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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성능 엔진을 달아라 (에 09: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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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에 고성능 엔진을 달아라 (에 9:20-32)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요소는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구원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삶의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동력이란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지요? 자동차는 엔진에 의해 움직입니다. 엔진이 힘 있게 돌아가면 자동차가 잘 굴러갈 것입니다. 풍차의 동력은 바람이고, 선풍기의 동력은 전기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동력이 있어야 영위될 수 있습니다. 삶에 의욕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삶의 동력이 없다는 거지요. 아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삶의 동력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수험생은 머리를 싸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합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목표가 삶의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삶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욕망은 매우 강한 삶의 동력이 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겠지요. 권력에 대한 욕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를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공주병, 이것도 아주 강력한 삶의 동력이지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 말이지요. 그 사람들은 그거 없으면 못 살아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니까요. 자존심,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길을 택하도록 사람을 끌고 가는 동력입니다. 캘커타 빈민굴에서 한평생을 살다 간 마더 테레사의 삶을 끌고 갔던 동력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 또는 그 일로 부름받은 소명이겠지요.

우리의 삶에서 왜 구원의 기쁨이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삶을 비관해서 자살을 하려고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어요. 어쩌면 날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실직을 하고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들어가서 끌어내 살렸다면 어떨까요? 이 사람은 자기를 살려준 사람이 고맙기는커녕 원망스러울지 모릅니다. 다시 빚쟁이에게 시달리거나 실패자로서의 참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왜 살려주었냐고 대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와서는 건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고맙다는 말은커녕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기쁘지 않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고의 범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지요? 제비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준 이유는 은혜를 갚기 위한 것입니다. 미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구원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제비로 하여금 박씨를 물어다 주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올바로 파악한다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구원했느냐고 할 수 있을까요? 영원한 지옥형벌에 빠지게 내버려달라고, 죄와 사망 속에 있겠다고 할 수가 있냐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구원하심의 은혜를 체험하고서 왜 보따리는 챙겨주지 않느냐는 반응이 가능합니까? 구원만 해 주시면 뭐하냐고, 기왕 주실 바에는 부자도 만들어 주시고 출세도 하게 해 주셔야지, 다른 축복은 왜 안 해 주시냐고 따질 수 있어요?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랍고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있을 수가 없을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몰아가는 강력한 삶의 동력으로 작동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기쁨으로 할 수 있을 거예요. 궂은일도 기쁨으로 할 수 있어요. 힘들어도 늘 웃을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그 구원을 생각만 하면 장사 안 되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지요. 제비도 은혜에 보답했다는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해요? 그렇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은혜를 베풀면서 살게 되지요. 자기는 일만 달란트나 되는 큰 돈을 탕감 받았는데 겨우 백 데나리온 못 갚는다고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은 예수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삶의 동력이 된다는 것,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페르시아에 살던 유다인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종종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유다인들에 일어났던 일들이야말로 그런 표현에 딱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127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다인들은 이유 없이 12월 13일이 되면 죽어야 했습니다. 도망칠 곳도 없고 숨을 방법도 없습니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죽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성격이 아주 좋지 않고 못돼먹은 사람을 보고 성질 더럽다고 하는데, 주변에 성질 더러운 사람이 있으면 정말 인생이 고달프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직장의 상사가 성질 더러운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썼다 찢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몰살을 당하게 된 이유는 성질 더러운 하만에게 잘못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건 억울하다기보다 그저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렇게 아무런 소망도 없이 모조리 학살을 당하게 되었던 유다인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던 그날이 정작 다가왔을 때, 유다인들은 오히려 자기들을 해치려던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단 말이지요.

이 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모르드개가 이제 제국 내의 모든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한 규례를 세웠는데, 그것은 그렇게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고 기념하기 위해 그 날을 큰 명절로 삼은 것입니다. 하만이 유다인들을 학살할 날짜를 잡기 위해 제비를 뽑았었지요? 제비라는 단어가 페르시아어로 부르입니다. 그런데 수산 성에서는 하루 더 원수들과 싸우는 바람에 15일에 유다인들이 기쁨과 감사의 잔치를 열었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14일에 잔치를 열었기 때문에, 이 두 날을 명절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를 부르의 복수형인 부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비뽑은 날이라는 뜻이 되겠군요.

모르드개는 이것을 기록하고 규례로 삼아 유다인들이 대대로 잊지 않고 지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 유다인들은 해마다 이 날이 되면 큰 잔치를 열고 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만의 조서가 내려져서 온 나라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온 유다인들이 어떻게 금식하며 부르짖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 왕비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죽음을 무릅썼는지 그 이야기가 반복해서 낭독될 것입니다. 해마다 부림절을 맞아 그들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크신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배할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 죽은 후에도 그 자손들은 조상들이 경험한 그 구원을 반복해서 기억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3대 절기는 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절기들이 있는데, 모두 모세의 율법에 의해 주어진 절기들입니다. 그런데 이 부림절은 후대에, 그것도 저 멀리 이방인의 땅 페르시아에서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 유다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시아에 계속 남아 살았기 때문에 주류나 본류로 취급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류든 비주류든, 본류든 지류든, 하나님은 그 백성을 보호하시고 신실하게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에스더의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포함됨으로써 그것이 저 변방의 유다인들 가운데 일어났던 작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핵심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지요.

자, 다시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우리가 왜 구원의 기쁨과 감격 속에서 살지 못할까요? 아직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분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습니다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 나의 구세주로 영접했을 때,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이 용서를 받고 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아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도 아깝지 않고 내가 복음을 위해서 순교를 당해도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었건만, 왜 지금은 그 감동이 우리의 삶에서 동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잠잠한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 구원의 기쁨과 감동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기쁨은 구원을 받은 순간만 잠깐 누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자기 민족이 구원받은 것을 대대로 기억하며 기뻐하도록 규례로 정하고 또 기록으로 남겨 소멸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다윗의 시편을 보세요. 시인이 하나님을 그토록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에요. 시인은 끊임없이 그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파라는 이단 집단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하는 얘기는 엉터리지만,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어요. 누구나 구원받은 때가 있고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을 영적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육신의 생일이 있는 것처럼 영적 생일도 있다는 말이지요. 물론 명백한 회심의 경험이 있거나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 날을 영적 생일로 삼아도 좋겠지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어쨌든 만약 영적 생일이 있어서 우리가 매년 생일파티를 하는 것처럼 영적 생일을 기념하고 구원받은 것을 되새겨본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날마다 새롭게 하면서 늘 간직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도록 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굳이 구원파처럼 영적 생일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회심의 경험이나 혹은 세례 받은 날을 기념하면서 나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진지하게 되새겨봄으로써 그 때의 감격을 되살리고, 그야말로 주님을 향해 품었던 우리의 첫사랑을 회복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에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파에 시달리고 여러 가지 시험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기쁨이 우리 삶의 동력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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