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우선 자기들에게 닥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충분한 정당방위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전쟁포로로 끌려온 소수민족 출신이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면 본토인들이 그대로 두겠어요? 그런데 좀 더 큰 그림에서 본다면 이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더를 왕비로 삼아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에스더는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잘 살아왔거든요.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시거든요. 우리도 조용히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자꾸 불러내실 때가 있잖아요? 교회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다니고 앞에 나서지 않고 싶은데, 자꾸만 무슨 여전도회 회장이니 주일학교 교사니 하는 일들이 주어진단 말이지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 좀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이러면서 거부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하나님이 의도하신 계획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삶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처녀들이 왕비 선발 콘테스트에 나가기 전에 합숙훈련을 하는데, 마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후보들이 합숙생활을 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 기간이 무려 1년이나 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귀한 기름과 향품으로 몸을 정결케 한다고 했는데, 그 동안 궁중의 예법이나 왕비로서의 여러 가지 필요한 지식들을 배우지 않았겠어요? 결혼을 앞둔 아가씨들을 위한 신부학교가 있는 것처럼, 여기서는 왕비 후보들을 위한 왕비학교라고 할 만하겠네요.

그렇게 1년의 왕비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 한 사람씩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 때 왕의 마음에 들면 왕비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순서가 정해져 있었는지 아니면 교장 선생님이 지명하는 대로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차례가 돼서 왕에게 나가는 처녀들은 얼마나 긴장하고 두렵기도 하겠습니까? 왕의 마음에 들면 왕비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생과부로 늙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최대한 예쁘게 보이려고 꾸미고 치장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처녀가 왕에게 나아갈 때는 그 구하는 것을 다 주었다고 했어요. 어떤 처녀들은 그랬겠지요. “어머, 저는 귀걸이 큰 걸로 주세요.” “저는 배꼽에도 피어싱 해 주세요.” “저는 쌍꺼풀 수술 해 주세요.” “저는 우유로 목욕하고 나가게 해 주세요.” 자, 예뻐지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에스더의 차례가 되었을 때, 에스더는 기본적인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에스더의 차별성이에요. 에스더는 다른 처녀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처녀들마다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려고 별별 것을 구하는데 에스더는 아무것도 더 구하는 것이 없단 말이에요. 에스더가 그렇게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처녀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들 눈에 예뻐 보여서 선발되어온 미녀들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준비된 사람이 같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의 존재양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달라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것도 구하고 저것도 구합니다. 더 예뻐지기 위해서, 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구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런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더를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해도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화장도 하고 드레스도 예쁘게 차려입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방법으로 꾸미는 다른 처녀들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갖게 하신 에스더의 아름다움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더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감탄할 만큼 예뻤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 없는 사람들처럼 이것저것 구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구하는 행복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치장을 하지 않았어도 모든 사람 눈앞에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에스더처럼, 특별하게 가진 것 없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높아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쁩니까? 이처럼 세상과 차별성이 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소유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처녀들과 질적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에스더가 왕의 앞에 나아갔습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요즘 말로 안 봐도 비디오지요. 에스더는 신데렐라가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신분상승의 꿈을 꾸게 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신데델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준비된 사람, 그래서 세상과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간직한 성도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신데렐라도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본보기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에스더인 것이지요. 세상에서 구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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