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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아 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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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는 신약 고린도전서 13장과 함께 사랑을 노래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담은 책입니다. 한문 '아'(雅)자는 '맑다, 바르다, 우아하다'라는 뜻입니다. '가'(歌)는 물론 '노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雅歌'는 문자적 의미로는 '맑고 우아한 노래, 고상한 노래'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 의미 때문에 책 제목이 된 것은 아닙니다만, 아가서의 내용 속에 이 의미는 충분히 들어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제목은 '쉬르 하쉬림'( )입니다. 의미는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 '최고의 노래'(the Best Song)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아가,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섯 권 성경을 '오축'(다섯 두루말이)이라 부르며, 이스라엘 명절 때에 각각 한 권씩 읽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아가, 오순절에는 룻기, 예루살렘이 파괴된 압(Ab)월 제9일에는 예레미야 애가, 장막절에는 전도서, 부림절에는 에스더를 각각 읽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가서의 경우는 구약 성경 중 가장 늦게 정경(正經)으로 인정되었지만, 그 어느 책보다도 더욱 사랑을 받은 책이었습니다. 1세기 말에 살았던 아카바라고 하는 랍비는 '이스라엘이 아가를 얻은 날이 태초로부터 지금까지의 전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라고 극찬하면서 '아가서는 가장 거룩한 책 중의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가서가 정경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많은 오해를 받은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강해를 들음으로 알게 되겠지만 아가서의 내용이 남녀의 농도 짙은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같이 낮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가 어떻게 거룩한 책이 될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그래 이스라엘은 만 30살 이하의 청년들은 아가서를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1세기 말 얌니아 종교 회의에서 정경으로 인정된 이후로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에서도 정경으로 인정되어 많은 사랑을 받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아가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물론 그 배경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라는 시골 처녀와의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아론사이드(H. A. Ironside)의 배경 설명을 들으면 아가서 전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북쪽, 약 50마일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왕은 포도원을 소작농에게 맡겼는데, 그 소작농은 술람미 가정이었습니다. 술람미의 가정은 어머니와 두 오라비가 있었으며, 두 오라비는 술람미의 이복 형제였습니다. 이복 오라비인 두 오빠는 술람미를 포도원으로 항상 내몰았습니다. 그녀는 뙤약볕에서 일을 많이 하여 검게 그을렸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고, 작은 여우가 포도원 담에 구멍을 뚫지 못하도록 하고, 양을 치며 온종일 지치도록 일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솔로몬 왕이 목동으로 변장을 하고 포도원을 방문합니다. 솔로몬 왕의 한눈에 술람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술람미에게 관심을 보이자 술람미도 이내 솔로몬 왕을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 술람미는 변장한 솔로몬 왕을 왕으로 알지 못하고 그저 한 목자로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후일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술람미는 사랑하므로 병이 납니다. 얼마 후 왕은 가마를 보내어 술람미를 예루살렘 왕궁으로 불러 술람미를 왕비로 맞이합니다. 아이론사이드의 이야기는 아가서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만을 전하고자 기록된 책은 정녕 아닙니다. 예로부터 아가서를 통하여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여러 해석이 시도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풍유적 해석, 문자적 해석, 유형적 해석입니다.
먼저 풍유적 해석은 아가서의 사랑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신랑인 여호와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과의 영적인 사랑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해석합니다. 주후 55년경의 탈굼역은 아가서를 구절 구절마다 그 말씀을 비유로 보고 솔로몬 왕은 하나님, 술람미는 이스라엘을 비유한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오게네스도 이 해석을 받아 들여 신랑을 예수로, 신부를 성도들의 영혼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문자적인 해석은 아가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합니다. 주전 5세기에 데오도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아가서는 솔로몬과 애굽 바로왕의 딸인 공주와의 결혼식 때 부르는 노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해석은 제2차 콘스탄틴노플 종교회의에서 정죄되어 교회에서 배척되었습니다. 후에 하인리히 에발트라는 사람도 문자적 해석을 하였습니다. 아가서에는 술람미에게 두 명의 청혼자가 등장한다고 해석하고는, 한 명은 솔로몬 왕이고 또 한 명은 시골 목동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술람미는 왕의 청혼을 뿌리치고 가난한 목동을 선택하는 정절을 지키는 시골 처녀였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와 같은 윤리적 특성 때문에 아가서가 성경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이 해석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해석에서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형적 해석의 출발은 아가서가 성경이라는 분명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곧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이라는 원리가 그 원칙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유형적 해석은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술람미는 교회의 모형이라고 해석합니다. 캠블 모간의 말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서는 먼저 단순하고 우아한 인간적 애정시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우리들은 본 시가 인간의 영과 성령의 영, 그리고 궁극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교제의 기쁨을 노래한,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드러낸 것으로 승화시켜 이해해야 한다.'

