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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이기게 하는 말씀 (시 119: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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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향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여기서 적당히 그만 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비하신 본향을 향해 끝까지 전진해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열린 눈으로 말씀보고 승리의 약속 믿으며 성실과 순종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세 번째 주제는 ‘고난을 이기게 하는 말씀’입니다. 고난은 고통이고 좌절이며 지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앞에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때로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뜻, 계획, 섭리 등을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려야
오늘 본문은 고난을 이기게 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해 줍니다. 17, 18절 말씀입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7절은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후대하다’는 것은 보상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의 종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도와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고난 속에서 말씀으로 승리하려면 첫째로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보는 눈이 열리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움과 사랑과 은혜로 새 힘을 얻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십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그래야 주님의 법 안에서 놀라운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절과 대칭 되는 10절 말씀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표현을 킹 제임스 버전에서 ‘방황하지 말게 하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바디매오라는 소경을 만났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을 치료하고 보게 하실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 소리쳤습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 잠잠하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감긴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5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차츰 눈이 떠지게 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인의 눈은 떠지고 앞에 있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며 외쳤습니다. 제자들, 바디매오, 사마리아 여인 등의 눈이 열림과 같이 우리도 눈이 열려야 합니다. 방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눈을 열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 십자가이지만,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눈을 떠서 주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거기에 십자가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 인생은 순례자의 길
둘째는 이 땅에서의 삶이 순례자의 삶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9,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인생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앉아 있는 이 순간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하던 그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존재이지 정착해서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의 삶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과 14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정처 없이 가는 게 아니라,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본향을 향해가는 순례자입니다.

구약 룻기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 온 가족이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모압에서 남편과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자 자신의 길을 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며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로 부를 것을 요청합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나의 기쁨, 나의 은혜’라는 뜻이고, 마라라는 말은 ‘쓴 물, 괴로움, 고통, 상처’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나의 인생은 꿈을 이루는 기쁨, 은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도 잃고 자식마저 잃은 비참한 고통 가운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그네길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인생은 마라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상처, 고통, 슬픔 등이 있습니다. 나오미의 고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자신의 삶을 ‘마라’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며느리 룻이 보아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인이시여,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나의 수치, 부끄러움, 고통, 눈물, 아픔 등을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 달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우리를 덮어 주실 것입니다.
20절에서 ‘상하다’는 말은 ‘산산이 부서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므로 마음이 애달파서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순례자의 길을 향해 가면서 고통과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 승리는 우리의 것
셋째는 궁극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21절에서 24절까지 말씀입니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아마 21절에서 24절까지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함을 받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오만한 사람들이 그를 책망하고 멸시하며 비웃고 힘들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원수가 자기를 모함하고 훼방하지만 그는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고난 중에도 궁극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아무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겸손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내가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만, 내 몸이 약하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병원으로 안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가족의 아픔 속에 동참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겸손해집니다. 고난을 받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수긍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난 부분을 다듬으십니다. 연약한 부분을 고난으로 보충해 주십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강해지고 성숙하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200㎞를 행군한 보병은 50, 100㎞를 쉽게 행군할 수 있습니다. 더 큰 고난과 박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지만 더욱 훈련시켜 성장하게 합니다. 고난은 고통이지만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모사’는 인격적인 스승을 가리키며 참다운 지혜를 말합니다. 선을 이기는 악은 없습니다. 선과 대등한 악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설 마귀의 권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스승이 되어 주십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어렵고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다듬기도 하시고 겸손하게도 하시며, 성장시키기도 하시고 궁극적인 승리를 베풀어 주심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넷째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 28절까지 말씀입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진토’는 무덤을 덮는 흙을 말합니다. ‘진토’가 상징하는 것은 낮고 비천하며 무가치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합니다. 고난과 고통에 의해서 죽게 된 수렁과 늪 그리고 침체를 뜻합니다. ‘붙었사오니’는 ‘결합되다, 들러붙다, 압도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25절의 ‘내 영혼이 진토에 붙였다’는 것은 죽을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주의 약속대로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불완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28절에도 ‘내 영혼이 깊은 슬픔에 빠졌으니, 주의 약속대로 힘을 주십시오’라고 시편 기자는 간청합니다. 25절 말씀은 너무 중요합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 죽기를 구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약속하신 대로 살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연약한 자가 새 힘을 얻고 절망에 빠진 자가 소망 중에 일어나며, 죽음을 앞둔 자가 소생합니다.

열왕기상 19장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긴 직후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합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진토와 같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더 이상 두려움에 살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저의 생명을 취하십시오’. 진토에 붙은 것처럼, 절망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 5절과 6절에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깊은 무덤 같은 고난과 절망 속에 있을 때,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처했을 때 엘리야 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눈물로 주님 앞에 쓰러지면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며 ‘일어나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찾아와 주셨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토에 붙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려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 성실과 순종을 선택해야
다섯째, 성실과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같이 29-32절을 읽겠습니다.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부르짖으며 그분께 나아갈 때 축복해 주십니다.

신앙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거짓과 진실, 반역과 충성, 게으름과 성실, 불순종과 순종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갈래 길에서 좁은 문, 진실, 충성, 성실, 신앙, 순종 등을 선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두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로 박해를 받았던 저의 중학교 시절,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응답하십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실과 순종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옛날과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선택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내게 주어진 길을 선택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32절에 나오는 ‘넓혀진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즐겁게 행하며 성실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는 마라톤을 끝으로 모든 경기가 끝났습니다. 폐막식도 끝나고 많은 관중들은 스타디움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선수 한 명이 골인 지점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탄자니아에서 온 ‘존 스티픈 억하리’였습니다. 그의 오른 발은 피를 흘리며 붕대가 감겨 있었습니다. 이미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왜 끝까지 달렸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억하리 선수는 대답했습니다. “조국이 나를 경기에 출전시킨 것은 이곳에서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경주를 마치라고 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향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여기서 적당히 그만 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비하신 본향을 향해 끝까지 전진해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고난 속에서 승리의 길로 달려가려면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이 순례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과 순종으로 마지막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 앞으로 달려가는 성도님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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