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헌신과 감사의 축제 (느 11:1-2)

첨부 1



헌신과 감사의 축제 (느헤미야 11:1-2, 12:43-47)
 
스탈린의 딸 스페트라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미국 생활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녀는 “제 스스로 뭔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이 결정해준 대로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되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는 자신이 얻은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 무척 부담스러웠던 것이었습니다.

권리를 바르게 행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권리를 잘 행사하는 것은 의무를 바르게 이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떻게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지 잘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서면 어떻게 권리를 행사할 지에 대한 자기 주장을 펴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오르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바르게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미디안 족속을 기드온과 3백 용사를 들어 물리치셨습니다. 승리한 기드온의 용사들은 기드온에게 그들을 다스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삿 8:23)고 대답합니다.
기드온은 3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보다도 자신의 권리를 바르게 고백하고 행사함으로 진정한 승리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성벽 재건을 52일 만에 이루어냅니다. 자신의 성공을 축하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겠지만 그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더 많은 권리가 주어질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의 권리사용에 있어서 첫 번째 우선 순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당신의 뜻을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나의 것을 가지고 당신의 뜻을 순종하고 섬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일들을 보며 불평하라고 주신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왜?’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정확하고 바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오늘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나에게 말씀해주신다면 내 모든 것을 다바쳐서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큼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뜻을 듣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자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에게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시지 않는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는 두가지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해내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들로서 주님의 뜻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합한 자기 뜻을 세우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라는 말씀이 목사님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해왔지만 정작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세운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지만 자신의 자유와 권리, 아들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자발적으로 세운 자기 의지와 자기 뜻, 자기 헌신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많은 기도를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기도응답의 조건은 먼저 그 분의 뜻 안으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우리가 그분의 뜻 안으로 우리의 삶을 선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나의 권리를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리는 것이 바로 기도응답의 핵심입니다.

주의 뜻과 일치된 삶

느헤미야가 민족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일치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느헤미야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이요, 그의 삶이 형통하게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추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모든 것을 헌신하며 나아갔습니다. 이런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공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공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에게 성벽 재건뿐만 아니라, 영적인 재건과 생활의 재건을 이루는 기회와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이스라엘이 영적인 부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재건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했듯이 백성들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통해서 백성들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느헤미야 11장 1, 2절입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이 본문은 내용상으로는 7장 4절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당시 예루살렘 성읍은 1백42년 동안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황폐했습니다. 또 성벽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거하지 않아 성벽을 적들로부터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인구를 재배치해서 예루살렘 성읍을 중심으로 해서 유다를 견고히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읍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다섯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읍은 하나님의 전이 있어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율법을 잘 지키도록 요구받았습니다.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땅에 사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두 번째, 예루살렘은 상업도시가 아니어서,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장사를 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백성들 중 많은 수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거하는 집이 농토 가까이 있기를 원했지, 도시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은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살기보다는 조상의 집이 있었던 고향땅에 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예루살렘 성읍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고 그리 비옥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산다는 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한 결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 가운데 임재하시겠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읍은 중요한 성읍입니다. 스가랴 8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국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통한 축복의 말씀을 이방에 비추도록 부름받은 선택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을 굳건히 지켜야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성 가운데 머물게 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가진 권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도록 돕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세 부류의 사람이 예루살렘 성읍에 거합니다.
첫 번째, 백성들의 두목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층으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읍에 머무는 것이 마땅하고 용이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백성들의 두목을 그들의 주권과 권리에 따라서 머물게 한 다음에 두 번째로 ‘제비를 뽑아’ 백성들을 성읍에 거하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서 제비를 뽑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하는 행사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제비뽑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권리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거하게 된 사람들은 주권도, 권리도 없었지만, 자원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길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축복하면서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격려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자원하는 사람, 자신의 권리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상황을 지배하는 능동적 삶 살아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수동적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다해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아무리 억압적인 상황이라도 지배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배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 5:38-41)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무거운 짐도 종으로서 지지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노예로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 상황의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함께 하는 백성들도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들을 성벽재건 사업에 동참시켰고, 예루살렘 거주에 함께 동참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3절에서 12장 26절까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모두가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스타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일꾼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붙잡아 천대까지 복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켰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화평과 일치를 얼마나 이루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나의 이름을 날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기억하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저는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을 기록하고 여러분을 기뻐하고 축복하고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존귀케하는 은혜와 은총을 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물을 흘린 자만이 진정한 기쁨의 의미를 압니다. 모든 백성이 자원해서 얻는 승리, 성벽의 재건은 진정한 공동체의 회복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승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 예배로 표현합니다.
느헤미야 12장 27절과 43절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하나님께서 백성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그들에게 즐거움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들은 함께 고난을 겪고 자신의 권리를 헌신함으로 얻은 승리이기에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도비야와 산발랏이 ‘너희가 쌓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 가도 무너지리라’고 조롱했던 그 성벽에서 유대 사람 수만 명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 찬양의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도하고 대적들은 ‘저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구나’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쌓은 성벽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이 성벽은 모두의 것임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의 것입니다. 교회는 모두의 소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진정한 주인이신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성벽을 행진하며 자신들의 땅임을 주장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토지의 한 부분을 걷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땅임을 주장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 13:17)는 음성을 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수 1:3)
여러분이 발로 밟는 모든 땅이 여러분의 것이 되길 축복합니다.

자기 권리 포기로 얻는 진정한 승리

한 지도자의 바른 권리사용, 느헤미야의 하나님 앞에서의 권리포기, 이것을 통해 다 함께 성벽을 재건했고, 다함께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고, 다함께 기쁨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한국 교계의 한 지도자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난 한평생 집 한 칸도 마련하지 못했고, 내 평생 저금통장 하나도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사위집에 얹혀 살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어떤 단체의 장이 되려 노력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노벨상에 버금가는 템플턴상을 받은 한경직 목사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어느 누가 이분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이용해서 얻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러움과 영화가 그 길을 후원해줍니다.
또 다른 길은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포기해서 얻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만큼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반드시 자기 권리포기와 아픔과 수치와 모욕의 강을 건너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공입니다.

이 길을 선택한 가장 위대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길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5-12)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