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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솔로몬과 술람미의 노래 (아 0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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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신랑의 미(美)에 대한 예찬이다. ① [신랑의 칭찬]이니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인데 비둘기 눈은 순결(純潔)무사(無邪)함을 가리킴이다. 눈은 마음의 대표니 우리 신자는 순결무사함이 비둘기 눈 같아야 하겠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정결한 동정녀적 신자를 요구하신다.예수님이 이렇게 보시는 자는 복이 있 다. ② 신부 대 신랑이니 푸른 침상은 평화를 상징함이요, 백향목궁은 화미(華美)를 대표함이다. 화평과 미(美)로써 조직된 축복의 신가정이요 이상적인 부부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 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였다(엡5:32).


1. 솔로몬이 술람미를 노래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노래하신다.
1)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15) ― 솔로몬은 술람미 여자의 미(美)를 거듭 거듭 말한다. 아하수에로 왕 은 에스더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라의 반을 줄 것을 허락하였다(에5:3). 영해는, 우리 주님은 신부와 같은 교회를 아름답게 보시고, 잠1:8-9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 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고 하였다.

잠31:30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벧전2:20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 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과 생명까지 희생하셨다 (요19:30). 요15:13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 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다.


2) 눈이 비둘기 같다고 (:15) ― 비둘기는 구약 율법상 새 중에 가장 정결한 새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사용하였다(레1:4). 신약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마3:6). 술람미 여자는 그의 미(美)가 눈에 있었는 듯 하다. 눈은 순결, 유화, 자애의 특성을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사자, 독수리를 드리라고 하지않으시고 소, 비둘기를 드리라고 하셨다.

영해는, 성도의 안목(眼目)은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10:16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였다. 갈5:22-23에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 했고, 요일4:7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 하였다. 그리고 요일4:16에 '하나님이 우리 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며 사람을 대하여야 할 것을 의 미한다. 성도들의 눈에는 살기가 있으면 안된다. 비둘기와 같이 온유와 자비의 눈길이 있어야 한다.


2. 술람미가 솔로몬을 노래
1) 어여쁘고 화창하다고 (:16) ― 솔로몬은 과연 인물이 잘 난 것을 말한다(시45:2).
영해는, 성도의 신랑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더라'(요 1:14) 하였다. 계21:23에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딛2:13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 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 했다.

2) 침상은 푸르다고 (:16) ― 열열히 사랑하는 장소인 비원의 초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해는, 성도가 예수와 더불어 교통하며 평안히 쉬는 곳이다(마11:28).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시기를 좋아 하셨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좋아 하시는 자리로 가야 한다.

3) 집은 백향목 들보와 잣나무 석가래라고 (:17) ― '집'은 솔로몬 왕궁의 밀실을 의미한다. '백향목 들보'는 둘레가 40자, 높이 100자로서 잘 썩지 않고(시16:10, 엡4:22), 향기롭고(계5:8, 8:3, 레6:15), 견고 한(잠25:5, 고후1:21, 롬1:11) 상록수 이며 굵고, 길고, 곧은 재목이다(사14:8, 슥11:2).

시16:10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 다'고 하였고, 엡4:22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라 하였다. 계5:8에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 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하였고, 계8:3에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 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잠25:5에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 고히 서리라'고, 고후1:21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 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1:11에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 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잦나무'는 크고, 장엄하고, 비싼 목재이다. 영해는, 성도는 백향목 같은, 신앙에 썩지 않는 잣나무 같 은 절개로 밀실을 만들어 예수님과 교제하여야 한다.

3. 술람미가 자신을 노래
1) 샤론의 수선화라고 (2:1) ― '샤론'은 갈멜산 남팡에 위치한 평원(대상5:16)인데, 길이 90리, 넓이 평균 30리쯤 된다. 나무가 많고, 동쪽은 산악이요, 서쪽은 대해이다. '수선화'는 이사야 35:1의 백합화와 같은 원어이다. 다년초로서 팔레스타인의 원생하고 토민이 사랑하 는 꽃으로 그 꽃을 꺾어 몸에 장식으로 한다. 구근식물(球根植物)로서 가을에 흙에서 녹색의 싹을 움트 게 하고, 겨울비를 만나면 급히 뻗어 얼마 아니하여 향기 높은 꽃을 피게 한다. 약용, 향료로서 사용한 다. 술람미는 평원에 자연히 피어진 볼 모양 없는 꽃과 같다는 의미이다.

영해는, 성도는 이렇게 볼 모양 없는 신부로서 겸비함으로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마3:11에 세례 요한 은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였고, 고전15:9에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로라'고 하였다. 눅1:48에 마리아는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 컬으리로다'라고 하였고, 고후7:6상에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2)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2:1) ― '골짜기'는 봉우리의 반대이니 '겸비함'을 의미한다. '백합화'는 팔레 스타인에 흔한 꽃이다. 그러나 향기롭다. 수람미는 외롭게 피어 보는 이 없지만 향기를 토하는 백합화 같다는 의미이다. 시68:6상에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 니라', 애5:3에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시102:7에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시10:14에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시25:16에 '주 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영해는, 성도는 외롭고 고독하고 비천한 존재이지만, 만일 나에게 무엇인가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세상에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이 한없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아야 한다 (고전1:30, 겔16:14, 고후6:18).

