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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전에 산다 (에 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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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에 산다 (에 9:1-10)

마침내 12월 13일이 되었습니다. 이 운명의 날은 하만이 제비를 뽑아서 얻은 날짜였지요. 이 날은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왕의 명령이 두 가지예요. 하만에 의해서 작성되고 선포된 명령은 그 날 누구든지 유다인을 마음대로 죽이고 재산을 뺏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명령은 역시 왕의 명령이지만 모르드개가 쓴 것으로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죽일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한 나라 안에 같은 왕의 이름으로 반포된 전혀 다른 두 개의 명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어느 하나가 가짜이어야 할 터인데, 그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나라 안에 서로 다른 두 왕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두 개의 전혀 상반되는 왕의 명령이 존재하게 된 것은 첫 번째의 명령이 악하고 잘못된 것이라서 그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명령이 각자 유효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두 명령 가운데서 아무거나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혼란이 예상됩니까?

만약에 자동차가 오른쪽 길로 주행해야 한다는 규칙과 왼쪽 길로 주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동시에 시행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서로 상반되는 가치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 갈등이 생겨나지요. 그 갈등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투쟁이 계속되는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명령에 의해서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예고되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과거에 내려진 잘못된 왕의 명령을 취소할 수 없다는 페르시아의 특수한 관행이었습니다. 만약 하만이 만들어 반포했던 악한 명령을 취소하고 무효화시킬 수만 있었더라면 그러한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또 에베소서에서는 말하기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고 합니다. 골로새서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존재(골 3:9-10)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옛사람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우리 사는 모습이 아름답고 거룩하며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렇지 못해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고뇌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마치 페르시아 제국에서 과거의 잘못된 법을 취소하지 못해 큰 혼란이 야기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과거의 옛사람을 온전히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혼란과 고통이 초래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리고 끊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된 생활로부터 단절되어야 하고, 경건하지 못한 습관을 끊어야지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 과거에 그토록 추구해마지 않았던 학문과 출세를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어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것들로부터 단절되지 못하고 있다면, 성도의 내면세계가 상당한 부분 파괴되고 희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을 미워하고 제거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합법적으로 유다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그들의 사냥일입니다. 신나는 날이지요. 사냥도 산에서 토끼를 잡는 사냥이 아니라 울타리 안에 있는 토끼를 사냥하는 꼴입니다. 이건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에요. 유다인들은 피할 수도 없고 반항할 수도 없이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왕의 명령이 반포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자기보호 수단을 강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의해서 유다인들은 한데 모여 처자를 피난시키고 장정들은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의 명령은 백성들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내렸던 조서를 취소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첫 번째 조서에 따라 행동할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무리 첫 번째 명령에 따라 유다인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도 두 번째 명령이 내린 것을 보고 그런 계획을 그만두었어야죠. 그런데 그 날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유다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만큼 유다인들을 미워했던 걸까요?

그러나 대세는 이미 유다인들쪽으로 기운 후였습니다. 9개월이나 되는 기간 동안 유다인들은 무기를 만들거나 구입하고 군사훈련도 열심히 했을 거예요. 이제는 오히려 유다인들이 그 원수들보다 더 조직적이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쫓기던 자들이 이제는 쫓게 되었습니다. 모든 민족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어요. 물론 유다인들이 그만큼 군사력을 키웠기 때문에 모든 민족이 저희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게 멸절하게 되었던 유다인들이 기적적으로 구원을 얻고 그 원수 하만이 패망한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두려움이야말로 유다인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보낸 두려움입니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때때로 심한 두려움을 대적에게 내리셨습니다. 야곱이 세겜 땅 남의 동네에 빌붙어 살던 중 사고가 나서 그의 두 아들들이 그 마을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보복을 두려워한 야곱이 서둘러 가족들을 챙겨서 도망을 가는데, 이웃 동네 사람들이 아무도 야곱을 쫓아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35:5).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가는 곳마다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리고 성에 몰래 숨어들어갔던 두 정탐군에게 라합이 했던 말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수 2:8). 또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그들을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다고 했어요(수 5:1).

유다인들이 수가 많고 군사력이 강해서 모든 민족이 두려워하고 대적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봤자 유다인은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두려움이 임했을 때 모든 민족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페르시아 제국 내의 공무원 조직이 유다인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공무원 세계의 특징은 이기는 편에 줄을 선다는 것입니다.

제국 내의 소수민족으로서 졸지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유다인들이 이제는 모든 민족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그들을 해치려고 했던 원수들을 완전히 제압하게 된 이 놀라운 역전극을 보세요. 거의 1년 전에 지정되었던 그 날, D데이는 유다인들의 몰살(destruction)을 위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날이 되었을 때, 그 D데이는 유다인들의 구원(deliverance)의 날이 되었습니다. 몰살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꾸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역전의 스토리가 우리의 삶에서도 재현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극적인 역전의 스토리 아닙니까? 예루살렘 공회에 잡혀 재판을 받으시고, 로마의 군병들에게 모진 고초와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처참한 실패요, 사탄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을 때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승리의 순간이었습니까? 이런 역전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궁극적으로 역전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끊어야 합니다. 우리 원수 마귀는 많은 시험과 환난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과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참아야 하고 손해를 당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거짓과 포악함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을 바라만보고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실패이고 손실인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리석고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유명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던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되는 역전의 드라마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짓눌려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담대하고 힘 있게 일어서는 역전의 승리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이 기쁨이 되고 눈물과 한숨이 감격과 찬송으로 변하는 역전의 현장을 우리가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모시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의 삶 역시 이처럼 놀라운 역전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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