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루 만에 바뀐 운명 (에 07:1-10)

첨부 1



하루 만에 바뀐 운명 (에 7:1-10)

에스더는 그 전날의 잔치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소원을 얘기하지 않고 하루를 더 연기시켰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잔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가 시작되자마자 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원의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참석자들 역시 왕과 하만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어제의 잔치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에스더는 어제 그 소원을 말하지 않고 한 번 더 잔치를 벌이도록 했을까요? 과연 어제의 잔치와 오늘의 잔치는 다른 점이 없을까요?

잔치의 외형적인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른 것이 전혀 없지만, 어제와 오늘 사이, 그 하루에 무슨 일들이 있었습니까? 우선 왕은 모르드개가 자기 생명을 구한 매우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르드개를 왕의 영광과 존귀로 대접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죽이려고 작정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은 모르드개야말로 가장 충성스럽고 또 존귀하게 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 이 위기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입니다.

하루 만에 이처럼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내일을 예측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장 5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의 한 집사님은 해병대 장교로 군복무를 했는데, 한번은 미군과 합동훈련을 했답니다. 각 소대별로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병사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인원점검이 되지 않으니 헬리콥터를 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다른 소대가 먼저 타고 출발했고, 없어진 병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병사 하나가 배탈이 나서 어디 숲속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오느라 늦은 것입니다. 그 병사는 욕도 많이 얻어먹고 소대장이던 그 집사님에게 얻어맞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타기로 했던 헬리콥터를 먼저 보내고 다른 헬리콥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먼저 출발했던 헬리콥터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 헬리콥터가 도중에 기계 고장으로 추락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배탈이 나는 바람이 고문관 취급을 받았던 그 병사는 졸지에 소대원 전원의 생명의 은인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만큼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고 하는 사람들 보면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인생 우리가 책임 못 져요. 5분 후에 헬리콥터가 추락하게 될지 백화점이 무너질지 어떻게 압니까? 하루 만에 운명이 바뀌기도 하고, 불과 몇 초 차이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렇다면 누가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의탁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할 바위시요 구원의 산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만에게도 그 하루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한 완벽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루 사이에 하만은 더 많은 악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뒤틀리더니 하만은 모르드개를 모시고 성중의 거리를 다니는 종노릇을 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은 하만의 몰락과 파멸을 예고했습니다. 사실 그 순간은 하만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의 파멸이 임박했다는 최후의 경고 싸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멸망하는 것을 즐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십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수가 많아요. 악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반응이 없으니까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악한 짓을 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하만에게는 하나님의 인내가 마지막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경고까지 보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만은 회개하고 돌이킬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거든요.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자신의 안전을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 인내가 끝나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해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없나요? 아직 회개하지 못한 것, 아직 고백하지 못한 것,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 아직 결단하지 못한 것... 없습니까?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을 잊어버리신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 기다림에는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다시 묻습니다. '왕비 에스더여, 소원이 무엇이오? 나라의 절반이라도 쪼개어 줄 테니 주저하지 말고 뭐든지 말하시오.' 과연 왕비가 목숨을 걸고 왕에게 말하려고 하는 소원은 무엇일까요? 아하수에로는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마침내 에스더가 입을 열어 소원을 말합니다. '폐하, 만일 폐하께서 아직 저를 사랑하신다면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아니, 왕비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왕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나 되나요? 남편이 아내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옛날에는 남편이 무능하고 힘이 없으면 아내를 빼앗길 수도 있었습니다. 아내를 빼앗기거나 아내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남편으로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남자인 왕으로서 왕비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모독인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왕비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 것은 왕비 개인과 관련된 사건이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왕비가 속한 민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가 목숨을 잃게 된 것은 내 민족이 모두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팔렸다는 것은 하만의 은 일만 달란트에 팔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은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왕이거든요. 그리고 그 민족을 모조리 죽이라고 조서를 내린 것도 왕의 이름으로 된 일입니다. 여기서 에스더가 자기 민족이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왕의 조서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3장 13절에 나오는 조서의 내용을 보면 '모든 유다인을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결국 에스더는 자신과 자기 민족이 죽게 된 것은 왕의 조서 때문이라고 왕을 고발하는 셈입니다. 아내를 보호하고 지켜야 할 남편이 오히려 아내를 죽이고 있는 셈이니 아하수에로서는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바로 하만 때문이거든요. 하만의 꾐에 넘어가서, 하만의 돈 일만 달란트 때문에 그런 기가 막힌 짓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겠지요.

