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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인의 유산 (에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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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유산 (에 8:3-8)

인류 역사상에 출현했던 악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악인의 힘이 클수록 그 폐해도 커집니다.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권력자 16명을 선별해서 기술한 책이 있더군요. 거기에는 우리가 보고 겪어서 잘 아는 현대사의 이디 아민이나 폴 포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디 아민은 아프리카의 진주, 또는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는 우간다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다음 나라를 황폐화시켰던 사람입니다.

동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경제현황을 보면 90% 가량의 경제권을 인도 사람들이 쥐고 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체제에서 중간관리자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식민지배가 끝난 후에 고스란히 경제권을 유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간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디 아민은 80% 이상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아시아인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모조리 추방을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제권이 아프리카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의 80%가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또 이디 아민은 정적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다른 부족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킬링필드의 장본인이지요. 내전의 와중에 권력을 잡은 그는 8백만 인구 중에서 2백만을 학살했습니다. 인구의 사분의 일이 살육을 당했으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과격한 공산주의 노선을 도입한답시고 화폐의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국가의 경제는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디 아민이나 폴 포트는 모두 쫓겨나게 되지만, 그들이 쫓겨난 후에도 그 악인들이 남긴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나왔다가 사라진 악인 하나가 남긴 상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악인 하만이 처형을 당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큰 보상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만이 저질러놓은 악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만이 내렸던 왕의 조서에 따라 12월이 되면 모든 유다인들이 살육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만이 남긴 악의 유산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인도에서 구스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나라였고, 평소에 유다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하만이 내린 조서를 이용해서 유다인들을 죽이려고 그 날만 고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 대해 특별한 적대감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재산이 탐나서 유다인을 죽이는 악한 일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유다인들의 목숨입니다. 에스더가 자기 목숨을 걸고 왕에게 탄원해서 일단 그 악의 시발점이 되었던 하만은 제거했지만, 이미 뿌려진 악의 씨앗들이 사방 도처에서 왕성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악의 씨앗이 뿌려지면 수십 배 수백 배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악을 심은 데 악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정폭력을 예로 들어보면,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50% 가량이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목격하면서 자랐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의 반 이상이 성장해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거예요.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자란 아이는 나중에 자기 자녀들을 학대하게 될 확률이 50%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악을 심은 대로 자녀들이 악을 거두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작은 악이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면 그것도 악이지요. 그 악에 대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상처가 없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표현을 하는데, 나중에 화해를 하고 용서를 해서 그 못을 뺀다 한들 그 못자국은 영영 지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또는 어디에선가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 영향을 남기게 되고, 누군가가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만이 뿌려놓은 악의 씨앗이 제거되기 어려웠던 또 하나의 이유는 페르시아 제국의 특별한 법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한번 왕이 내린 명령이나 결정은 절대로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법이 생긴 애초의 취지는 그렇게 나쁘거나 무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연합국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나라의 생존 여부는 두 나라 사이의 신뢰에 달려 있었습니다. 만약 한 쪽이 다른 쪽을 배신한다거나 또는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다투다가는 둘 다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두 나라 사이의 약속을 절대 파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런 안전장치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합국이 차츰 페르시아로 통합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 조항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한번 내린 왕의 명령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왕이 완벽한 존재라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고대의 왕들은 신에 준하는 숭배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존재가 이랬다저랬다 결정을 번복하면 권위가 실추되겠지요? 자, 그러나 왕의 조서는 결코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왕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 보면 아하수에로는 왕비를 포함한 모든 유다인을 학살하라는 조서를 내려놓고 그 잘못되고 부당한 명령조차 취소할 수 없는 무능한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말에 자기가 매인 꼴이지요.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되던 규칙이 오히려 왕을 바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칼로 일어난 사람은 칼에 쓰러지게 되고 말로 흥한 사람은 말로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다시 한 번 왕에게 청원을 합니다. 물론 하만은 처형을 당했고, 모르드개가 하만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만의 막대한 재산은 모두 에스더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이나 선물은 조금도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족의 고통과 슬픔이 아직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정말 원했던 것은 하만의 처형도 아니고 왕의 보상도 아니라 몰살당하게 된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망하고 잘못 되어도 나만 잘 되면 행복한 사람은 진짜 행복을 누릴 자격과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복 받아서 잘 살고 행복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이 많이 축복해 주셔서 이렇게 행복하다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라며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꼴을 보고 모세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분노했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백성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만약 저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면, 제 이름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주십시오”(출 32:32). 모세가 목숨을 걸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인도해 온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백성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자기 혼자 남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모세는 백성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희생을 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희생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희생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어느 기도회에서 한 분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 단어의 철자를 틀리지 않고 쓸 줄 안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희생을 했을 때의 고통을 알고 있습니까? 희생을 통해서 알게 되는 참된 사랑을 경험했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값어치 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인가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만큼 우리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에 이라크에서 피살당한 김선일 씨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과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해서 감격하고 칭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이상의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고, 실제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건은 이처럼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따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따라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고,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인데, 형제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의 하나인 것입니다.

에스더가 절규하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 여러 가지 요인과 사건들 속에서 뒤숭숭한 날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에스더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은 악을 심고 악한 결과를 남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사랑만이 악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어루만져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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