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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느헤미야의 최종적인 개혁 (느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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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최종적인 개혁 (느헤미야 13:1-14)
 
이스라엘의 언약

한 민족이 망하는 이유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으면 유혹에 쉽게 무너지고 현실에 안주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유혹을 물리칩니다. 변화를 환영합니다. 현재의 모습을 포기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미래의 물결에 자신의 삶을 과감히 던집니다. 우리가 꿈을 붙잡으면 위기의 순간에 꿈이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그러나 위대한 꿈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꿈은 시련을 먹으며 자랍니다. 꿈이 클수록 시련도 크고 넘어야 할 장애물도 많습니다. 꿈꾸는 자는 시련을 통과하고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꿈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꿈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꿈을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과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위해 대가를 치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로부터 시작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자신들의 꿈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벽을 쌓아가며 그들에게는 더 큰 하나님의 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선택된 백성으로서 세상을 위해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깨닫게 되면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이 지은 죄까지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세상을 향한 제물로 쓰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언약을 갱신합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들을 불러서 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변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뤄가는 실천자로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이 갱신한 것은 여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했습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과 믿음의 혈통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입니다.
두 번째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안식일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장소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하고, 그분을 경배하여 영적인 힘을 얻어 육체와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그들의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갱신한 것은 성전세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성전세를 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온전히 드려지도록 믿음의 분량대로 성전을 위해 헌금했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성전을 위해 헌금을 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제사에 쓸 물건을 드렸습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활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섯 번째로 그들은 첫 열매,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가 하나님의 구원에 있음을 확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갱신한 언약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에게 바쳐졌고, 레위 사람들이 내는 십일조는 다시 제사장에게 바쳐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배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지키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소득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 되고, 생활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약의 갱신은 위대한 것이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느헤미야

봉헌식을 마치고 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떠나 바사 수산궁으로 갑니다. 이 기간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짧게는 2-3년에서 길게는 12년까지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좋지 않은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영적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3장을 통해서 보면 이 일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 기간이 길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바사 왕궁에서 예루살렘이 다시 악한 자들로 인해 폐허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헤미야는 젊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비전을 받고 처음 예루살렘에 갔을 때가 40세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가 12년의 총독 기간을 마치고 바사의 궁에 머물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B.C.425-420년으로 따져보면 그의 나이는 65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나이는 오늘날 우리의 형편대로 따지자면 은퇴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다시 한 번 기도 가운데서 예루살렘을 향해 불타는 열정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젊은 시절, 바사의 왕궁을 떠나 예루살렘을 찾아왔던 때보다도 느헤미야에겐 더 큰 의지가 있었고 더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벽을 재건할 때보다 더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그 땅에 있는 악한 일들을 개혁했습니다.

꿈을 이루는 지도력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Vision’입니다. 꿈을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Revision’입니다. 비전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Supervision’입니다. 비전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감독자로서 관장하는 것입니다. 꿈을 꾸지만 그 꿈을 개정하지 않고, 감독하지 않는다면 꿈은 꿈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새롭게 예루살렘을 찾은 느헤미야는 꿈을 새롭게 하고, 꿈을 감독하는 ‘꿈의 지도자’로서 돌아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세 가지 개혁을 합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 13장 말씀이 구약의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경에구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느헤미야가 바사의 왕궁에 머물 때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느헤미야 13장의 메시지가 구약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이 기록을 끝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침묵합니다. 역사의 긴 어둠 앞에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구별된 사람을 후원하고, 구별된 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꿈의 개정자요 비전의 감독자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제일 먼저 구별된 사람으로 살 것을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것은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은 사람은 그가 레위인이요 제사장일지라도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아십은 당대의 대제사장이요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명단에 가장 먼저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의 삶을 구별하지 못해 13장에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재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했던 발람처럼, 그는 권세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의 세력과 결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자가 이방인인 산발랏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발랏의 친구인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을 내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악을 행했습니다.

계속되는 ‘죄’

7-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여기서 ‘알았다’라는 것은 그 사정을 낱낱이 조사해서 진상을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분노는 인간적인 분노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분노는 철저한 자기 절제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며 분노하시고 그들의 상을 뒤엎었던 것처럼 그는 도비야의 물건을 내던진 후에 말씀에 따라 방을 정결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대로 그 방을 사용하도록 돕습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면 백성들은 엘리야십보다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거룩을 버리고 구별된 삶을 포기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의 꿈을 중도에 포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질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23-29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살피기 위해 아스돗 사람과 암몬 사람, 모압 사람과 결혼한 이스라엘 가정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방의 방언은 하는데 히브리 방언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느헤미야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징계합니다. 언어를 잃어버린 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엘리아십의 손자가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참지 않고 쫓아 내버립니다.
우리는 여기 느헤미야서를 보면서 문제는 반복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도 악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보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반복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꿈도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꿈은 계속해서 새롭게, 정금과 같이 개혁되고 감독될 때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개혁하고 나서 교회 이름을 ‘개혁하는 교회’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유혹에 쉽게 빠지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개혁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있고, 세상을 정복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가 느헤미야와 같이 개혁할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여쭙고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방인과 섞여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우상에 빠져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만약 혈통으로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이방의 신을 섬긴다면 느헤미야는 그들도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일지라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느헤미야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을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으면서 물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마지막 세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거룩한 공간을 지켜라

두 번째 명령은 구별된 사람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10,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성전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습니다. 그 증거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레위 사람들은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세를 드리고, 성전에 필요한 것을 헌물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퇴보한다는 것은 헌금으로 알 수 있습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서 아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면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가 싫고 사람이 싫어서 그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와 사람이 싫다면 이미 자신의 시선이 하나님으로부터 교회와 사람에게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에 마음도 바뀐 것입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라고 말씀합니다.
오염된 물일수록 깨끗한 물이 더 많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부패한 교회일수록 예배를 위해, 복음을 위해 더 많은 헌금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더 깨끗한 순종과 더 많은 사랑이 교회로 흘러들어올 때, 교회는 새로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대에 하나님의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주신 세 번째 구별의 부탁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시간을 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결단하며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약속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장사하고, 이방인에게 성문을 열어놓고 그들의 성전과 장소를 공개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장사꾼을 몰아내고 성문을 굳게 닫은 다음 레위인을 불러 정결케 하고 훈련시켜 성문에 배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가 무장을 하고 성소와 지성소를 지킨 것처럼 우리는 믿음의 결단을 갖고 우리 믿음의 지성소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거하는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는 하나님과 연락하며 하늘의 은혜와 생명을 이 땅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가라 가라 가라

철저하게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사랑했던 백성들을 위해 했던 요한복음 17장 기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마지막 메시지였다면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재림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구별을 원하고, 거룩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장 6절을 보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본래 세상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사탄의 사람으로, 죄의 자식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찾아오셨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가운데 있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6,17절은 변화된 우리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진리로, 말씀으로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철저히 우리를 구별하시는 목적이 17장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우리를 구별하신 목적은 다시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짓고,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데도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별하고 새롭게 해서 다시 이 땅으로 보내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7장 20절은 그 이유와 목적을 설명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우리의 말을 인하여 구원을 받을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이 올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별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됨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의 제물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느헤미야가 수산궁을 떠난 것처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세상 속으로 들어야 합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우리의 몸이 부서질지라도 주님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서, 구원하는 자로서 거룩함에 참여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일어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꿈을 붙잡으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이루어야 할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이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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