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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멸로 인도하는 무속신앙 (삼상 2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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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로 인도하는 무속신앙 (삼상 28:3-20)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후 차세대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평화를 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변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시대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처럼 자기들도 왕을 갖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왕이 있으면 왕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단결하여 주변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력을 모아 강대국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그래서 사울이라는 출중한 젊은이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사울의 출발은 아주 좋았습니다. 군대를 모아 이웃나라들의 침략을 잘 물리쳤고 국론도 어지간히 통일시켜서 나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의 눈밖에 나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눈밖에 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다윗이라는 젊은이가 다음 왕으로 선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커다란 공을 세우는 다윗이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차기 대권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울로서는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권좌를 위협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내란과 외침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 위협이겠습니까? 외침은 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고, 내란은 나라 안에서의 권력 이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권력자로서는 내란이 훨씬 더 위협적인 것입니다. 물론 외침에 의해서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권좌에서 쫓겨날 수도 있지만, 항복을 하고 침략자의 권위에 복속하게 되면 권좌를 보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속국이 되고 조공을 바친다거나 어떤 형태로든지의 불이익을 당하게 되겠지만, 최소한 권력의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란이 일어나서 그것을 진압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권좌에서 쫓겨나는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한 일인 것이죠. 어쩌면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패한 정권일수록 외세에는 굴복하고 나라 안의 저항세력을 철저히 진압하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길게 갈 것도 없이 우리 현대사에서도 보아 왔지 않습니까?

옛날에 역모를 꾀한 자에게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삼족이란 친족, 외족, 처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삼족에 해당되지 않아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만큼 철저하게 권력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는 얘기지요. 이것이 권력자의 생리인 것입니다. 사울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다윗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군대를 거느리고 기나긴 다윗 사냥의 기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자, 그러던 차에 선지자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나라의 정신적 지주요, 종교적 지도자를 잃었을 때 백성은 동요하고 민심의 술렁이지 않을 수 없지요. 이 때 사울이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사울이 죽자 재빨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3절,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낸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죠.

레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0:6,,7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0:27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비록 사울이 이렇게 종교개혁을 수행하긴 했지만, 그가 정치적인 동기에서 한 개혁이라면,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후의 정신적 공백을 메우고 민심이 다윗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수행한 종교개혁이라면 하나의 정치행위일 뿐입니다. 부도덕한 정권이 들어섰을 때 맨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이던가요? 바로 개혁입니다. 개혁이라는 껍데기로 자신들의 부도덕함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얼마나 서슬이 퍼렇게 개혁을 단행했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도둑놈 중에서도 나라를 훔친 도둑놈이요, 살인자 중에서도 대규모의 양민학살을 한 살인자가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혼란에 빠져 있는데, 한 어르신이 그러시더군요. '놀라지 마라, 박정희가 정권 잡았을 때도 똑같이 그랬었지.' 저야 박정희가 정권 잡았을 때 어떻게 했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때 태어났는걸요. 그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니까 조금 이해가 되더군요. 지금 4천5백만 국민 중에서 그때 전두환 정권의 개혁을 진짜 개혁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사울의 종교개혁도 그와 똑같았어요. 그의 종교개혁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었는지 잠시 후에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도자 사무엘을 잃은 큰 위기를 맞았을 때 원수 블레셋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습니다. 사울도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는데, 보세요,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렸어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사울이 겁쟁이라서가 아닙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세요? 그가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나 컸다고 했어요(삼상 9:2).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족속의 학대를 받고 있을 때 군대를 모아 암몬 군대를 멸절시킨 것이 바로 사울이었어요(삼상 11:11). 그러던 사울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리고 보호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을 때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굳건히 세워볼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해서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왕이 나라를 구하고 굳건히 세우기는커녕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그 나라의 불행입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지방색을 부채질하고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만 남겨 놓았던 과거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나라를 구하고 굳건히 세울 수 있는 지도자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여호와께 물어도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만큼 두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때때로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더이상 처절할 수 없을 정도로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처절한 아들의 부르짖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처럼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주님처럼 그 침묵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은 결정이 돼 있는데,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을 바꿔 달라거나 취소해 달라고 떼를 쓸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침묵 앞에서 우리가 아무리 떼를 쓰고 부르짖는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울도 그 하나님의 침묵에 순종할 줄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어야죠. 그랬더라면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시고 사울에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입을 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군대는 눈앞에 들이닥쳤고, 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은 대답해 주시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기는 알아야겠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종교개혁으로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찾아 묻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는지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억지를 써서라도 대답을 듣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까지 자행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은 하나님의 방향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그의 종교개혁이 얼마나 엉터리였으며 거짓된 것이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그녀의 도움으로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냐? 아니면 귀신의 장난이냐?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주석성경도 상당히 보수적인 측면에서 편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의 장난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비록 신접한 여인이 하는 행위들은 귀신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 사무엘을 보내셔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 나타난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지 귀신의 장난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신접한 자를 추종하는 일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특정한 사건에 우선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를 통해서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신접한 여인의 입을 통해서 대답하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또 이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왔다고 했어요. 성경에서는 회화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올라간다거나 내려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어요. 올라간다는 것은 하늘나라로, 하나님의 영광에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반면에 내려간다는 것은 음부, 지옥의 고통으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붙잡힌 시므온도 구하고 양식도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야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셉도 죽었는데 만약에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될 것이다.' 극심한 슬픔과 고통을 야곱은 음부로 내려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나사로는 올라갔지요? 반면에 부자는 내려갔습니다. 따라서 내려갔다는 것은 사망, 고통, 멸망, 음부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이 지금 땅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무엘은 음부로 내려갔었다는 얘기지요.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음부로 내려갔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사무엘의 모습을 한 귀신이 한 마리 올라온 것에 불과합니다.