1. 1절은 아가서의 제목(title)입니다.
이것이 아가서의 전체 주제이며 책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출생 때부터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무엘하 12:24-25 말씀은 이러합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여호와께 사랑을 입음)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물론 솔로몬이라는 이름 그 자체도 '평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솔로몬을 평화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평화의 왕, 사랑의 왕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게 되어 이제까지 그 누구보다 더욱 뛰어난 지혜자가 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을 지었으며(왕상 4:32), 그 중에 으뜸은 잠언과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였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 왔고(마 3:17), 주님의 생애는 평화의 왕으로 승리하신 생애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복음과 사랑의 노래가 넘쳐났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낱낱이 기록하였다면 이 세상이라고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였을 것입니다(요 21:25). 해서 정말 요긴한 말씀, 아름다운 사랑의 말씀만을 정수로 추려서 남겨 두었으니 곧 오늘 우리가 항상 읽는 네 권의 복음서인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의 입에서는 절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나옵니다. 사랑 받고 있는 사람도 절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왜요? 사랑을 받으니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입니다. 사랑에 노래가 없다면 어찌 참사랑이라 하겠습니까? 주님 말씀을 들어보세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체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신령한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시 23:3)이십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성도들이 부를 노래이며, 찬양 중의 으뜸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찬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세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또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이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그러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노래, 신령한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5:19)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입에서는 사랑의 노래가 있습니까? 신령한 찬송을 부름으로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의 사랑이 확증되고 있습니까? 종은 기원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 하늘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평안과 주님의 위로가 크게 임할 줄 믿습니다.

1886년 런던호가 비스케이(Biscay)만에서 침몰할 때에 배 안에 있던 승객들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배 안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두 얼굴에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평안의 미소를 띠고 눈물을 흘리며 배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분명 그 영혼들은 찬송을 부르는 그 순간에 하나님 나라의 하늘 문을 통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노래부릅시다. 그리고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여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사랑하므로 끝까지 사랑의 승리를 완성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되십시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 크게 영광 받으시고 넘치는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하는 마음은 이미 작은 천국이다. 감사하는 마음 속에는 시기도 질투도 미움도 원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마귀의 세게에는 감사가 없다'고 하였다.

2.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놀랍습니다. 사랑은 환희입니다. 사랑에 대한 찬사를 아무리 많이 하여도 부족합니다. 정말 사랑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요 3:16). 바로 '독생자 예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일까요? 물론 세상은 아름답습니다(여기서 세상은 자연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름답다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저와 여러분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는 임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나, 거짓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임의 모든 것은 다 아름답기만 합니다. 누가 내 사랑을 헐뜯어도 내 사랑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사랑하는 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신부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 5: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가 비록 보잘것없이 보여도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가장 큰 사랑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상 눈으로 보아 업신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사랑하는 최고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노래를 보세요. 술람미 여인은 이제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기를 업신여기고 시기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보면서 그녀들에게 한마디합니다. '나를 업신여기지 말아라'(5,6절) 왜 그런지 아세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솔로몬 왕궁 가까이 살면서 왕을 사모하는 처녀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신분이 높은 귀족의 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좋은 음식과 좋은 의복을 입고 또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미용도 열심히 합니다. 교양을 쌓기 위해 학교도 다닙니다. 예루살렘 처녀들은 언제나 화려하고 우아하게 보입니다. 그녀들의 자랑은 백옥 같이 하얀 피부입니다. 마치 TV 광고의 문구와 같이 '백색 미인'을 자랑하는 여인들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뽐내는 여인들이 바로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화려한 의상에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처녀들이 검게 그을고, 투박한 옷을 입은 시골 처녀 술람미를 업신여깁니다.