4. 솔로몬의 화답
1) 여자들 중에 사랑하는 자라고 (2:2) ― 솔로몬은 세상 많은 여인중에, 또한 예루살렘 많은 여자중에 술람미를 사랑하였다. 영해는, 세상에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예수님이 사랑하신다. 사10:22에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고 하였다.

2)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2:2) ― 팔레스타인에는 200여 종류의 가시나무가 있다고 한다. 솔로 몬은 자기의 사랑하는 술람미가 환난과 핍박의 어려운 환경에 있음을, 즉 여러 여자들의 질투와 비방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영해는, 성도가 세상에 사는 것은 가시밭의 백합화 같다. 겔2:6상에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와 같이 여러 가지 환란(행14:22, 딤후3:12), 핍박 중에 향기를 발하여야 한다. 행14:22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 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으며, 아4:16에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 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하였다.

'계달의 장막같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돌보는 이 없는 들꽃 같은 우리를 사랑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시밭의 백합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가시 가운데의 백합화 (아 2:1-2)

성도는 행복한 가정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져야 합니다. 건전한 가정이 있을 때 잘사는 나라가 존재 할 수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 각자의 사명감이 투철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가시나무 속에 핀 백합화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볼 때에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것이 유난히 돗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특성보다는 그 것과 비교되는 것이 조화를 이룰 때에 돗 보이게 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별 사람 아닌데도 돗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주변의 비교되는 것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에 성도들을 행하여 가시나무 가운데의 백합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서 무한한 찬사일수도 있고 아주 안 좋은 표현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준 말씀은 감당하기 어려운 찬사입니다.

1.가시나무 가운데의 백합화는 엄청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이 백합화가 꽃들이 만발한 꽃동산에 피어 있는 백합화라고 하면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왜? 배경이 모두 아름다운 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면이 온통 가시로 덮인 가시 밭의 백합화는 발견되지 않을 수 없고, 예사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배경이 가시밭의 백합화냐, 꽃밭의 백합화냐에 따라서 존재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인데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찬사요,은혜요,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을 가시로 보시고 보잘 것 없는 우리,품위없는 우리를 향하여 백합화, 그것도 가시 가운데의 백합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찬사를 들을 만한 품위도,위상도,인격도 못됨을 인정합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고상해 졌고,우아해 졌고,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고후4:7에 바울 사도는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그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가치성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것은 그 속에 든 보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엄청남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이 어찌 감당 할 수 없는 찬사가 아닌가!

2.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는 말은 사명감을 의미합니다.
허더러지게 핀 꽃들 속에 그냥 묻혀 있는 백합이라면 그냥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존재 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궂이 사명감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시밭의 백합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꽃들이 해 낼 수 없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주변에 우아함,청초함,찐한 향기 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창조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다일 공동체의 대표이신 최일도 목사님이 쓴 '밥퍼'라는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사창가에 들어가서 전도함으로 한국의 어두운 사회를 바꾸어 놓은 분입니다. 산상보훈 중에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이 말씀도 감당하기 어려운 찬사요 사명감이 넘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느 곳에 있든지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명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왔다간 사람들은 그 사명을 다 한 분들이고, 지금도 살아 있는 우리는 사명이 아직 남아 있기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生命이란 뜻이 살아라 하는 명령 아닙니까? 이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여러분 세상이 악하다는 구실로 세상에 대한 사명을 포기한다면 마치 밤이 어둡다고 등불을 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둡기 때문에 불빛이 필요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우리는 사명자입니다.

3.가시나무 가운데의 백합화는 수난이 숙명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백합화의 심겨진 자리는 돗 보이는 가시밭의 백합화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수난이 연속되는 곳입니다. 이 백합화가 가만히 있지 않고 자랍니다. 주변의 가시들도 자랍니다. 이는 수난의 숙명적 관계를 말합니다. 자라면 자랄 수록 수난은 더 심합니다. 가시만 자라고 백합이 자라지 않거나, 백합이 자라고 가시가 자라지 않아도 안전합니다. 그러나 둘 다 자라는 것들입니다. 신앙이 자라고,믿음의 삶이 깊어 질 수록 수난은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교회는 수난도 없고, 성장하지 않는 신앙은 수난이 없습니다. 수난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안일과 평안을 구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일은 무사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평안은 고투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안일보다는 평안을 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셨지 안일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요14:27) 고투 끝에 오는 평안을 오늘도 갈망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가시나무 가운데의 백합화입니다.

마음 속으로 그려봅시다. 가시나무 가운데의 백합화, 이는 분명 아름 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조리게 합니다. 그 주변의 가시로 인하여 당 할 수난 때문에... 내노라 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가시로 비유하시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백합화라 하시니 이 어찌 감당 할 수 없는 찬사가 아닌가! 돗 보이는 우리 존재 오직 예수 때문일세. 거기서 주신 사명 잘 감당하리라. 수난은 가시 가운데의 백합화에게는 숙명적인 것 어찌 마다 하리요. 사명을 다한 사람들의 그리움, 사명을 감당해야 할 우리들의 갈 길.... 깊이 생각하는 달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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