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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뛰어난 통찰력을 주는 말씀 (시 119:9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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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의 여덟 번째 주제는 ‘삶의 뛰어난 통찰력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과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화를 내고, 쉽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죄에 대해 나약하게 무너지고,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다가 때를 놓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방황과 후회, 낙심과 실패 등에 대처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는 통찰력을 사모합니다. 우리에게 삶의 뛰어난 통찰력이 있어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렵고 어두운 인생에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사랑해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주는 말씀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말씀이 삶에 통찰력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97절에서 100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97절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그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항상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게 짐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그 말씀이 원수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명철하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스승의 지혜와 노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명철함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7장에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 왕은 도망을 가게 됩니다. 도망하는 다윗에게 가장 큰 아픔은 바로 사랑하는 압살롬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과 신하 아히도벨마저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모략과 지식을 주며 배신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도벨과 함께 힘들고 어려웠던 세월을 함께 보내며 그를 믿었는데, 그가 배신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 왕의 후궁들을 취해 동침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자신에게 1만 2천 명의 군사를 준다면, 다윗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사무엘하 말씀에서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략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 모략은 굉장히 정확하고 상황에 따라서 압살롬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후새라는 사람을 통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략을 삼은 후새로 인해 다윗은 역전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죄악으로 떨어뜨리려는 원수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게 합니다.

요셉은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가 30세에 애굽을 다스릴 때, 나이가 많은 술사들도 요셉의 지혜를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 역시 포로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와 총명은 왕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총애 받는 신하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대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며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지혜는 원수보다 지혜롭고 스승이나 노인보다 명철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
둘째로 주님의 말씀이 삶에 통찰력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101절에서 104절까지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01절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순종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악한 길로 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이 어둠과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죄와 벗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길을 싫어하시고 죄악을 싫어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이 아무리 보기 좋게 포장돼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버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세상에 어중간한 길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명의 길이 아니면, 멸망으로 가는 죄악의 길뿐입니다. 102절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배워야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씌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들어 있습니다. 시편 19편 10절에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그 뜻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주린 영혼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 목마름은 해갈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을 때, 영혼은 기름져지고 주님과 감미로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혼란 중에 주님의 말씀으로 길을 발견하게 될 때, 그 말씀은 진실로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됩니다.

또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거짓 행위를 미워하는 일입니다. 104절에서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죄악은 어떤 모양이든 어떤 경우이든 우리와 벗할 수 없고 같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달콤하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많은 것을 보상한다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부분의 죄악이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한국의 생활 문화에는 죄에 대한 관념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흐르는 성도는 죄와 벗하면 절대 안 됩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이 죄로 규정한 모든 것들에서 떠나는 일입니다. 악한 길로 가지 않고 거짓 행위를 미워하며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달으려면
셋째로 주님의 말씀이 삶에 통찰력을 주기 위해선 우리가 말씀으로 등불을 삼아야 합니다. 105절에서 108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주님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어둡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둠 그 자체이며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생에는 실패와 좌절, 근심과 걱정, 아픔과 슬픔, 괴로움과 고통, 고난과 역경, 순풍보다 역풍, 배반과 흉포, 배교와 패역, 간교와 간악 등 어둠의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배반당할 때도 있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오해와 무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원치 않지만 육신에 병이 들어 고통을 받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 빛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과 4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둠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역풍을 맞아 애쓰고 수고할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좌절과 실패, 근심과 걱정, 아픔과 슬픔으로 쓰러질 때 빛이 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일으켜 세우고 고이 안아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빛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신실하신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등불을 삼는다는 것은 겸손하게 말씀에 의지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 도움이 필요하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말씀으로 인생의 등불을 삼는다는 것은 매일 큐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간마다 우리가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밝히 보여주는 등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큐티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말씀을 인생의 길에 등불로 비춰야 합니다. 나의 하루를 돌아봤을 때, 주님의 말씀이 진정한 빛이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등불을 삼으면 108절 말씀처럼 고난 중에서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낙헌제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양을 말합니다.
레위기 7장 1절에서 16절까지 말씀에 5가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가 나옵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성숙한 성도가 드릴 수 있는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다른 제사들은 목적이 있지만, 낙헌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무조건 감사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가 서빙고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휠체어를 타고 예배드리는 분들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두 발로 걸어다니며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저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일어서진 못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분들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으면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주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아 비춰 볼 때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호흡할 수 있으며 주일에 교회에 나와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다시 살펴보면 주님께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겐 주님께 낙헌제를 드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인생의 등불로 삼아 삶에서 놀라운 통찰력을 소유하는 성도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따르겠다는 결단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이 삶에 통찰력을 주기 위해선 말씀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109절에서 112절까지 말씀입니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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