그렇다고 왕이 잘못했다고 사과하거나 용서를 빌 수 없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희생양을 만들어 다른 사람이 뒤집어쓰게 만듭니다. 부시나 블레어가 잘못했다고 하던가요?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아랫사람이 책임지고 물러나게 하지요. 오늘날도 그러는데 하물며 신으로까지 추앙되던 고대의 왕들이 자기 잘못이라고 책임지겠다고 하겠어요?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고 책임을 면해야죠.

왕비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그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 때문에 체면이 상하기도 한 아하수에로는 그 분노의 대상을 찾습니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에스더가 하만을 특별히 초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범인을 붙잡아 놓은 것입니다. 에스더가 하만을 범인으로 지목할 때 왕의 심경은 좀 복잡하지 않았겠어요? 자기가 가장 총애하고 높였던 신하가 꾸민 일이 왕비를 죽이는 일이었단 말이지요. 그 사실에 대해서 아하수에로가 더 분노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가 이미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서 왕비를 폐위시킨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홧김에 신하들 말을 듣고 왕비를 쫓아냈지만,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겠어요? 그런데 이번에 또 신하의 음모에 빠져 왕비와 그 민족 전체를 몰살시키도록 만들었으니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아하수에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뜰로 나갔습니다. 분노를 달래거나 혹은 어떤 벌을 내릴지 잠시 생각하기 위해서였겠지요. 넋이 나간 하만은 그 사이에 에스더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합니다. 한 유다인이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분노하고 그 민족 전체를 학살하려고 했던 사람이 이제 한 유다인 여자에게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해야 돼요. 그런데 왕이 들어와 그 모습을 보고는 하만이 왕비를 강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한번 미워지게 되면 웃는 모습도 그렇게 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왕은 이제 하만이 하는 짓이라면 무엇이든지 악하고 못된 것으로 보게 됩니다. 하만은 왕비를 강간할 의사도 없고 그런 형편도 아니지요.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모습마저도 왕비를 강간하려는 것처럼 보일 만큼 왕의 하만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왕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시종들이 하만의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것은 왕비를 폭력과 모욕으로부터 보호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하만은 왕비를 욕보였다는 죄까지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법인데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다른 죄가 아니라도 왕비를 욕보였다는 죄만 가지고도 하만은 극형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내시 하르보나가 당장 나와서 하는 말이 하만이 왕의 목숨을 구한 충신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오십 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세워놓았다고 일러바칩니다. 힘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선행을 베풀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었더라면 설령 가진 것을 다 잃는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고달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권력에 기대서 나쁜 짓만 일삼았던 하만으로서는 왕의 신뢰가 거두어지니까 정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장 하르보나가 안면몰수를 선언하고 왕께 고자질을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분이 풀릴지 몰라 하던 왕은 마침 그 말을 듣고 거기다 하만을 매달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요? 하만의 시간표에 의하면 그 시각에 모르드개가 거기 매달려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계획표에 의해서 하만 자신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잠 11:8). 나무에 매달릴 뻔했던 의인 모르드개는 구원을 얻었고, 악인 하만이 와서 그 자리에 대신 매달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만이라는 한 인간의 몰락과 파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완벽하게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지, 얼마나 세밀하게 구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도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을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의인의 승리를 믿는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환난 중에라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믿음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 늘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