술람미는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졌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구스 여인이기 때문에 검다라고 해석하였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원래 술람미도 예루살렘 처녀들처럼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아가씨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오빠들이 그녀를 포도원으로 자꾸 내몰아 내었기 때문에 햇볕에 그을린 것입니다. 6절에 '내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말씀으로 술람미 처녀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녀의 가정 환경은 아버지가 안 계신 가정으로 보여집니다. 아가서 전체에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한 구절도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술람미의 어머니가 재혼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은 술람미의 배다른 이복 오빠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술람미를 포도원을 내 몰은 것입니다.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라는 말은 곧 그녀의 오빠들이 술람미에게 포도원 일을 혹사시켰음을 가리킵니다.

오빠들의 포도원에서 힘들게 일하는 연약한 시골 처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남루한 의복을 입고 햇볕에 검게 그을고 피부가 거칠어진 시골 처녀가 상상되십니까? 바로 그 처녀가 술람미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예루살렘의 하얀 피부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예루살렘 처녀들이 업신여긴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내적 모습을 말합니다. '나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오. 게달의 천막처럼 검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오. 내가 햇볕에 그을려 검을지라도 나를 업신여기지 말아요.'

게달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나은 서자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입니다(창 25:13). 게달이라는 뜻은 '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양과 염소를 치는 족속이었으며, 그들은 흑염소의 가죽으로 천막을 만들고 살았습니다(사 60:7, 겔 27:21). 포도원에서 햇볕에 그을리며 거칠게 일한 술람미가 비록 게달의 천막과 같이 보잘것 없이 보인다 할지라도, 실상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술람미의 참 모습은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오'라고 자신의 미를 자랑합니다. 겉보기에는 게달의 장막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은 술람미의 아름다움.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 왕이 야외 행차 때에 들에 치는 차양막을 말합니다. 그 휘장에는 아름다운 무늬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최고의 품질로 짠 천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술람미의 허풍이요, 교만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자기의 겉 모습이 아니라 솔로몬을 사랑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처럼 하얀 피부, 고운 피부, 화려한 의상은 입고 있지 못하여, 게달의 천막과도 같이 검고 칙칙하게 보일지라도, 실상 자신은 흰 피부의 아가씨였으며, 가슴 속에 타오르는 사랑은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화려하고, 뜨겁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7절이하에서 솔로몬은 이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내 사랑하는 자야! 내 어여뿐 자야!'라는 말을 6번이나 합니다.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이는 술람미 여자가 사랑하는 솔로몬 왕을 그리워하여 함께 있고 싶어서 한 말입니다. 목자들이 양떼를 칠 때 햇볕이 가장 뜨거운 한낮에 그늘에서 쉬며 양떼들로도 쉬게 하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은 마치 선한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백성을 보살피는 솔로몬 왕의 은택을 자신도 받고 싶어하고 나아가 그와 더불어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7절하)-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연인 솔로몬을 찾기 위해 그의 동무의 양떼 가운데서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그 곁에서 수치를 당하는 경우를 우려한 것입니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희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8절하)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왕의 출입이 빈번한 곳을 택하여 기회를 보다가 왕에게 사랑을 구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 근거로는 염소 새끼가 왕에게 예물로서 바쳐진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삼상 16:20). 솔로몬 왕이 그의 사랑하는 자 술람미 여자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합니다(9절).

