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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멸에 이르는 비결 (에 0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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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에 이르는 비결 (에 5:9-14)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쩌면 그렇게 성품이 악하고 못돼 먹었는지, 악한 일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원한관계나 혹은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방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원망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투사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가 훨씬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과연 누가 악한 사람들인가, 혹은 누가 악하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질문에서 우리 자신이 결코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악한 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하만입니다. 이미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다가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이 돼서 모르드개의 동족 유다인 전체를 말살하기로 작정하고 일을 꾸밈으로써 그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 바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하만은 그 악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데, 어떻게 그 악한 성품이 발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군요.

이 날 하만은 마음이 대단히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왕비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비가 내일도 잔치를 열 것인데 또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왕비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한 그 잔치에 특별히 자기 혼자만 초대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다른 집에 초대를 받아 가는 수가 있습니다. 나 혼자 초대를 받은 줄로 알고 가서 보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초대를 받아서 와 있습니다. 그러면 김이 약간 새지요? 다른 사람들도 올 거라고 미리 얘기를 해 줬으면 기대를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혼자만 초대를 받았다는 것과 여러 사람들 중의 하나(one of them)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차이가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하만은 왕비가 왕을 위해 마련한 잔치에 다른 신하들과 함께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만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말이지요. 왕비로부터 one of them이 아니라 혼자만 특별한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만을 한없이 높여주었습니다. 하만은 이미 왕으로부터 높임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 권력과 세도를 맘껏 누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아름다운 왕비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되니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왕비가 왕을 위해 특별히 잔치를 베풀고 초대를 했다는 것은 긴요하게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면서 말하라고 하니까 왕비는 또 뜸을 들이면서 내일 말하겠다고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일도 꼭 하만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비가 뭔지 모르지만 그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왕에게 말해야 하는 자리에 하만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만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또 그만큼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왕비가 하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만이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겠어요?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즉 교만하다는 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말하기를 교만이 오면 욕(치욕)이 뒤따라온다(잠 11:2)고 했고, 또 교만은 패망의 선봉(16:18)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특히 교만함을 미워하신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고, 그래서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망령된 자라 한다(잠 21:24)고 했습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거나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만은 필요 이상으로, 혹은 사실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고 존중하게 되는 교만에 빠지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그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언제 교만해집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잘 나갈 때입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하고 큰 업적을 이루었을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저는 돈 많이 번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얼굴이 예쁜 여자가 교만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돼요. 마음 착한 사람이 그 착함 때문에 교만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고 교만할 수도 있을까요?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고 교만하게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들을 낳지 못해 멸시를 당하고 서러운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게 된 한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우리가 높아지고 잘 나갈 때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생각하면 마땅히 교만해져야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만하게 되어도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인정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 좋다고 교만해지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성경공부 많이 했다고 교만해진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만약 우리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만큼 의롭게 되었다면, 그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의 성취이고 우리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랑할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내가 이룬 구원이 되겠지요. 하나님께 감사할 것도 없지요. 하나님보다 내가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성취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득도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파괴시키고 형제를 파괴시키고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특히 교회 안에 교만이 횡행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여기 저기 병이 들고, 지체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 기초를 놓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기초를 잘 세워서 절대 우리 교회에는 교만이 자리를 잡지 않도록 우리가 서로 노력하고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인 저부터 결코 교만하지 않도록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겠습니다. 만일 저에게 교만한 모습이 보이면 여러분이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교만한 모습이 보이면 제가 책망하고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파멸의 교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만이 얼마나 교만으로 자신을 파괴시키고 있는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모르드개를 보았는데, 역시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절하지 않고 심지어는 일어서지도 않는 것을 보고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입니까? 왕비로부터 단독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왕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고, 또 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왕비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몸인데, 감히 저 유다인 놈이 자기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몹시 상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자신을 존중하고 대단하게 생각했던 하만은 크게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자존심이 컸건 것에 비례해서 상처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없이 높아졌던 하만의 마음은 상처난 자존심으로 인해 한없이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추락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하만은 극히 악한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과 아내 앞에서 자기의 영광을 뽐내고 왕비의 잔치에 혼자서 초대받은 사실을 자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모르드개가 그 모든 것을 망쳤다는 것이지요. 왕비의 잔치에 초대받으면서 높아진 하만의 허영심은 한시라도 모르드개의 꼴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일 모레면 칼을 맞아 죽게 될 놈이 대궐문에 앉아 공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도무지 못마땅합니다. 그랬더니 유유상종이라고 하만의 아내와 그 친구들이 오십 규빗이나 되는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당장 모르드개를 잡아다가 죽여 거기 매달자는 것입니다. 왕비의 잔치에 나가기 전에 꼴보기 싫은 모르드개를 처치해 버리고 기분좋게 왕비의 잔치를 즐긴다는 것이 정말 좋은 생각이라면서 그 악한 무리는 높이 나무를 세웁니다. 사자는 사냥한 고기를 나누고 악인은 노략한 죄악을 나눕니다.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 즉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파괴시킨다는 이 악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의 생각은 방향성이 있습니다. 한번 교만으로 방향을 잡은 하만과 그 무리는 잔혹함을 즐기면서 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왕비의 잔치를 기분좋게 즐기기 위해서 처참하게 죽이려는 모르드개가 그 왕비의 오빠라는 것도 이들은 모릅니다. 왕비가 특별히 하만을 초대한 것은 그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세운 나무에 하만이 달리게 되리라는 것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악한 생각으로 눈이 멀고 양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악과 함께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만의 악함과 교만함을 살펴봤습니다만, 내 속에 숨어 있는 하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교훈과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내 속에도 높아지고 잘나가게 되면 솟아날 수 있는 교만이 숨어 있고, 나를 대적하는 사람을 향한 분노와 잔인함도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감춰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를 만나지 못해서 그것들이 숨어 있을 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극복하고 제거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사심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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