15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내가 지금 죽어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데 왜 네가 나를 불러 올려서 귀찮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도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대선지자의 영혼이 이 지상의 하찮은 신접한 여인에 의해 불려옴울 당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여인은 아브라함도 불러오고 모세도 불러올 수 있겠네요? 기독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 영혼이 절대로 이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 심판에 따라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하는 것이지, 구천을 맴돈다거나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천국이나 지옥에 간 영혼이 볼일이 있어서 다시 이 세상으로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은 부자가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간구하기를 '저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서, 다시 말하면 지상으로 다시 한번 보내서 내 형제들에게 증거하여 그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지상에는 아직도 이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굳이 나사로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거절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다시 지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무엘이 하나님의 법칙을 깨뜨리고 신접한 여인의 초혼하는 힘에 이끌려서 이 땅으로 나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요?

그런데 문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다' 하는 말도 사실이요,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다' 하는 말도 사실입니다. '내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한 말처럼 그 다음날의 전투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귀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냐? 이런 논리를 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주석가 바클레이는 아주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짜 사무엘의 말로 인해서 사울은 심히 두려워하고 완전히 기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마귀의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범죄했을 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여 영원히 멸망하도록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룟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붙잡혀 사형선고를 당하고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뉘우쳐서 받은 돈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다시 가져왔어요. 그리고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그만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파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도 지금 그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나타나 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불쌍한 사울을 몰아붙여 끝내 회개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도록 낙심케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가 사무엘이었다면 먼저 사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촉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칼을 피해 망명중인 다윗과도 화해하도록 권고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사무엘이 원하는 바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욕심과 고집대로 행동하다가 결국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을 택했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영영 멸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우려할 만한 현상이 바로 이 사울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바람, 환생신드롬이 휩쓸더니 급기야는 온 나라가 무당과 신접한 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정치인이고 기업인이고 실력있고 쟁쟁한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심진송이한테 달려가고, 언론에서도 이 다음에 누가 총리가 될 것인지, 경기가 회복될 것인지 안될 것인지를 심진송이한테 물어보는 나라를 건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까? 황낙주 국회의장은 책상을 한강과 직각으로 두면 좋지 않다는 풍수쟁이의 말에 따라 의장실 집기들을 몽땅 바꿔 배치했다고 해요. 이번에 매스컴을 많이 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특별히 굿도 많이 하고 점술가들의 조언을 많이 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95년 말에 '한보는 망한다'고 예언을 해서 그 동안 엉터리 예언을 했다고 질시를 당하던 한 역술인이 요즘엔 주가를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중인 무속인의 수가 6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다방에서 사장님, 또는 목사님 하고 부르면 수십 명이 대답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다는 한국의 목사도 사실은 6만 명이 안됩니다.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가 약 46,000개쯤 되고, 전 교역자 수가 6만 명쯤 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속인 수가 6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입니다. 또 이 사람들 하는 작태들 보세요. 심진송이가 김일성 죽을 것 알아맞혀서 유명해지니까 이제는 너도나도 하는 말이, 이번 대통령에는 누가 당선될 것이다, 내각제 개헌이 언제 실현될 것이다, 이런 얘기들을 말 해대는 겁니다. 그야말로 혹세무민하는 거예요.

1년에 복채로 지불되는 돈이 2조원이 넘는답니다. 얼마 전 방송보도에서는 그런 돈이 8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추측보도했다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적은 돈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점술과 무속이 드러내 놓고 범람하는 사회는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이 왜 그렇게 사울이 하던 짓을 닮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경치좋고 조용한 곳에는 최신식 건물들이 들어서는데, 그 건물들이 무슨 건물들인지 아세요? 바로 굿당이랍니다. 굿하는 장소요. 그 굿당이 요즘 그렇게 성업이래요. 정말 망하려고 작정들을 한 것입니까?

전호진 박사님이 최근 한 잡지에 '부흥하는 샤머니즘, 쇠퇴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쓰셨더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이 멈추었다고 우려를 하고 있는 반면에 무속신앙은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속신앙이 이렇게 발흥하는 것은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무속신앙을 추구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겸손히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조국이 사울의 전철을 밟으면서 파멸로 내닫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정신을 차리고 우상과 미신으로부터 돌아서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갱신되어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나라의 국사가 점쟁이의 말에 좌우되지 않고 순리와 정의에 때라 행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시간 조용히 1, 2분 동안 우리 조국의 위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모두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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