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일반적으로 솔로몬 왕 시대에는 애굽에서 좋은 말들을 수입하여 군마(軍馬)로 사용했었다(왕상 10:28, 29).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애굽산 준마에 비유하고 있는데 특히 그녀의 젊음과 순박한 야성미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미모가 특히 빼어났습니다. 뺨의 아름다움을 장식해 주는 땋은 머리털과 목에 먹걸이가 아름다웠습니다(10절).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911절)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서로 떨어져 상대방을 부르던 연인들이 함께 만나 번갈아 노래하며 사랑의 기쁨을 나누는 등 상대방을 기리는 노래들이다.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솔로몬이 베푼 연회석의 잔칫 상에서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12절).
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도'는 히말라야 산이 원산지이며 주로 남인도 지방에서 자라는 마타리과의 방향성 식물 나르드(spikenard)를 가리킵니다. 이는 약 70cm의 크기로 자라며 잎이 넣고 꽃은 다발 형식으로 피며 뿌리가 굵습니다. 나도(또는 나드) 향유는 주로 이 나무의 줄기나 뿌리에서 채집되는데 병에 넣어 가지고 다니거나 뿌려서 사용합니다. 또한 이것은 방부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막 14:3-9). 이처럼 솔로몬 왕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몰약은 남부 아리비아나 인도지방 등지에서 자라는 미르라(myrrh)라는 방향(芳香)성 나무에서 채취한 액체 또는 응고한 고체의 방향(芳香) 물질입니다. 이 미르라나무는 보통 1.5-5m 크기로 자라는데 그 줄기나 가지에 상처를 내어 방향성 수액을 흘러나게 합니다. 이 몰약은 관유 제조시(출30:22-25), 향유(잠 7:17), 시체의 방부제(요 19:39)등으로 다양하게 쓰여졌습니다. 특히 히브리 여인들은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도록 외출시 이 몰약을 조그만한 곽이나 주머니에 담아 가슴까지 내려 오도록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는 항상 아름답고 달콤한 향기를 발하는 향낭처럼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엔게디란 '염소(새끼)의 샘'이란 뜻입니다. 이는 헤브론 남동쪽 24km 지점, 사해의 서쪽, 유다 광야의 남동쪽에 위치한 한 성읍(수 15:62) 또는 그 주변의 들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다윗이 그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숨은 지역으로도 유명합니다(삼상 23:29-24:22). 그리고 고벨화는 인도가 원산지이며 아라비아나 팔레스틴 등 중동지역에 자생하는 '헨나(Henna)'라는 작은 관목입니다. 이 꽃 나무는 주로 2-3cm 크기로 자라는 것으로서 그 잎사귀는 연녹색의 타원형이고 그 꽃은 흰색과 노란색 또는 황색으로서 작은 송이로 뭉쳐 피며 그 향기가 진하여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였습니다. 따라서 본절 역시 13절과 유사하게 솔로몬 왕을 향한 달콤한 연정(戀情)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때부터 언급된(창 8:8) 새로서 구약에서 제물로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레 5:7; 12:8). 예수께서는 이를 성품이 온순하고 순결한 새로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마 10:16). 본절에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의 눈을 비둘기(의 눈)에 비유한 것은 그녀의 눈이 특히 맑고 초롱초롱하며 순결하게 보였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바로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교회의 자랑입니다. 교회의 긍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이어야 합니다.
①교회와 세상,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일까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물론 세상이 더 매력적이며, 더 아름답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인 예배당 건물만 하여도 그렇습니다. 가장 잘 지어진 예배당도 세상 특급 호텔이나 왕이 거하는 궁궐보다는 못합니다. 기독교 문화와 세상 문화를 비교해 보아도 언제나 매력적인 쪽은 세상입니다. TV, 음악, 춤, 쾌락, 음식, 등 세상은 화려하고 뭇 사람의 눈을 현혹시킬만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정말 세상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들로 가득합니다(창 3:6).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교회를 업신 여깁니다.

②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라 해도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직 교회에 있습니다. 세상이 업신여기는 교회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사랑하십니다. '주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 했습니다(행 20:28). 비록 교회가 게달의 장막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아야 합니다. 교회의 모습이 솔로몬의 휘장과 같지 못할 때, 주님의 사랑은 멀어집니다.

③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출발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림을 받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은 하나님의 기준에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부름을 들어보십시오(신 7'6-9).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구약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러했다면 신약 교회를 부르신 주님의 말씀은 어떠했을까요? 고린도전서 1:26-31의 말씀을 읽어보세요. 지혜 없는 자, 문벌도 보잘것없는 자,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들을 부르셔서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30-31의 말씀.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인위적으로 가꾸고 꾸민 거짓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의 본체이신 주님으로 받은 사랑을 반사하는 아름다움입니다.

