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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파울 슈나이더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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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슈나이더(PauI Schneider,1897-7939)는 기도하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지 일년 뒤인 1934년 훈스뤼크(Hunsriick) 지역 딕컨쉬드(Dickenschied)에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처음으로 국가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파울 슈나이더 목사가 히틀러 동맹의 한 소년의 장례식을 집례하게 되었는데 장례식 설교가 끝난 다음 그 지역의 대표자가 소년의 무덤 옆으로 와서 '이제 이 소년은 홀스트 베썰(Horst Weasel) 지역의 하늘나라 히틀러 특공대에 속하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때 파울 슈나이더 목사는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장례식입니다. 하늘에는 히틀러 특공대가 없습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파울 슈나이더는 설교를 통해 히틀러를 지지하는 '민족사회주의적 독일 그리스도인들'(Deutschen Christen)을 배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마침내 '민족사회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선동자'라는 죄명으로 지역과 교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가을 그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집례하기 위하여 그의 부인과 함께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독일 국가의 추방명령보다 하나님의 이 명령에 더 복종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코블렌츠의 비밀경찰에 이송되었으며 추방명령을 끝까지 부인한 결과 부헌발트의 강제수용소에 넘겨졌습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을 인정하기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목사로써 하나님의 사명을 배반하는 일이었기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1938년 4월 부헌발트 수용소의 모든 포로들은 매일 아침 나치스 휘장에 경례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파울 슈나이더는 이 경례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잔인한 고문을 받았고 수용소와 죽음의 감방인 토치카에 갇혀야 했습니다. 그는 감방 창문에서 수용소 연병장에 있는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생존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는 비밀경찰 살해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고발하였습니다. 이 고발의 소리는 점점 더 짧아졌습니다. 감방 수위들이 그를 짓밟고 입을 다물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3개월 동안 그는 끝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부헌발트에 감금되었던 포로들의 보고에 의하면 결국 파울 슈나이더는 피를 흘리는 한 조각 고기가 되었습니다. 1939년 7월 14일 그는 강심제 주사로 살해되었습니다. 파울 슈나이더는 견고한 신앙, 그리고 확고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용소에서 고난 받는 형제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견고한 믿음과 확고한 소망, 그리고 뜨거운 사랑의 원천은 그의 기도에서 나왔으며, 복음 증거를 위한 하나님의 소명, 딕컨쉬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확신을 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고문의 고통 속에서 이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짓밟혀 죽어갔지만 그늘진 수용소에 빛으로 살았습니다. 파울 슈나이더 목사는 수용소에서 짓밟혀 죽어가는 고난 속에서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고난 받는 메시야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핍박받는 민중 속에서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 비로소 복음화 되어 가는 자신을 확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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