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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타향살이 (에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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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는 고향일 것입니다. 고향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고향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상황은 그 고향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이탈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합니다. 고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고향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고향이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이유는 특별한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커넥션이란 개인이나 가문의 뿌리 같은 제도적 장치일 수도 있겠고, 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헤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고향이라는 상징 속에 농축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정지용이 노래했던 향수에서 고향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입니다. 또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연과 그리운 추억을 담고 있는 고향은 그래서 차마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곳이 되는 것이지요.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명절 때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다시피 하는 불편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이 매년 고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마치 종교적 의식과도 같은 사회적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고향을 찾음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그 고향에 속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고향이 물리적으로나 혹은 심리적으로 가깝다면 고향을 그리워할 필요도 없겠지요. 물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고향이 멀리 있을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어르신들 보니까 고복수가 불렀던 ‘타향살이 몇 해런가 손꼽아 헤어보니...’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하시더군요.

제가 처음 이민목회를 하게 되면서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분야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민목회가 성립될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우리는 고향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요. 물리적인 거리의 개념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지요. 교통수단이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인 거리라는 게 뭘까요? 예를 들어, 옛날에 왕에게 잘못 보여서 귀양을 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심리적 거리가 얼마나 멀겠습니까? 엊그제 고향에 다녀온 사람에게는 고향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요. 그러나 고향에 가보지 못한 것이 5년이 넘고 10년이 된다면 그 심리적 거리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멀겠지요.

과거에 전쟁이나 식민 지배를 피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사람들이 저 북간도 같은 곳에서 고향을 바라본다면 그 물리적 거리나 심리적 거리가 얼마나 멉니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간다 해도 얼마나 멀어요? 그러나 우리는 비행기를 타면 하루 만에 고향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쫓겨온 것도 아니고 도망쳐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그만큼 우리는 심리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을 그리며 밤을 눈물로 지새운다거나 하는 일도 없습니다. 종종 향수병에 걸리는 수도 있겠지만, 발달된 통신수단을 통해서 얼마든지 우리는 고향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향을 더 그리워하게 되고 고향 떠난 설움과 고통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고향과는 너무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참여하지도 못하고, 생긴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그래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스더의 이야기를 특별한 감동으로 접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스더나 모르드개를 우리와 동일시하면서 우리의 꿈을 꿀 수 있고, 그들이 경험했던 놀라운 일들을 우리의 비전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얘기밖에 없다면 우리에게 별 위로와 희망이 되지 않겠지요. 그러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 같은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은 에스더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9장까지의 이야기에서 본 것만으로도 완벽한 구성을 갖춘 대서사시가 될 수 있습니다. 문학적 관찰에 의한다면 이 10장은 사족과도 같습니다. 아니면 에필로그라고 해도 좋겠지요. 내용은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로서 모르드개가 그 민족과 함께 행복한 타향살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향을 떠난다는 테마로 가득차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고향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인류의 조상이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그 후손들이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며 돌아가려고 하는 방향성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또 그것이 성경의 테마이기도 하지요.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바로 이 테마를 가지고 실낙원과 복락원이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기회를 의미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단 말이지요.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던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쌍둥이 형 에서에게 맞아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의 평생의 삶은 타향에서 서러움을 당하며 늘 고향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늙어서는 애굽의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을 찾아서 아예 애굽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렇게 타향살이로 평생을 살았던 야곱은 죽으면서 꼭 고향 땅에 장사지내달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했던 사람들을 찾으라면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고향을 떠나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타향살이는 어떤 경험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고향을 떠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불안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부쳐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 떨어지면 굶어야지요. 이민성에서 비자 만료되었다고 나가라고 하면 쫓겨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영주권 신청을 한 것은 제도가 자꾸 바뀌고 상황이 변하는 바람에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런 불안을 떨쳐버리고 행복한 타향살이를 할 수 있을까요?

페르시아의 유다인들, 무지하게 불행한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돈 떨어지고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위기를 맞았었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정한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유다인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 위기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던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해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불안과 불확실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그 구원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동반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그 구원을 우리가 신뢰하고 바라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타향살이는 행복할 수도 있고 비참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구원받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다인들이 학살을 면한 것에 그치지 않고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어 온 민족이 행복하게 살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겨우 쫓겨나는 것을 면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우리 삶이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고 아름다워야지요. 여러분이 이 뉴질랜드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좀 더 행복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행복이라는 것이 자나 저울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한두 가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사는 것이 고향에서 살던 것보다 더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행복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을 봅니다. 한국에서는 정신없이 일하느라고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도 없었는데, 그래서 여기 오면 서로 존중하고 더 이해하게 될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있는 것이 시간뿐이라서 맨날 싸움만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입시지옥에다 밤늦게까지 학원에 붙잡혀 사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여기 데리고 왔더니, 보고 배운 것이 달라서인지 어느 날 보니까 부모와 말도 안 통하고 생각도 달라서 도무지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된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우리가 많이 보고 살지 않습니까? 그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타향살이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나서 에필로그를 덧붙인다면, 참으로 행복한 타향살이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 모두가 여기에 온 목적대로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타향살이를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이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를 통해서 참으로 행복한 타향살이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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