3. 교회의 아름다움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모습이 넘쳐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세상을 사랑하나, 교회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직 이것이 교회의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힘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사랑하는 임을 무조건 좋아하고 따르듯이, 교회는 주님을 무조건 좋아하고 끝까지 따릅니다.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거나 변질될 때에 교회는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교회에게 부탁하십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 처음 사랑을 가지라'(계 2:4-5)

둘째, 교회는 주님을 위한 고난을 기뻐하기에 아름답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가정을 위해 오라비들의 내몰음에도 불평없이 응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검게 타면서까지 포도원을 돌보았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건강한 미를 나타나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의 하얀 처녀들만을 보다가 포도원에서 검게 그을리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처녀의 모습이 솔로몬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핍박을 받는 성도를 귀하게 보십니다. 세상은 교회를 핍박합니다. 멸시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세상을 향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로 알고 묵묵히 모든 핍박과 멸시를 감내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짓밟을 때 교회는 더욱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교회를 치켜 세울 때 교회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세상 속으로 타락해 갔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고서도 고난 길, 가시밭 길을 마다한다면 그는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할 포도원은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얼굴도 검게 타고, 의복도 남루해지고, 피부도 거칠어질 정도로 일해야 합니다. 바로 사랑을 전하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우리를 내몰지도 모릅니다. 술람미의 오라비들이 술람미를 포도원으로 내몰듯이, 우리를 그렇게 핍박하고 거칠게 대할지도 모릅니다. 어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라고 주님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미워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 안을 때 사랑에 감복되어 그들도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사랑의 형제 자매가 될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주님의 휘장이 둘러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왕이 머무는 곳에 왕실의 휘장을 두르고 쉴 곳을 만듭니다. 그 휘장은 게달의 휘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있습니다. 나라 안의 어떤 백성도 왕의 휘장을 흉내내지 못합니다. 왕만의 전용 휘장입니다.

교회는 만 왕의 왕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휘장을 두른 곳입니다. 교회에는 왕되신 주님의 말씀이 있고, 왕께서 하사하시는 각종 은혜가 넘치는 곳입니다. 왕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예배 의식도 정해진 시간에 드려집니다. 그리고 왕되신 주님은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신부인 교회에게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왕의 휘장이 둘러쳐진 교회는 잔칫집이요 왕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입니다(아 2:4).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교회는 왕의 침실입니다(아1:16,17).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백향목'은 소나무과의 상록수로서 보통 24-30m 또는 40m씩 자라며 그 곁 가지 또한 10m 씩 뻗는다. 특히 이 나무는 줄기가 곧게 뻗어 자라고 나무의 질이 견고하여 양질의 건축 목재로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왕상 5:6, 8; 9:10, 11). 성경에서는 번영(시 92:12), 영광(왕하 14:9)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잣나무' 역시 소나무과의 상록수입니다. 이는 보통 17-20m 정도로 자라며 일반 솔잎보다 두꺼운 다섯 잎을 내는데 그 나무질이 견고하고 색깔이 좋아 백향목처럼 건축 재료로 잘 사용됩니다(왕상 6:15, 34). 결국 본절은 술람미 여자와 솔로몬 왕이 거하는 안식처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우며 견고함을 암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주 안에서 생명을 얻고, 기쁨을 얻고, 은사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감히 어찌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여기에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그 열쇠를 받았으니 그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문을 열면 하늘의 보화, 하늘의 지혜, 하늘의 지식이 풍성하게 쏟아질 것입니다(골 2:3). 교회는 아름다움의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비록 흘겨보아도 조금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검다하여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검어진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게달의 천막 같아도 실상 우리의 모습이 솔로몬의 휘장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아름다움의 긍지를 잃을 때, 이미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확고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지 못할 때, 교회는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아릅답다 하는데 어찌 스스로 못났다고 자학하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십시오.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자랑은 주님께 영광이요, 사랑의 자랑입니다. 정작 사랑하는 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법입니다(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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